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64)
절대회귀-64화(64/424)
제64회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풍천교주가 돌아가고 나는 처음으로 시공이환술을 펼쳐보았다. 내가 얼마나 빨리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 무공을 수십 년간 연마할 생각은 없으니, 처음 만들어지는 공간이 최대한 빨리 만들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다행히 풍천교주의 구결 해설을 들으며 시공이환술에 담긴 오의(奧義)를 꿰뚫어 파악했기에,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무공을 연마한 사람처럼 능숙하게 진기를 운용하며 구결을 펼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맑고 경쾌한 소리가 귓가에 울리면서 나는 새로운 공간에 서 있었다.
성공이었다!
걸린 시간은 딱 두 시진. 재능이 뛰어난 사람도 며칠은 걸린다고 했으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른 시간에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낸 것이다.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아버지도 이렇게 빨리 공간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두 시진.
이 시간을 줄이고 줄여 섭혼마존이나 풍천교주처럼 자유자재로 이 무공을 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새로운 무공의 배움은 언제나 큰 설렘을 선사하지만, 시공이환술이 주는 두근거림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공간을 살폈다. 처음 만들어진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섭혼마존이 절벽을 만들고, 풍천교주가 황무지를 만들었듯 나 역시 나중에는 내가 원하는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았다.
세상과 단절된 채 오롯이 나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어서였을까? 놀랍게도 나는 이 텅 빈 곳에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안락함을 느꼈다.
내가 짊어지고 있던 책임감과 노력과 후계 싸움과 화무기와 인간관계와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에서 떨어져, 아무 생각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 그래서 좋았다. 나만의 공간이 생겼기에.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자유를 오래 즐길 수는 없었다. 처음이라 그런지 내공 소모가 엄청났다.
나중에 무공수준이 올라가면 갈수록 들어가는 내공이 줄어들겠지만, 지금 수준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내공이 빠져나갔다.
공간을 없애는 것은 쉬웠다. 구결을 외우자 곧장 앞서 들렸던 경쾌한 소리가 나면서 천천히 공간이 사라졌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 나는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 짧은 자유를 위해서는 심법으로 내공을 채워야 하고, 두 시진이란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내공을 채우고 다시 시공이환술을 펼쳤다. 이번에도 거의 두 시진이 걸렸는데, 체감상 아까보다는 아주 조금 빨라진 것 같았다. 그래, 자꾸 줄어들어라. 그래서 나도 순식간에 이 공간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렇게 시공이환술을 펼쳐서 공간을 만들고 다시 없애고, 다시 만들어서 없애고.
날이 새도록 나는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에 푹 빠져들었다. 아주 미세하게나마 만드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무공이 있다니! 이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 * *
검무극이 시공이환술에 푹 빠져 있을 그 시각, 풍천교주와 마불은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마불이 늦은 밤, 기별도 없이 풍천교주의 거처로 찾아온 것이다.
다탁에 마주하려던 마불은 종종걸음으로 족쇄 사내 앞에 가서 섰다. 마불의 키가 작았기에 거의 앉아 있는 남자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족쇄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마불이 허리를 굽혀 족쇄 사내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카락 때문에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마불은 조막만 한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릴까 말까 고민했다.
풍천교주는 그 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불이 족쇄 사내를 구경거리 취급하는 것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내 수하를 무시하지 말란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랬다간 저 마불은 애초에 족쇄로 묶어 인간 취급 안 한 사람이 누군데로 시작해서 어쩌고저쩌고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때 마불이 돌아서며 불쑥 물었다.
“이공자를 만났다고 들었소.”
사람의 마음을 떠보는 누런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풍천교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언젠가 교주가 될 수도 있으니, 만나봐야지요.”
“교주는 대공자가 될 거요.”
이렇게 단호하게 대답하지 않더라도 풍천교주는 알고 있었다. 마불이 대공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공자에게 혈천도마가 있다면, 대공자에게는 마불이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꼭 그렇지만도 않더이다.”
“무슨 말이오?”
“이공자가 황천각주 자리까지 오르지 않았소? 누가 봐도 천마가 후계자 교육을 하는 것 같은데?”
“허허, 이 사람. 새외에만 있더니 통찰력이 떨어지셨구려.”
