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54)
절대회귀-54화(54/424)
제54회 당황하니까 신비스럽지 않네.
밤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내가 혈천도마의 거처에 들어섰을 때, 그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군요.”
혈천도마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놀란 얼굴에 반가움이 번졌다.
“경계를 서는 녀석들 혼내야겠군.”
“그러지 마십시오. 조용히 어르신 뵙고 싶어서 은밀히 들어왔으니까요.”
그가 내 행색을 살피더니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이제 막 교로 돌아온 것인가?”
“네.”
“설마 돌아와서 나를 제일 먼저 찾아왔나?”
“감동을 파괴해서 죄송합니다만, 아버지는 일찍 주무셔서요.”
“어쨌든!”
“네, 맞습니다. 어르신 생각이 먼저 났습니다.”
그러면서 가져온 술병을 흔들었다. 혈천도마가 즐겨 마시는 술이었다.
술은 그의 거처 후원에서 마셨다.
방해받지 않게 그곳을 지키던 수하들을 모두 물렸다.
“자네가 출교한 지 벌써 두 달이나 되었나?”
“두 달이 채 안 되었습니다.”
이번 출교에서 쾌속보의 경지가 오르면서 돌아올 때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서 조사관 무공수련은 잘 되고 있습니까?”
“쥐방울만 한 녀석이 꽤 열심히 하고 있다네.”
혈천도마의 입에서 ‘꽤 열심히’란 말이 나왔다. 이 낯선 표현이 이들의 관계가 지금 어떤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삐딱한 듯 보여도, 심지가 곧은 아입니다.”
“내겐 한 번도 삐딱한 적 없었는데?”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 녀석이기도 하고요.”
아마 열심히 하면서도 눈치도 많이 볼 테고, 그 와중에도 또 할 말은 다 하고 있을 거다. 혈천도마는 그런 녀석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한데 아까 얼핏 보니 읽으시던 책이 시화집이던데 정말 시를 읽으시는 겁니까?”
“왜? 나는 시를 읽을 수준이 안돼 보이나?”
“수준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울리지는 않네요.”
“나도 소싯적에는 책을 좋아했네. 한동안 잊고 살았을 뿐이지.”
이 깡마르고 깐깐해 보이는 사람의 젊은 시절이라, 잘 상상되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어떠셨습니까?”
“뭐…… 어둡고 우울했지.”
“서 조사관하고 비슷했군요.”
어쩐 일인지 혈천도마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어차피 다 지나가 버린 시절인데.”
혈천도마가 술을 비웠다. 나는 말 없이 그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지나가 버린 세월에 대한 회한은 뭐라 위로할 말이 없다. 나도 한번은 겪었던 일이었으니까.
“갔던 일은 잘되었나?”
“네.”
“또다시 풍파가 일겠구먼.”
네라는 대답에서 어떤 자신감을 읽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무슨 일로 나간 줄 알고요?”
“피바람 일으킬 일이겠지.”
“저에 대한 심각한 오해십니다. 저는 평화를 좋아합니다.”
“평화는 나도 좋아해. 내 손으로 다 꿇리고 난 후에 찾아오는 그 적막하면서도 피비린내 나는 평화 말이야.”
나는 웃으며 술을 마셨다.
“오래간만에 나가니 좋았습니다. 다음에 저와 바람 쐬러 나가시죠?”
“나가면 죽이고 싶은 놈들 천지라서…… 그냥 본교에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하네.”
그가 내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조심하게. 후계자 싸움에서는 한번 삐끗하면 그대로 끝이니까.”
“제가 삐끗하면 어르신은 어쩌실 겁니까?”
“어쩌긴? 대공자에게 다시 줄을 대야겠지.”
“냉정하시네요.”
“당연한 거지. 몸통이 죽었는데 날개만 퍼덕이면 뭐하겠나? 딴 몸통 찾으러 가야지.”
혈천도마라면 진짜 그럴 것이다. 하루 이틀 안타까워한 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 대공자에게 선을 대겠지. 놀라운 것은 그런 모습을 상상해도 그리 밉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게 바로 혈천도마의 장점이다.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날 끝까지 도와줄까 배신할까,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내가 무너지면 떠날 사람이고, 아니면 내 옆을 지킬 사람이다.
