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63)
절대회귀-63화(63/424)
제63회 줄 것 잘 주고 와서는.
풍천교주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처음 찾아온 것처럼 마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시겠습니까?”
“아닐세. 내 쪽으로 가세.”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만들어진 공간은 황량한 황무지였다. 내 눈에는 이 공간을 나갈 수 있는 파훼법이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바위에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었으니까.
“황량하지? 여기가 내 고향이라네.”
“조용해서 좋습니다. 언제고 한 번 초대해 주십시오.”
“그러지.”
잠시 주위 경치를 바라보던 풍천교주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돌아가서 생각해봤는데, 자네 말이 맞네. 나는 아직 자네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더군.”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서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 권의 비급이었다.
시공이환술(時空移換術).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무공일세. 이 무림에서는 오직 혈교의 정통 마공을 익힌 사람들만이 펼칠 수 있는 무공이지.”
“!”
“섭혼마존이 죽었으니 이 마공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겠군.”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 나왔다.
섭혼술이나 사술은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 이 무공만큼은 아주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위급한 상황에서 이 공간이 그대의 목숨을 구해줄 거야. 이 공간에 들어선 순간만큼은 자넨 원래 세상에서 사라진 상태니까.”
그의 말처럼 시공이환술은 여러 용도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혼자만의 공간이 될 수도 있고 결정적인 순간, 위기를 벗어나는 회피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되면 또 하나의 천마호신공을 배우는 셈이다.
회귀대법의 첫 재료인 음뢰종을 구하는 순간부터 혈안정수에 이어, 이 시공이환술까지. 나는 운명적으로 풍천교주와 깊은 인연으로 이어져 있음을 느꼈다.
“어떤가? 이 정도면 호의로 충분하겠나?”
“넘칠 정도지요.”
나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풍천교주는 비급을 건네지 않았다.
“대가를 바라면 그건 호의가 아니지요?”
내가 아쉬움을 표하자 그가 대답했다.
“먼저 내 패를 깐 것이 호의 아니겠나?”
이것저것 저울질하지 않고, 이 훌륭한 무공을 제시한 것부터 호의란 뜻이었다.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그러자 풍천교주의 시선이 다시 황량한 대지로 향했다. 바람이 모래를 일으키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며 풍천교주가 말했다.
“더는 이 먼지를 마시고 싶지 않네.”
그 말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과연 그의 바람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중원진출이었다.
“그 첫걸음을 도와준다면, 시공이환술은 자네 것이네.”
순간 설렜지만 나는 내밀었던 손을 과감하게 접었다. 욕심을 들키는 순간, 어떤 교섭도 불리해지는 법이니까.
“아쉽지만 그건 제가 결정할 내용이 아닙니다.”
“알고 있네. 교주께서 결정할 일이겠지.”
“아버지뿐만 아니라 마존들까지 나설 사안입니다.”
풍천교 일이라면 반드시 마존들이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네. 그래서 자네에게 이 비급을 주려는 거지.”
“구체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이틀 후, 교주님과의 면담이 잡혀 있네. 그날 본교의 중원진출에 대해 담판을 지을 작정이야. 그때 자네가 함께 나서서 교주님을 설득해 주게. 그렇게 해준다고 약속하면 이 비급을 주겠네.”
결과에 상관없이 비급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조건이 아니라 선물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나는 덥석 받지 않고 숙고하는 모습을 보였다.
“방법이 틀렸습니다.”
“무슨 말인가?”
“교주님과 제가 아무리 설득해도 아버지는 절대 풍천교의 중원진출을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풍천교의 중원진출.
지금껏 절대 불허였던 본교 정책과는 달리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풍천교를 쳐서 없애버릴 것이 아니면, 굳이 등 뒤에 언제라도 적이 될 수 있는 존재를 둘 필요는 없었으니까. 친구보다 적을 더 가까이 두란 옛사람의 조언처럼, 풍천교를 가까이 두고 관리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풍천교주가 들고 있던 비급을 내게 내밀었다.
“이거면 해답을 들을 수 있겠나?”
“충분합니다.”
나는 비급을 받아들었다.
풍천교주가 보통 담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어떤 내용인지 듣고 고맙다고 내미는 것과 미리 내미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었으니까.
