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72)
절대회귀-72화(72/424)
제72회 너흰 뒷물결이라서 좋겠다.
풍천교주가 신물이 놓여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보고 또 보고, 눈을 감았다가 떠도 혈신단과 극품천잠사가 있던 자리는 비어있었다.
“보기 싫다. 완벽한 미녀였는데 앞니 두 개가 빠진 꼴이다.”
풍천교주의 탄식에 족쇄 사내는 음뢰종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송곳니도 있고 어금니도 있습니다. 상대를 물어뜯을 수도 있고, 어금니 꽉 깨물고 각오를 다질 수도 있지요.”
“신물이 사라질 때마다 자넨 신나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족쇄를 풀어주면 춤이라도 출 겁니다.”
풍천교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솔직히 두렵네.”
“뭐가 두렵습니까?”
“이 모든 게 허망한 꿈이 되고 말까 봐. 깨고 났는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까 봐. 그때는 이런 후회를 하겠지? 대체 뭐에 홀려서 그렇게 다 바쳤을까?”
풍천교주가 족쇄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족쇄 사내가 고개를 들고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려서 오랜만에 자기 얼굴을 보여주었다.
“갑자기 왜 그러나?”
“이놈에게 홀려서 다 바쳤다고 보여주는 겁니다.”
“미친놈.”
사내의 말이 맞다. 지금 자신은 이공자에게 홀린 것이 아니다. 바로 저 족쇄 사내에게 홀린 것이다. 당당히 자신을 홀렸다고 말하면서, 파멸시키겠다고 웃으며 말하는 저 남자에게.
“어떻게 해야 청선을 마존으로 만들지?”
“마존들을 각개격파 해서 끌어들여야죠. 회유하고 설득하고, 포섭하고. 최소 신물이 두 개 이상은 들어갈 겁니다. 운이 나쁘면 한 개가 더 필요할 수도 있고요.”
이미 족쇄 사내는 계산이 끝난 모양이었지만 풍천교주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졌다.
“이공자에게 투자하란 말을 그렇게 돌려 말하는 거지? 자넨 끝까지 이공자니까.”
“언제까지 이공자에게 기댈 겁니까? 남자답게 직접 움직이고 처리하세요. 마존들을 어떻게 공략하는 것이 유리한지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비꼬지 말라니까!”
“맞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십시오.”
“그게 군사가 할 말인가?”
풍천교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철그렁, 쇠사슬 소리가 났다.
세상에 어느 군사가 이런 족쇄를 차고 있느냐는 무언의 항의에 풍천교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절 군사라고 생각하시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냥 있으세요. 때론 가만히 있을 때 최고의 성과를 얻기도 합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풍천교주가 물었다.
“정말 그래도 돼?”
“이공자가 찾아올 겁니다.”
“그리고는?”
“청선을 마존의 자리에 앉히는 것을 두고 신물을 요구하겠지요.”
“아무리 이공자라도 가능할까?”
“믿어야죠. 우린 이미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때 마당에서 수련 중이던 청선이 소식을 알려왔다.
“이공자가 방문하셨습니다.”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고 동시에 감탄했다. 족쇄 사내의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양반은 못 될 놈이군.”
“우리가 항상 이공자 생각에 이공자 이야기만 해서 그렇습니다.”
“그만 이야기 하라고! 그만 편들라고! 네 주인은 나다, 나!”
“그러길래 누가 장강의 앞물결이 되라 했습니까?”
장강의 앞물결이란 말에 풍천교주의 마음이 철렁했다. 족쇄 사내는 별 뜻 없이 그냥 한 말이겠지만, 풍천교주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에 떠밀려서 원하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는 기분을 느끼는 요즘이었으니까.
“그래, 너흰 좋겠다, 장강의 뒷물결이라서.”
중원행을 결정했을 때, 자신이 족쇄 사내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말 인생이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구나.’
풍천교주는 예측 불가의 인생이 주는 낯선 긴장감을 처음으로 느꼈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예측 가능한 순탄한 삶을 살아온 그였기도 했다.