“제 부탁 좀 들어주십시오.”
“뭔데?”
“오늘 저와 밤새 술을 마셔 주십시오.”
“어렵지 않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마시자더니 어딜 가나?”
“술도 좀 더 사 오고 안주도 준비해오겠습니다.”
“애들 시키면 되지.”
“제가 사 오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나는 이 술자리에 끝내주는 안주를 만들어 올 작정이다. 지난 두 달 동안 마련한 내 안주를.
나는 오늘 섭혼마존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출교했다가 돌아온 날, 그를 죽일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밤새 혈천도마와 술을 마신 사람이 될 거다. 그가 내 행적의 증인이 되어 줄 테니까.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혈천도마의 거처를 나온 나는 암영보를 발휘하며 서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섭혼마존은 오늘따라 흥분해 있었다.
매번 있는 심혼대법이었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검무극이 와서 대법을 중단하라고 협박하고 간 뒤 처음으로 하는 심혼대법이었다.
천마를 입에 담으며 협박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동안 심혼대법을 중단했다.
물론 안 들키면 되겠지만, 이미 상대가 심혼대법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검무극이 출교했다는 소식은 오히려 의심을 더했다. 자신을 안심시킨 후, 증거를 찾아내려는 수작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인내의 한계가 왔고 결국 오늘 심혼대법을 재개했다.
이렇게 공백을 두고 심혼대법을 할 때면 언제나 어린아이를 선택했다. 이럴 때면 어린 심혼이 가장 맛있기 때문이다.
밀실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던 섭혼마존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괜히 뭔가가 따라오는 것 같고 오늘따라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행이 있을 리가 없다. 자신의 그림자가 뒤를 지켜주는 흑영비술(黑影祕術)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담했다. 오직 천마를 제외하고 자신의 등 뒤에 몰래 설 수 있는 사람은 본교에 없다고.
섭혼마존이 밀실로 들어섰다.
벽에는 온갖 기괴한 문양과 글자들이 가득했고,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향이 사방에 피워져 있었다.
밀실 중앙 제단에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섭혼마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손을 내밀어 아이를 깨우려던 그 순간, 누군가 그의 머리채를 확 잡아챘다.
‘!’
섭혼마존이 반격하려 했지만, 상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짝!
뺨을 얻어맞은 섭혼마존의 고개가 돌아갔다.
속수무책으로 뺨을 허용한 후에야 쌍장을 휘둘러 상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뒤로 훌쩍 물러난 섭혼마존에게 상대가 차갑게 말했다.
“내가 하지 말랬지?”
섭혼마존은 그제야 누가 자신을 때렸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검무극이었다.
섭혼마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무리 기습이었다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충격이었으며 수치였다.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당황하니까 당신, 전혀 신비스럽지 않네.”
순간 섭혼마존이 흠칫했다. 원래라면 그는 목소리로 사람을 현혹했다. 소리가 울려 퍼졌고, 반복되었으며, 속삭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평범한 옆집 남자가 화가 난 모습이었다.
“이게 당신 본질인가?”
발끈 분노할 법도 했는데 섭혼마존은 심호흡을 한 번 한 후에 평정심을 되찾았다.
“내가 이공자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군. 맞아도 싸.”
맞아도 싸다는 말이 반복되면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평소 자신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제 좀 당신답네. 이래야 죽일 맛도 나지. 아까 그런 모습은 실망이었어.”
섭혼마존은 동요하지 않았다.
“이공자, 내 질문부터 답하게. 대체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것인가?”
“당신 따라 들어왔지.”
내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겠지만 내 대답은 사실이었다.
섭혼마존은 언제나 자신의 뒤를 흑영비술로 지켰다. 풍신사보가 대성을 이뤘다면 모를까, 아직은 그의 흑영비술을 피해서 암영보를 발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혈안정수를 눈에 넣은 내게 흑영비술의 파훼법이 보였고, 그것을 파훼하는 순간 내 암영보가 먹혀들었다. 오히려 그의 그림자에 내가 숨어드는 격이었다.
“내가 어떻게 들어온 것이 뭐가 중요하겠어? 왜 들어왔느냐가 중요하지.”
