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71)
절대회귀-71화(71/424)
제71회 모두와 작당 중.
혈천도마가 나를 찾아왔다.
항상 내 거처 근처에 큰 칼을 꽂고 기다리던 그였는데, 요즘은 내가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온다. 집에 있으면 집으로 찾아왔고, 오늘처럼 집무실에 있으면 집무실로 찾아왔다.
내가 어른이니 네가 찾아와야지. 혈천도마에게 그런 권위주의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는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그런 사람이다.
“서환진의 삼제자가 풍천교주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 들었나?”
“네, 들었습니다.”
“자네가 꾸민 짓이지?”
“어찌 새로운 일만 터지면 제가 한 일이라 여깁니까?”
“그래서, 아니야?”
“맞긴 합니다.”
혈천도마는 그럼 그렇지 하면서 목청을 높였다.
“대체 풍천교주와 작당해서 무슨 모의를 꾸미는 거냐?”
“거창하게 무슨 모의입니까? 그냥 그 사람 도와주는 겁니다.”
“정말 풍천교가 중원진출을 하게 하려고?”
“안 됩니까?”
혈천도마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혹시 풍천교를 말씀하시는 거면 제겐 어르신이 계시지 않습니까? 마존과는 안 싸우신다면, 풍천교주라도 상대해 주십시오.”
“그 사람, 우습게 보면 안 돼. 끌려오다시피 본교에 와 있지만, 그는 새외 무림을 이끄는 사람이다. 새외 무림이 발광하면 중원은 피바다가 된다.”
혈천도마는 진지했고, 나는 그의 충고를 진심으로 받았다.
“명심하겠습니다.”
풍천교주가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족쇄 사내가 떠올랐다. 그는 이 대단한 풍천교주를 조종하고 이끄는 사람이다.
“한데 왜 청선이냐?”
“그녀를 움직이기가 쉬웠습니다.”
“청선이 앞으로 마존이 될 수 있겠느냐?”
“제가 볼 땐 일제자나 삼제자나 오십보백보입니다. 두 사람 누구라도 제대로 된 마존의 모습을 갖추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 점만은 공감한다는 듯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어르신도 서 조사관 잘 키워두십시오.”
“꿈 깨라고 해라.”
“꿈은 제가 꾸고 있죠. 서 조사관은 그런 꿈 안 꿉니다.”
“남 일 간섭은 그만하고 자네 일이나 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혈천도마가 내 팔목에 두른 극품천잠사를 보며 물었다.
“그건 뭔가?”
“멋으로 둘렀습니다.”
“풍천교주에게 받은 거지?”
혈천도마는 대번에 이것이 보통 물건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못 보던 물건이고, 자네는 대가 없이 풍천교주를 돕지는 않을 테니까.”
“일을 도와줄 때마다 보상을 바라면 너무 야박하잖습니까?”
“그래서? 안 받았나?”
“받았죠.”
“야박한 놈!”
나는 웃었고 혈천도마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극품천잠사입니다.”
“아! 이게 그것이구나.”
“역시 아시는군요.”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좀 잘라 드릴까요?”
내가 검 손잡이에 두른 극품천잠사를 당장에라도 풀려고 했다.
“됐다. 이 늙은 몸에 안 어울리는 물건이다.”
“늙은 몸이라서 두르셔야 하지 않습니까?”
“일 없다.”
그는 권위주의도 없고 물욕도 없다. 이럴 때면 정말 시화를 읽는 것을 즐기는 모습이 그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 말고 또 받은 것 있나?”
“혈신단도 받았습니다.”
나는 혈천도마에게 솔직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가능하면 그럴 작정이다. 이 솔직함이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 수 있는 열쇠가 될 거라 믿고 있으니까.
“혈신단?”
내가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했는지 혈천도마는 혈신단에 대해 인식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의 표정이 이런 순서로 바뀌었다. 혈신단이 뭐였더라? 혈신단? 어? 설마 그 혈신단? 이런 미친! 혈신단이라고?
깜짝 놀란 혈천도마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외제일영단?”
“네.”
“풍천교주가 그걸 내줬단 말이냐?”
어찌나 놀랐는지 혈천도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어디에 있느냐?”
“제 배 속에 있습니다.”