마불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한 후에 제 할 말을 이었다.
“나는 반대로 봤소. 후계자는 대공자로 삼을 거니, 이공자에게 다른 자리를 넘겨준 거요. 너는 그것으로 만족해라.”
“그럴 수도 있겠구려. 오랜만의 중원행인데 대공자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니 아쉽소이다.”
풍천교주는 결코 자신의 속내를 마불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대는 왜 대공자를 지지하는 거요?”
“대공자가 후계자가 될 테니까요. 당연한 질문을 하고 그러시오?”
“확신하는 이유는 뭐요?”
“그냥 내 예감이오.”
풍천교주는 알고 있었다. 마불이 단지 예감만으로 이런 중대한 일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에게 대공자와 관련한 일들을 말해주고 싶지 않은 거다.
‘이러니 어찌 우리가 친구라 할 수 있겠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공자와 관련해서는 절대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테니까.
“이보시오, 교주.”
“왜 그러시오?”
“쓸데없는 짓 할 생각 마시오. 이쪽에도 그대를 보는 눈이 여럿 있다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거요?”
“볼일이 끝났으니 꺼지란 말이시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내용은 날이 서 있었지만 두 사람의 어조는 부드럽고 담담했다.
“그럼 그냥 두시오. 간만의 중원행을 즐기고 있으니까. 왜? 방값이라도 받아야겠소?”
“남의 집에 왔으면 조용히 있다 가셔야지, 안방에 똥을 싸서 되겠소?”
“허허. 어느 놈의 개가 싼 똥을 내 똥으로 오해받는구려.”
“친구로서 해주는 충고요.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고 그만 풍천교로 돌아가시오.”
솔직히 풍천교주는 내심 당황했다. 마불이 와서 돌아가란 말을 이렇게 대놓고 할 줄은 몰랐다. 속마음을 떠나 겉으로는 그래도 서로 친한 척 예를 갖췄던 사이였는데.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존재요?”
여전히 담담한 어조였지만, 말에 담긴 내용은 시퍼런 칼날 그 자체였다.
“그럼 아니었소?”
풍천교주의 표정이 굳어지며 주위 공기가 일순간에 차가워졌다.
그러자 마불이 활짝 웃었다.
“농담이오, 농담. 이 사람, 장난 좀 쳤다고 정색하기는. 정말 새외에만 있다 보니 감이 많이 떨어지셨소. 실컷 놀다 가시오. 평생 나와 여기서 놉시다. 하하하.”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풍천교주도 함께 웃었다.
“그런가 보오. 삭막한 모래바람을 너무 쐬니, 사람마저 삭막해졌나 보오. 새외는 그런 곳이라오.”
“내가 분위기 좋은 곳에서 술 한 잔 사겠소. 우리 교주의 삭막함을 눈 녹듯 녹여주는 미녀들이 있는 곳에서 말이오.”
“중이 그런 곳 다녀서 되겠소? 당신네 부처가 야단치지 않소?”
“내가 모시는 부처께선 때론 색불(色佛)로 현신하시곤 한답니다.”
“좋구려.”
두 사람이 마주보며 웃었다.
“자, 그럼 일간 자리 한번 가집시다!”
“좋소이다.”
마불이 호탕하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
마불이 떠나자 풍천교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며 족쇄 사내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초조해하고 있군요. 교주님이 이공자와 손을 잡으려는 것을 눈치챈 모양입니다.”
“그게 이렇게 초조할 일인가?”
“그만큼 이공자를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잘 보고 있는 겁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스스로 생각하십시오. 자꾸 묻는 버릇 들이지 마시고.”
“지금은 나와 본교의 생사가 달린 일이야. 그러니 비싸게 굴지 말게.”
남자가 그를 향해 돌아앉으며 족쇄를 흔들었다.
풍천교주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
푸른 들판을 바라보며 남자는 날아갈 듯 환한 표정을 지었다.
목에 걸린 열쇠로 만년한철 족쇄를 풀어주며 풍천교주가 물었다.
“자넨 왜 이리 이곳을 좋아하나?”