섭혼마존은 이 상황에서도 딱 잡아뗐다.
“아직도 심혼대법 타령을 할 거면 물러가게. 나는 그딴 대법 모르니까.”
“그럼 이 아이는 누구지?”
“불쌍한 고아네. 내가 데려가다 무공을 가르치려고 데려왔지.”
“당신은 겁쟁이야.”
“뭐?”
이번에는 내가 그를 흉내 냈다.
“겁쟁이, 겁쟁이, 겁쟁이…….”
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만!”
그의 외침에 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대체 언제까지 모른 척 할 거야? 당신 용기는 약자의 몸에서 심장을 꺼낼 때만 생기는 건가?”
섭혼마존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점처럼 작아졌다.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면서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
나는 절벽 끝에 서 있었다.
휘이이이잉.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려 했다.
“내 경고를 그새 잊었나? 날 다시 보게 되면 영원히 원래 세상으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한다고 했을 텐데.”
그의 목소리가 귀곡성처럼 스산하게 들려왔다.
섭혼마존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상대를 겁주지 않으면 겁나서 견딜 수 없나 보군.”
“정말 놀랍군. 아무리 교주 아들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 나이에 이런 기백을 보이지?”
그의 눈동자는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며 나를 탐색하기 바빴다.
“날 죽이러 온 거지?”
“그래.”
“대체 뭘 믿고?”
뭘 믿고란 말이 메아리치듯 반복되었다. 지금의 메아리는 나를 조롱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동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다 메아리가 뚝 끊어지면서 그가 물었다.
“교주가 보냈나?”
이번만큼은 그 어떤 다른 잡음도 들어가지 않은 물음이었다. 내가 독자적으로 이런 행동을 할 것으로 생각하긴 어려울 테니까.
“당신을 죽이려 했다면 아버지가 직접 오셨겠지. 아버지 성격 몰라?”
섭혼마존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그의 중얼거림과 바람 소리, 온갖 괴이한 소리가 뒤섞였다. 그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정신 사나우니까 조용히 이야기하자.”
“이 공자 유언인데, 들어줘야지.”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그와 난 경치 좋은 정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사이에 놓인 다탁에는 미지근한 차까지 올려져 있었다.
“이공자.”
원래 그의 목소리, 그가 평범한 남자로 돌아왔다.
“피차 서로를 죽여야 한다면 마지막으로 우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세.”
“그러지.”
“우린 마인이라네. 그것도 모든 마인들 위에 군림하는 마존이지. 약자들에게 선택권을 줄 만큼 우리의 인생이 호락호락한 삶인가? 저 약해빠진 것들의 심장을 빨아먹어서 더 강해지는 것이 뭐가 어때서? 탐욕은 우리의 권리 아닌가? 내 모든 선택은 천마신교를 위한 것이었다!”
화무기가 오지 않았고 내가 본교에서 계속 살았다면 어쩌면 난 이런 섭혼마존을 못 본 척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본교가 강해질 수만 있다면, 이 명분을 핑계 삼아 애써 모른 척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운명은 달라졌다. 그때의 나와 지금은 나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아이의 심장을 꺼내서 강해지려는 자와는 같은 자리에서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실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같은 공기를 마시며 숨을 쉴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거짓말이다.”
“뭐?”
“당신이 심장을 탈취한 것은 본교를 위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당신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가 진짜 본교를 위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복수의 움직임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팔마존 중 가장 오래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의 질기고 긴 수명에는 수천 명의 무고한 생명이 녹아들어 있다.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만을 위하다가…… 당신은 괴물이 돼버렸어.”
나를 빤히 쳐다보던 섭혼마존은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고작 스물 남짓한 애송이가 날 이렇게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 흑영비술을 피해 날 따라 들어올 수도 없고, 내 몸에 손을 댈 수도 없지. 넌…… 이공자가 아니다.”
지금껏 커졌다 작아졌다만 반복했던 섭혼마존의 눈동자가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서 눈부시게 휘황찬란한 자색(紫色)의 물결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자색의 안광이 내 눈으로 뿜어지며 그 너머에 있을 영혼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물었다. 그의 질문은 심연에서의 울림처럼 깊고 무겁게 다가왔다.
“너는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