* * *
풍천교주를 찾아갔을 때, 그곳에 청선도 함께 있었다.
마당에서 한창 수련 중이던 그녀가 나를 알아보고는 정중히 인사했다.
“이공자님을 뵙습니다.”
섭혼마존이 살아 있을 때는 닭 개 보듯 무심한 관계였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녀는 자신을 지지할 외부 조력자들이 필요했고, 이공자이자 황천각주인 나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풍천교주님의 제자가 되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청 소저. 축하드립니다.”
“감사해요, 이공자님.”
그녀는 모를 것이다. 일이 이렇게 흘러온 것은 내가 사우종에게 정보를 흘리는 것에서 시작되었음을.
“교주님께 알려드릴 소식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청 소저도 함께 들으시지요.”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족쇄 사내가 고개를 슬쩍 들었고 스치듯 눈이 마주쳤다. 지난번부터 우린 우리만의 방식으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마불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불이? 어떻게?”
“일제자 양도를 차기 섭혼마존으로 삼기 위해서 마존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젠장! 친구란 놈이 더하는군.”
“마불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이상, 여기 청 소저가 마존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청선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존이 되기 위해 큰 모험을 한 그녀였다. 만약 풍천교주의 제자까지 되었는데도 마존이 되지 못하면, 결국 그녀는 풍천교주를 따라 새외로 쫓겨나야 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이공자. 이 아이를 마존 자리에 앉힐 방법이 없겠나? 알다시피 이곳 천마신교에서는 내가 움직일 수 없어서.”
“방법은 있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방법인가?”
“우리도 마존을 움직여야죠. 다행히 혈천도마와 일화검존 두 어르신이 제게 우호적이십니다. 두 분께 부탁드리면 어쩌면…….”
“제발 도와주게.”
“도와주세요, 이공자님.”
풍천교주 만큼이나 간절한 것이 청선이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엄살 아닌 엄살을 부렸다.
“표를 주겠다는 마존들이 무엇을 요구할지 모릅니다. 설령 일이 잘 풀린다 해도, 나는 도마와 검존 두 어르신들에게 큰 빚을 지는 셈이 되고요.”
“나와 내 제자가 도움을 받지 않나? 그 공은 결코 잊지 않겠네.”
“알겠습니다, 노력해보죠.”
“고맙네. 자네 잠깐만 기다려주게.”
내게 따로 할 말이 있는지 풍천교주가 청선을 내보냈다.
“너는 나가서 수련하거라.”
“네, 사부님.”
청선이 내게 인사한 후 밖으로 나갔다. 나를 향한 그녀의 눈빛에 간절함이 담겼다.
그녀가 나가자 풍천교주가 물었다.
“이번에는 뭘 원하나? 이번에도 신물이겠지?”
“아닙니다.”
“아니라고?”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신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목숨밖에 없는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축복 같은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없다고?”
“네, 없습니다.”
“정말인가?”
나는 확실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풍천교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결과가 나오면 제가 술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거기다 술까지?”
“귀한 신물을 두 개나 주셨잖습니까? 이기든 지든 한잔하시죠.”
“어디서?”
“여기서 드셔야겠죠. 신물이 도난당한 상태에 교주님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모두 이상하게 여길 테니까요. 제가 술과 요리를 준비해오겠습니다.”
물론 그래서가 아니다. 족쇄 사내가 있는 곳에서 술을 마시기 위해서였다.
“기왕이면 패배주가 아니라 승리주가 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그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풍천교주는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모르니 제자를 잘 가르쳐 두십시오. 청 소저가 일제자 양도와 비무를 해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건 나도 염두에 두고 있네.”
“그럼 이만.”
그렇게 나가려다가 풍천교주에게 돌아섰다.
“참,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뭔가?”
“시공이환술로 만든 공간에서 하늘을 만들려는데, 구결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해서 한 번 더 해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앉아 있던 족쇄 사내 역시 흠칫 놀랐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그였는데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반 시진 내로 만드는 데 성공해야 하는데?”