‘이 사람, 내게 환심을 사려고 작정하고 왔구나.’
그는 내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에 비급에 관해 설명했다. 어차피 내게 줄 비급이라면 최대한 기분 좋게 준다, 그는 거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다.
“물론 오랫동안 수련한 내가 펼쳤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이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지, 처음에는 주문을 온종일 외워도 만들 수 없을 거야. 무공에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라도 빨라도 며칠, 길면 열흘 이상 걸릴 걸세. 오감이 둔한 자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하고, 평생 단 한 번도 만들어내지 못하기도 하네.”
“교주님은 처음 만들 때 얼마나 걸렸습니까?”
“사흘 걸렸네.”
사흘이면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는 의미.
“첫 시도 때 걸린 시간이 중요하다네. 그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이후 비약적으로 시간이 줄어들게 될 거네. 다른 무공과는 달리 이 시공이환술만큼은 전적으로 무공을 펼치는 자의 무학에 대한 재능과 이해도에 모든 것이 달려 있지.”
과연 나는 얼마나 걸릴까? 천무지체의 신체에 지금의 무학 수준이라면?
“이 공간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습니까?”
“내공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성을 이룬 상태에서 무리하면 반 시진 정도? 지금 자네와 대화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의 내공은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네.”
“이 공간을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까?”
영구적이란 말에 풍천교주가 피식 웃었다. 그 헛웃음에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의미가 담겼다.
“이곳에서 내공을 회복하는 양이 유지하는 양보다 많다면 영구적으로 공간을 열어둘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시공이환술을 익힌 사람들의 꿈이지. 혈교의 전대 교주 중에서도 아직 아무도 성공한 사람이 없다네.”
“가능하긴 하다는 뜻이군요.”
“엄청난 내공을 지닌데다 하늘이 내린 무공 천재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그 하늘이 내린 무공천재, 천무지체가 바로 나요.
나는 처음 만들어내는 데 얼마나 걸릴까? 과연 언젠가 이 공간을 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
“제가 이 비급만 챙기고 제대로 된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면요?”
“그럼 자넨 역대 교주 중 본교나 팔마존과의 관계가 가장 좋지 않은 교주가 되겠지. 아, 교주가 못 되겠지.”
풍천교주가 비급을 내게 주었다.
“익히고 나서는 없애버리게.”
아쉬움을 애써 숨기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 아까워하고 있었다.
“그러겠습니다. 대신 구결을 한 번만 해석해주시지요.”
“해석을 해달라고?”
“이 비급 원본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
“옮겨 적으시다가 한 글자라도 틀렸다면, 문제가 생기겠지요.”
“설마 날 의심하는 건가? 그럴 일은 없네!”
“교주님께서 해석해주시면 진의를 파악할 수 있겠지요.”
순간 풍천교주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흔쾌히 내 부탁을 받아들였다.
“좋아. 구결을 해석해 줄 테니 잘 듣게. 워낙 어려운 무공이니 집중해서 잘 들어야 할 걸세.”
그의 태도에서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사람, 내가 이 무공을 제대로 익힐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구나.’
그만큼 무공이 어렵긴 했다.
하지만 난 풍천교주의 구결 해설을 들으면서 시공이환술의 묘리를 정확히 깨달았다. 한 차례의 해설로 내가 얼마나 깊이 이 시공이환술을 이해했는지 그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시공이환술을 전수받았다. 우리가 일시적 동맹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해답을 알려주게.”
“풍천교가 중원진출을 하려면…….”
나는 그를 쳐다보며 차분하게 덧붙였다.
“서환진의 후계싸움에 개입하십시오.”
* * *
“내 것 빼앗기고 오니 더럽게 피곤하군.”
거처로 들어온 풍천교주는 자리에 축 늘어졌다.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주기 싫은 것을 주면서 풍천교주로서의 고상함을 지켜내야 했으니까.
족쇄 사내는 그가 들어왔음에도 인사도 없이 혼자 멍하니 음뢰종을 쳐다보고 있었다.
풍천교주가 힐끗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자네가 시킨 대로 이공자에게 시공이환술을 전수해주었네. 이게 잘한 짓인지 모르겠군.”
족쇄 사내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잘하셨습니다.”
