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73)
절대회귀-73화(73/424)
제73회 고수일수록 답은 간단하다.
풍천교주의 거처에서 나온 나는 이안을 찾아갔다.
그녀는 여전히 수련에 매진 중이었고, 비천검법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있었다.
“이안아.”
“네.”
“나중에 신독정화술을 받고 나면 언제라도 떠나도 좋다.”
“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족쇄 사내에게 족쇄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풍천교주의 거처를 나오는데 문득 이안 생각이 났다.
어쩌면 그녀 발목에도 족쇄가 채워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족쇄가 어디 눈에 보이는 족쇄만 있겠는가?
화무기를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내 의지에도 보이지 않는 족쇄는 채워져 있었으니까.
혈천도마와 일화검존 사이에도 끊어내기 어려운 미움의 족쇄로 이어져 있다.
그럼 아버지는? 마치 음뢰종 앞에 묶인 족쇄 사내처럼, 어쩌면 아버지는 태사의에 묶여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를 지켜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진 채로.
“네 인생은 네가 선택해도 좋다는 말이다. 귀영대주가 아니어도 좋다. 교를 떠나 중원을 여행하면서 살아라. 어딘가 평화로운 마을에서 숨은 고수로 살아도 좋다. 내게 무공을 전수받았으니, 그 은혜를 갚을 필요는 없다. 이미 너는 충분히 내게 할 만큼 했으니까, 마음 편하게 선택해도 된다는 말이다.”
이안은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이 꼬리 하나를 더 꺼내야겠네요.”
“무슨 뜻이냐?”
“도련님 옆에 있어서 저는 더 행복하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어요. 여행도 하루 이틀이고, 숨은 고수도 하루 이틀이죠. 저는 도련님 울타리에서 매일이 행복해요. 저 바보 아니에요, 제가 정말 싫었다면 목숨 걸고 야반도주했을 년이라고요. 대체 왜 이렇게 절 착하게만 보시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숨겨둔 꼬리는 몇 개나 남았냐?”
“한 일곱 개 정도 남았을까요?”
“충분하네. 그럼 수련해.”
돌아서려다 괜한 걱정이 발동해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꼬리 하나쯤은 꼭 숨겨둬.”
내가 살아보니 비장의 초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거더라.
그쯤은 말씀 안 하셔도 다 압니다, 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그곳을 나섰다. 그래, 알면 됐다.
* * *
마불이 풍천교주를 찾아왔다.
그는 작정하고 왔기에 들어설 때 눈빛부터 달랐다.
“사람이라도 죽이다 왔소? 법문을 따르는 사람 몸에서 살기가 그득하오.”
“내가 모시는 부처께서는 가끔 살계(殺戒)를 범하시기도 하지요.”
“색불이 되셨다, 살불이 되셨다, 참으로 바쁘신 분이시구려.”
마불은 자리에 앉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풍천교주와 거의 높이가 맞았다. 키와 관련해서 예민한 그였기에, 이런 식으로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그가 화가 많이 났다는 단적인 표현이었다.
“이보시오, 풍천교주!”
“왜 그러시오?”
“우리가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됐소?”
“잘 기억나지 않소.”
“맞소. 잘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긴 인연인데, 내게 이럴 수 있소?”
“앉으시오. 우리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하지만 그는 앉지 않고 풍천교주를 노려보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대가 이런 속 보이는 수작을 부릴 줄은 몰랐소!”
“수작이라고 했소?”
풍천교주가 인상을 굳혔지만 애초에 마불은 작정하고 찾아왔다.
일화검존과 혈천도마가 움직여 다른 마존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마존들의 반응은 마불을 만났을 때 다르고, 혈천도마를 만났을 때가 달랐다. 그들은 모두 제각각에 남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이어서 마지막 순간 누구 말을 들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불은 직접 풍천교주를 공략하려고 온 것이다.
“섭혼마존의 어린 제자를 꼬드겨 제자로 삼다니? 대체 뭐 하자는 수작이냔 말이오!”
“내가 꼬드긴 것이 아니오. 그 아이가 제 발로 나를 찾아왔소.”
“그럼 돌려보냈어야지! 어른인 당신이 돌려보냈어야지!”
“내가 왜 그래야 하오?”