“이미 반 시진 내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뭐라고?”
풍천교주는 경악했다. 일전에 두 시진 만에 연다고 했을 때도 그는 믿지 못했다. 다음에 직접 보여준다고 했었는데, 벌써 반 시진으로 줄였다니 놀람은 당연했다.
“내게 보여주게. 그럼 알려주지.”
“반 시진이나 기다리실 겁니까?”
“기다리겠네.”
“좋습니다.”
나는 곧장 구결을 외우며 시공이환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나고 우린 내가 만든 공간에 있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족쇄 사내도 그곳에 함께 데려갔다.
풍천교주도 놀랐고 족쇄 사내도 놀랐다. 하늘이 펼쳐지긴 했는데, 곳곳에 구멍이 생겨서 이상한 하늘이 되어 있었다.
잠시 그곳을 둘러보던 풍천교주가 내게 물었다.
“왜 하필 하늘부터 만든 건가?”
“하늘 보는 걸 좋아합니다. 보고 있으면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아서요. 그럼 해설을 부탁드립니다.”
“약속했으니, 가르쳐주겠네.”
풍천교주가 시공이환술의 구결 중에서 공간을 채우는 부분에 대해 자세히 해설했다.
사실 나는 완벽하게 하늘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들 앞에서 내 실력 직접 보이려고 제대로 못 만드는 척 한 것이다.
풍천교주에게 해설을 듣고 다시 반 시진 후, 나는 푸른 하늘이 창창하게 펼쳐진 공간을 새로 열어서 두 사람을 더욱 놀라게 했다.
풍천교주를 위해 보여준 수가 아니었다. 족쇄 사내에게 내가 어떤 재능을 지녔는지 직접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자랑이냐고? 맞다. 의도한 잘난 척이다.
지난 생에서 내가 느낀 수장의 제일 덕목은 강함이었다. 누가 뭐래도 강함이었다. 내 모든 것을 믿고 맡겨도 좋을 만큼 강한 사람 말이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족쇄 사내의 얼굴을. 맑으면서도 쓸쓸한 그의 눈빛을.
여전히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를 족쇄 사내라고 칭하고 있지만, 그는 족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모와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 * *
검무극이 떠난 후 풍천교주와 족쇄 사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풍천교주였다.
“무공의 천재를 오늘 보았군.”
“천무지체가 틀림없습니다.”
“천무지체?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빨리 시공이환술을 익힐 수는 없겠지.”
“이래도 아깝습니까?”
“뭐가? 시공이환술을 준 것? 당연히 아깝지. 이 아까움은 상대의 능력과는 무관한 것 아니겠나?”
“교주님이 전수한 무공으로 어떤 전설을 이룰지도 모르지요.”
“항상 하는 말이지만 그 전설이 내가 아닌데 무슨 소용인가?”
“우리 교주님, 포기를 모르는 남자시군요.”
“또 비꼬는군.”
“아닙니다. 솔직해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네니까! 자네 앞이니까 솔직하다고. 나 딴 데 가면 이런 물렁물렁한 사람 아니라고.”
자신은 이렇게 곧잘 속마음을 밝히지만, 족쇄 사내는 단 한 번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풍천교주는 그 이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 족쇄를 풀어주지 않는 한, 영원히 그의 진심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족쇄를 풀어줄 일 또한 영원히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자넬 빼앗기지 않을 거야.’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족쇄 사내는 음뢰종에 새겨진 악귀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또 악귀가 말을 거나?”
“왜 그렇게 사느냐고 또 묻소.”
“다들 그렇게 산다고 전하게. 이 악귀 놈아, 다들 그렇게 산다, 넌 뭐 대단하다고 그딴 걸 묻느냐?”
하지만 풍천교주는 알지 못했다. 이 순간, 사내는 전혀 다른 말을 악귀에게 건네고 있다는 것을.
제발 그만 편들고 그만 얘기하란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음뢰종 만큼이나 입이 무거워 보이는 악귀는 그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