“맙소사! 이제 내공은 나를 넘어섰겠구나.”
나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실 혈신단을 복용하기 전에도 마정단과 천외신단으로 마존들과는 쌍벽을 이룰만한 내공이었다. 이제 혈신단까지 복용했으니, 내공으로는 그들을 압도할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그래도 여전히 왼쪽 날개는 어르신이십니다.”
“흥! 천외신단보다 효과가 좋은 영단에 극품천잠사까지 받았으니 왼쪽 날개 따윈 떼어버리겠군.”
“제 왼쪽 날개는 제 몸과 하나라서 교체할 수 없습니다. 떼어내면 제가 죽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몸이 죽으면 날개는 새 몸을 찾아 날아갈 거다.”
“더 좋은 몸을 만나기를 기원하죠.”
농담처럼 오간 말이었지만 어느새 혈천도마의 표정은 풀어져 있었다.
“혹 방금 질투하신 것은 아니죠?”
“질투는 무슨! 견제다. 이렇게 해둬야 신물 좀 줬다고 내 자리를 넘볼 수는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지.”
“확인됐습니다.”
“진짜 가네. 일 보게.”
혈천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려던 그가 불쑥 말했다.
“난…… 잠자리 날개라도 상관없네.”
날개를 여러 장 붙여도 좋다는 뜻.
그 말에 마음이 울컥했다. 이런 포용력을 지녔으니 어찌 내가 혈천도마를 소홀히 대할 수 있겠는가?
그가 나가려던 바로 그때였다. 수하가 들어와서 또 다른 누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일화검존께서 오셨습니다.”
검존이 왔다는 소리에 혈천도마는 깜짝 놀랐다.
“날 만나게 하려고 불렀느냐?”
“갑자기 찾아오신 분이 어찌 그런 말씀이십니까?”
당황한 혈천도마가 창문을 열었다. 그곳으로 나가려는 것을 내가 말렸다.
“너무 체통 없으십니다.”
“날 보면 싫어할 거다.”
여전히 일화검존과의 관계만큼은 어색하고 어려워하는 그였다.
“무슨 상관입니까? 언제 그렇게 남 신경 쓰셨다고요.”
잠깐 창가에 서서 고민하던 혈천도마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일화검존이 안으로 들어왔다.
집무실에 혈천도마가 있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그녀가 깜짝 놀랐다.
“자네? 일부러 이 자리를 만든 건 아니겠지?”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두 분이 어찌 이리 똑같으십니까? 제가 두 분이 언제 오실 줄 알고 자리를 만듭니까? 두 분 다 기별도 안 주고 오셨으면서요. 따지려면 저 위에 계신 분에게 따지시지요.”
그러면서 창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운명 아니겠습니까란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은 내 말뜻을 알아들었다.
일부러라도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은 두 사람인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나는 걸 보면, 정말 하늘이 그들의 화해를 주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 앉으시지요.”
일화검존이 혈천도마와 마주 앉았다.
“선배님께선 어쩐 일이십니까?”
“한 가지 알려줄 일이 있어서 왔네.”
그러자 혈천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 나누시게. 나는 가보겠네.”
“함께 들어도 될 이야기에요.”
혈천도마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한 그녀일 텐데, 이렇게 붙잡았다는 것은 우리 모두와 관련된 일이면서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과연 그녀가 밝힌 내용도 그러했다.
“마불이 나를 찾아와서 한 가지 부탁을 했네.”
“무슨 부탁을요?”
“섭혼마존의 두 제자 중 일제자 양도를 지지해 달라더군.”
새로운 마존을 뽑는 일은 전적으로 팔마존 소관이었다.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마존이 죽게 되면, 나머지 마존들이 추천을 해서 차기 마존을 정하게 된다. 결국 마존들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만 마존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의미.
“전에 자네가 그랬지? 비무친구로서 우리 쪽 사람을 지지하면 좋겠다고.”
“기억하고 계셨네요.”
반면 혈천도마는 무슨 말인가 궁금해했다.
“비무친구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자넨 나 빼고 모두와 작당 중이구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르신이 제 첫 번째 날개신데요.”
이번에는 일화검존이 물었다.
“날개라니?”