“당신이 왜 본교 제자의 사부가 되려는 거요?”
“귀술사들이 익힌 무공은 혈교의 마공이니까!”
“그럼 당신 지금 혈교 소속이라 말하는 거요? 진심이시오?”
풍천교가 혈교의 후신이란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혈교를 언급하거나 연결해선 안 되었다. 혈교는 천마신교와 여러 차례 전쟁까지 벌였던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어디까지나 풍천교주이기에 초대받은 것이다.
“지금 말꼬리를 잡는 거요?”
“신물을 도둑맞았다는 자작극을 벌일 때만 해도, 한편으론 이해하기도 했소. 한데 이번 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자작극? 지금 신물을 도난당한 친구에게 와서 자작극이라 하셨소? 난 그대만 믿고 이곳에 왔다가 신물까지 도둑맞았소. 책임은 못 질망정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니!”
“그 말을 우리가 믿을 거로 생각했소? 마존들은 바보가 아니오.”
“당신을 보니 그리 똑똑한 것 같지도 않던데.”
“뭐요?”
“당신, 살면서 똑똑하다는 소리 몇 번이나 들었소? 솔직히 말해보시오.”
순간 마불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자신이 그리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남들에게 못된 말로 쏘아붙이는 것도, 그렇게 상대의 기세를 눌러서 대화를 유리하게 이끌려는 수단이기도 했다.
풍천교주가 자신의 열등감을 훅 찌르고 들어오자 마불은 강수를 선택했다.
“이보시오, 친구.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은 새외가 아니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 아니라 현실을 말해주는 거요. 나는 오랫동안 그대와 친분을 맺어왔지만 다른 마존들은 생각이 다르다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나는 알 수가 없소.”
“당신들의 그 빈약한 상상력이라면 별것 있겠소? 당신 앞세워 날 죽이려 들겠지.”
“차라리 그렇다면 우린 작별인사라도 할 수 있을 거요.”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존들을 우습게 보지 마시오. 그보단 훨씬 더 비참하게 당신을 처단하려 들 거요.”
“자기들은 우습게 보지 말라면서 난 왜 이렇게 우습게 보는 거요?”
“우습게 보지 않소. 그저 당신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을 뿐이지.”
“약점이라니?”
“만약 마존들이 당신을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직접 당신을 치는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을 거요. 대신 교주님과 당신 사이를 이간질해서 없애버리게 만들겠지. 감당할 수 있겠소? 우리 교주님.”
천마를 두고 위협하자 풍천교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혈교를 싫어하는 천마는 확실히 풍천교주의 약점이라 할 수 있었다.
“한 며칠 신물 찾는 척하다가 그만 떠나도록 하시오. 제자는 파문하시고. 마존들에게는 내가 잘 말해두겠소.”
“내가 거절한다면?”
마불은 대답 대신 피식 웃고는 나가버렸다. 그게 더 기분이 나빴는지 풍천교주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나 방금 결심했네.”
음뢰종 앞에 있던 족쇄 사내를 쳐다보며 풍천교주가 이를 갈았다.
“이공자를 반드시 천마로 만들기로.”
* * *
“어쩐 일이십니까? 이공자님.”
오늘도 여전히 총군사 사마명은 일에 파묻혀 있었다.
“군사님과 놀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시간 괜찮으시면 저와 마가촌에 놀러 가시죠.”
내 제안에 사마명은 깜짝 놀랐다.
“마가촌을요?”
“본교에서 제일 중요한 분이시지만 하루쯤 농땡이 쳐도 본교가 망하진 않을 겁니다.”
“서글픈 비밀은 제가 일 년을 농땡이 쳐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그럼 비밀이 들키지 않도록 딱 두 시진만 놀다 오시죠?”
“좋습니다.”
사마명은 고민하지 않고 서류를 덮으며 일어났다. 그는 내가 놀자고 찾아온 것이 아님을 짐작했을 것이다.
“군사님이 안 계시면 무림맹에서 당장 쳐들어올 겁니다.”
“통천각을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물러나기만 기다리는 머리 좋은 군사들이 줄을 서 있답니다.”
“참 어려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네요.”
우린 웃으며 그의 집무실을 나왔다.