정중한 말에 풍천교주가 흠칫했다. 보통 욕부터 시작하는데, 이렇게 정중하게 시작한 날은 그가 기분이 안 좋은 날이다.
‘조심해야겠군.’
이런 날은 꼭 마지막에 욕설이 한꺼번에 터지곤 했다. 자신도 사람인지라 쏟아지는 욕을 듣다 보면 일장에 그를 쳐 죽이고 싶을 때가 있다.
절대 그런 일은 벌어져선 안 된다. 족쇄 사내 없는 자신은 상상할 수 없다. 머리 쓰는 역할도 역할이지만, 매일 붙어 있던 말 상대가 사라지면 그 공허함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무슨 제안을 했는지 알고 하는 말인가?”
당연히 모르겠거니 생각했는데, 족쇄 사내의 입에서 검무극이 했던 말이 재현되었다.
“서환진 후계 싸움에 개입하라고 했겠지요.”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말하자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나?”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의 방법이니까요.”
“알고 있었어? 뭐야, 알고 있었네. 이런 젠장! 자네가 그 방법을 아는데 아깝게 왜 이공자에게 시공이환술을 줘?”
풍천교주는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죽은 섭혼마존의 제자들이 사부의 진전을 모두 이어받았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교주님의 도움이 꼭 필요할 겁니다. 교주님을 믿고 기꺼이 무공을 배우겠다는 사람을 후계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차기 섭혼마존의 사부가 될 수 있다면, 중원진출의 첫걸음을 뗐다고 볼 수 있겠지요.
듣고 나서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아,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감탄했었다.
한데 족쇄 사내도 알고 있던 내용이라면?
“아까운 비급을 왜 주냐고!”
검무극 앞에서야 대범한 척 굴었지만 아까워서 죽는 줄 알았다.
“말해! 어서 말해보라고!”
족쇄 사내 옆에 가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족쇄 사내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뭐?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나 교주야, 교주라고. 너 오늘 죽어볼래?”
큰소리를 치면서도 풍천교주는 내심 마음의 준비를 했다. 욕이 터져 나올 순간이다.
하지만 족쇄 사내는 차분했다.
“우린 그 방법을 산 게 아닙니다. 이공자 역시 그 방법을 판 것이 아니고요.”
“뭐?”
“교주님이 산 건 기횝니다.”
“어떤 기회?”
“이공자를 교주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죠. 확고한 동맹이 되기 위해서 앞으로 몇 번을 더 사야 할지 모르겠지만요.”
“정말 자넨 이공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 확신하는가? 정말 차기 천마가 될 거라 확신하냐고!”
“모르죠.”
“뭐?”
“앞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 무슨 무책임한 말인가?”
“줄 것 잘 주고 와서 무슨 후회십니까?”
“아까우니까! 아까우니까 그러지!”
족쇄 사내에게는 교주로서의 체면을 벗어던지고 이렇게 속마음까지 다 털어놓는다. 그를 죽이고 싶었을 때도 많지만, 그만큼 속마음을 많이 털어놓았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나?”
“이공자와 친해지십시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자네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이공자가 어떤 흑심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데…….”
“이제 그만!”
결국 풍천교주의 걱정대로 족쇄 사내가 폭발했고 욕설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이 한심한 새끼야! 선물까지 줘가며 기세 좋은 사람과 손을 잡았으면 그 기세에 올라탈 생각을 해야지, 왜 의심하고 지랄이야? 이렇게 머저리처럼 딴생각을 품으니 뒈지는 거다. 무림에서 개죽음당하는 것들 공통점이 뭔지 알아? 머리 쓰랄 땐 안 쓰고, 안 써야 할 땐 쓰고! 믿어야 할 땐 죽으라 안 믿다가, 의심해야 할 땐 뜬금없이 쳐 믿고. 그래서 뒈지는 거다. 손가락 안 접어? 확 잘라버리기 전에! 오늘은 세지 마! 질문도 끝! 진짜 나 죽일 것 아니면 그 입 열지 마!”
입을 삐죽 내민 풍천교주가 손가락을 다 접자 새로운 공간이 열렸다.
눈 앞에 펼쳐진 푸른 들판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족쇄 사내가 정중히 말했다.
“교주님, 뭐가 궁금하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