“어르신이 제 왼쪽 날개이십니다. 그리고 지금 오른쪽 날개를 간절히 찾는 중이지요.”
나는 의도적으로 일화검존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른쪽 날개가 되어달라는 내 바람을 읽은 일화검존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자네는 누굴 지지하는 건가?”
“청선입니다.”
“왠지 그럴 것 같았네. 마불과는 뜻이 다를 것 같았지. 좋아, 나도 청선을 지지하지.”
마불과의 사이를 차치하고서라도 다른 마존의 부탁을 거스르는 일은 꽤 부담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흔쾌히 나를 지지하려 한다.
또한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그것은 혈천도마와 함께 듣자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번 일은 두 사람 모두의 도움이 필요한 사안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지난번 사우종과 관련해서 도와준 일도 그렇고.
좋습니다, 선배. 우리 평생 비무친구 합시다.
심지어 그녀는 왜 청선인지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그만큼 나를 믿는다는 의미다.
그때 혈천도마가 내게 물었다.
“한데 그래봤자 우리 두 표 아닌가? 다른 마존의 표는 구했나?”
청선을 마존 자리에 앉히려면 일곱 마존 중 네 표가 필요했다.
“아직입니다.”
“어떻게 하려고?”
나는 두 사람에게 정중히 말했다.
“두 분께서 각각 한 사람만 설득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청선이 마존이 되면 우린 뭐가 좋지?”
혈천도마의 물음에 나는 넉살 좋게 대답했다.
“두 분보다야 제가 좋지요.”
“내가 좋아야지!”
“제가 좋은 것이 곧 어르신이 좋은 거죠.”
물론 혈천도마는 부탁을 들어줄 거면서 괜히 너스레를 떠는 중이었다.
반면 일화검존은 흔쾌히 내 부탁을 받아주었다.
“자넬 위해 다른 마존들을 설득해 보겠네. 잘 되면 한 사람 정도는 청선을 위해 표를 던질 거네.”
문득 그녀의 이런 호의가 단지 비무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큰 호의를 베풀고 있었으니까.
그녀를 보며 혈천도마가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가 그러니 내가 없어 보이잖아?”
딴에는 그녀와의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던진 말이었는데, 일화검존은 정색하며 맞받아쳤다.
“원래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 아닌가요?”
순간 혈천도마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좋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식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그들은 눈빛으로 싸웠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말리지 않고 충분히 감정을 소모할 시간을 주었다.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 어차피 서로를 죽일 일은 없으니까.
먼저 고개를 돌린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눈싸움의 승자인 일화검존이 코웃음을 쳤다. 다행히 갈등이 해소되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난 일화검존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마불 일을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존들을 설득해 주시려는 것은 더욱 감사하고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선배님.”
“은혜는 무슨. 다음에 보세.”
일화검존이 미소로 답하며 먼저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가 떠나고 곧이어 혈천도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가겠네.”
풍천교주에게 신물을 받은 것도 그렇고, 일화검존과 비무친구니 하는 것도 그렇고. 괜스레 신경이 쓰일 법도 했는데 혈천도마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제겐 언제나 어르신이 최우선입니다.”
“말만 번드르르하지.”
내가 멋쩍게 웃자, 혈천도마도 피식 웃었다.
“검존이 저리 자신 있게 갔어도 다른 마존을 설득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거야. 마불 쪽에서도 부지런히 움직일 테니.”
“어르신께서도 도와주십시오.”
“마존들 사이에서 따돌림받고 있는데 되겠나?”
말은 그러했지만, 누구보다 든든한 뒷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각기 한 명씩만 설득하면 이쪽이 네 표를 만들 수 있다. 과연 어떻게 될지 결과는 나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냥 두 사람을 믿기로 했다. 도마도 검존도 모두 수십 년을 마존으로 살아온 이들이니까. 그들이 살아온 인생을 믿는다.
어쨌든 두 사람이 날 위해 쉽지 않은 일을 해주는데, 이 과실을 풍천교주에게 그냥 퍼줄 수는 없는 일.
나는 풍천교주의 거처로 향했다. 다만 이번 목적은 신물이 아니었다. 신물보다 더 귀한 것을 얻기 위한 첫 포석을 깔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