그를 데려간 곳은 풍류주점이었다.
“역시 이곳이었군요.”
풍류주점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하긴, 나에 대해서 낱낱이 알고 있을 테니, 당연히 풍류주점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혹시 실망하셨습니까? 마가촌 최고의 기루라도 갈까 기대하셨는데?”
다소 과한 농담이었지만 사마명은 웃으면서 받아주었다.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가 볼까 기대했었지요.”
“이래서 선입견이 무섭습니다. 다음 농땡이 때에는 바로 예약하겠습니다!”
“하하하.”
풍류주점에서 항상 앉는 이 층 자리에 사마명과 마주 앉았다.
주문받으러 온 조춘배에게 사마명을 소개했다.
“본교의 총군사십니다. 인사하시오.”
“으허헉!”
조춘배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사마명에게 허리를 굽혔다. 요즘 높은 사람들의 방문에 정신이 없는 그였다. 각주에 마존에, 이제는 총군사까지. 특히 다른 어떤 사람보다 총군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달랐다.
“평소 존경하고 있습니다. 제일 존경하는 분입니다.”
“제일 존경하는 분이 우리 아버지가 아니시네요?”
내 장난에 조춘배가 화들짝 놀랐다.
“그럴 리가요! 군사님을 두 번째로 존경합니다.”
“아, 두 번째는 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사실은 각주님을 제일…….”
그는 당황하는 척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농담입니다. 술부터 주시고 오늘 요리 맛있게 부탁드립니다.”
“네!”
조춘배가 술을 내준 후 주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사마명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이렇게 군사님과 단둘이 술은 처음이죠?”
“그렇습니다.”
“진작 모셨어야 했는데, 제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그간 많이 바쁘셨잖습니까?”
“바쁘기야 군사님이 바쁘시죠, 저는 항상 농땡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진짜 농땡이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요즘 내가 얼마나 부지런하게 돌아다녔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였다.
우린 이런저런 일상사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사마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주량이 셌다.
“술을 잘 드시는군요.”
“그럼요. 저도 소싯적엔 말술이었습니다.”
“의외인데요?”
술을 잘 마시던 사마명의 젊은 시절이 잘 연상되지 않았다.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사마명은 내가 놀자고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나 역시 말을 돌리지 않고 본론을 말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좋은 군사는 어떤 군사입니까?”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사마명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내 그의 시선이 술잔을 향했다.
“젊은 시절에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졌었는데, 한동안 잊고 살았네요.”
원래 이런 질문이 어려운 법이다. 누가 내게 좋은 무인은 어떤 무인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사마명의 대답은 바로 나왔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군사는 상대편 군사보다 더 똑똑한 군사입니다. 심오한 뜻 없고 그냥 말 그대로 상대 군사보다 똑똑한 군사, 이게 제 답입니다. 본교에서 저보다 똑똑한 사람이 있어도 됩니다. 여기 이 주점에 있어도 됩니다. 이공자님이 저보다 똑똑해도 됩니다. 하지만…….”
잠시 사이를 두고 사마명이 말했다.
“무림맹 군사보다는 똑똑해야 합니다. 사도맹 군사보다도 똑똑해야 됩니다. 그거면 됩니다.”
정말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사마명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싱거운 대답이죠?”
“그래서 확 와닿았습니다.”
“젊어서는 오히려 생각이 많아서 다른 답이 나왔을 겁니다. 조금 더 현학적인 답이 되었을 수도 있고요.”
어떤 마음인지 짐작되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고수일수록, 답은 간단해지기 마련이다.
“현장에서 움직이는 무인들은 임기응변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작전을 바꿀 수도 있죠. 하지만 군사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한 번 작전을 잘못 세우면 전멸입니다. 차라리 자기 선택으로 죽으면 후회는 덜 되겠죠. 한데 상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후배 군사들에게 항상 말합니다. 필사적으로 더 똑똑해져라! 거기에 모든 것이 달렸다.”
나는 사마명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가 술을 곧잘 마신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듯.
사마명이 내 빈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자, 이제 제가 질문할 차례네요.”
사실 나는 좋은 군사가 어떤 군사냐는 대답을 듣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다. 오늘 그와 만남은 이 질문을 듣기 위해서였다.
“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