찰나의 순간 남자의 눈에 어떤 애틋함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감정은 워낙 빠르게 사라졌고, 족쇄를 푼다고 허리를 숙이고 있던 풍천교주는 보지 못했다.
“교주도 종일 족쇄에 묶여있어 보시오. 딱 하루만 역할을 바꿔봅시다.”
“사양하겠네.”
풍천교주는 잠시 사내가 자유를 만끽할 시간을 주었다.
오늘따라 사내의 감정은 차분했다. 그래서였을까? 사내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곧장 필요한 조언을 했다.
“마불은 어떻게 해서든 교주님을 돌아가게 만들 겁니다. 아마 자기네 교주를 이용하겠죠.”
하지만 풍천교주는 순순히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해서든 중원진출의 교두보를 세울 작정이었다.
“어떻게 하지?”
“이공자를 찾아가서 이곳에 남을 방법을 물어보십시오. 그는 분명 방법을 알려줄 겁니다.”
“혹 자네도 알고 있는 방법 아닌가?”
“설령 제가 알고 있더라도 이공자에게 선물을 주고 들어야 합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네. 왜 이렇게 이공자에게 매달려야 하는지.”
“그럼 누구에게 매달릴 겁니까?”
순간 풍천교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마는 자신을 싫어하고, 대공자는 마불을 비롯한 마존들이 지지하고 있었다.
혈천도마만이 정식으로 이공자와 손을 잡았을 뿐, 나머지 마존들은 중립이거나 대공자가 후계자가 될 거라 믿고 있는 형세. 그야말로 어디 한 곳, 발 디딜 곳 없는 신세였다.
“매달리기 싫으시면 새외에 틀어박혀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면 됩니다. 그럼 평생 호의호식하면서 잘 살 수 있을 겁니다.”
차라리 욕을 하면서 말했으면 덜 화가 났을 텐데, 정중히 말하니까 풍천교주는 더 화가 났다.
“그딴 말로 내 자존심을 자극하지 말게!”
하지만 남자는 풍천교주의 기분은 배려하지 않았다.
“이 싸움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잘 선택해서 끝까지 믿는다. 간단하죠?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패배자들은 끝까지 모르죠. 승리는 이 단순한 원칙들을 지키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었다는 걸요.”
“잔소리는 그만! 훈계도 그만!”
“이 원칙을 못 지킬 것 같으면 마불 말처럼 우린 돌아가는 게 맞습니다.”
닥치라며 버럭 화를 내려던 풍천교주가 마음을 진정시켰다.
마불보다도 몇 배는 더 열받게 했지만, 듣고 보면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풍천교주는 화를 내는 대신 속마음을 드러냈다.
“이공자에게 뭘 자꾸 주고 싶지 않다. 솔직히 아깝다. 아까워도 너무 아깝다. 앞서 준 시공이환술도 계속 후회하고 있다. 어제는 한숨도 못 잤다. 괜히 줬다는 생각 때문에.”
새외무림의 지존인 자신이 이런 성격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핀잔을 듣고 산다는 것도.
“속이 좁고 욕심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풍천교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면서도 동시에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감추고 살아왔는데, 한 사람만큼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데서 느끼는 동질감 같은 거였다.
“그래도 아까운 걸 어떻게 하나? 그런데 또 주라고?”
“선택했으면 믿는 겁니다. 주십시오. 다 주십시오.”
“아깝다고! 하나도 주기 싫다고!”
보통의 경우라면 족쇄 사내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을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 남자는 끝까지 차분했다.
“그냥 돌아가서 신물에 앉은 먼지나 닦고 종이나 치면서 삽시다. 교주 그릇에는 그게 딱 맞습니다.”
풍천교주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빠져나올 거라고. 이 간장 종지 같은 소갈딱지를 부수고 빠져나오려고 이러는 거라고! 난 반드시 풍천교 본단을 중원에 세울 거다. 선대들이 못 이룬 것을 내 손으로 이룰 거다.”
차라리 욕을 해줬으면 좋겠지만 족쇄 사내는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아마 안 될 겁니다.”
이후로 풍천교주는 한참을 생각에 잠긴 채 침묵했다. 화가 끔찍하게 많이 난 날이었는데, 오히려 가상의 공간은 그의 내공이 바닥날 때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