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1)
절대회귀-81화(81/424)
제81회 다른 인생 한 번 살아보자.
나와 고월을 본 풍천교주는 놀라지 않았다.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우릴 기다렸으면서 괜히 한마디 쏘아붙이는 그였다.
“새 사람을 들인 것 자랑이라도 하시게?”
“자랑하라고 여기서 식사하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나와 고월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풍천교주가 고월을 힐끗 쳐다보았다. 요 며칠 쉬면서 살도 붙고 몸 상태도 좋아진 그의 모습이 적응 안 되는지 자꾸 쳐다보았다.
“새 주인이 잘 해주나 보네.”
“잘 먹고 잘 자고 있습니다.”
“잔칫날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줄은 모르겠지?”
“기왕이면 큰 잔치면 좋겠네요.”
이 둘의 관계 역시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다.
언젠가 풍천교주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거다. 그때 내가 왜 그리 집착했을까? 지금 와서 보니 별일도 아니었는데.
아니면 이 일은 잊지 못하는 상처가 되고 한이 될까?
평생을 살았던 나이지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할 수가 없다.
어쨌든 그가 침울해지기 전에 나는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는 만나 뵈었습니까?”
“만나 뵈었네.”
“그 말씀은 드렸습니까? 새로운 섭혼마존을 더 강하게 키우겠다고요.”
“드렸네. 자네 말처럼 흡족해하시더군.”
“다른 말씀은 안 하셨고요?”
“하셨네. 청선의 무공수련은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묻더군. 내가 빨리 돌아가 주기를 바라는 눈치셨네.”
“그래서 뭐라 대답하셨습니까?”
“아직 신물도 찾아야 하고, 가르칠 것도 많다고 말씀드렸네.”
“잘하셨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 대가로 또 신물을 요구하진 않겠지?”
“그 부분은 제 군사와 상의해 보겠습니다.”
순간 풍천교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걸 지금 내게 할 말인가?”
나는 차분하게 풍천교주에게 말했다.
“교주님.”
“듣고 있네.”
“본교에 오셔서 한 사람을 잃었지만 다른 한 사람을 얻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뒤돌아보는 인생을 사신다면, 그 사람도 잃게 될 겁니다.”
풍천교주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지만, 화를 내지는 못했다. 섭혼마존이 된 청선은 소홀히 상대할 사람이 아니었다.
“제자로 맞은 청 소저는 야망이 큰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집중하십시오.”
내 조언에 괜한 심술이 났는지 풍천교주는 고월에게 화풀이를 했다.
“자네 말대로 여기 이공자가 불세출의 영웅이라면 앞으로 수많은 사람이 주위에 모여들 거다. 더 똑똑한 사람들도 많겠지. 넌 거기서 그저 그런 사람으로 전락하게 되겠지. 누구였더라? 아, 그때 그 족쇄! 딱 이런 사람이 될 거야.”
나는 느꼈다. 이 말은 고월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한다는 것을. 고월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말라는 풍천교주의 경고라는 것을. 이 사람, 고월을 진심으로 위하고 있다.
그때 고월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공자께서 백만 냥이나 주셨습니다.”
설마 그가 이런 상황에서 풍천교주에게 돈 받은 것을 자랑할 줄 몰랐기에 나는 내심 놀랐다.
“이공자가 가식을 떤다고 하셨죠? 가식을 떨어도 이 정도로 크게 떨어야 합니다.”
나도 놀랐으니 풍천교주의 놀람은 당연했다. 물론 놀람은 분노로 이어졌다.
“충고는 잘난 새 주인에게나 해!”
풍천교주는 자리를 박차고 그곳을 나가버렸다.
고월이 이런 경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에게 담담히 물었다.
“왜 그랬나?”
과연 의도가 있는 행동이었다.
“군사로서 첫 번째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뭔가?”
고월이 날 응시하며 말했다.
“풍천교주를 영입하고 싶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풍천교주를 우리 편으로 들이겠다는 소린가?”
내 물음에 고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열받게 한 건가?”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아마도 풍천교주를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포석인 모양이다.
“왜 그를 끌어들이려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잠시 사이를 두고 고월이 말했다. 생각지 못한 이유였다.
“풍천교주를 살려주고 싶어서입니다.”
“나와 손을 잡지 않으면 그가 죽나?”
“네, 저는 그렇게 되리라 예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천마신교 교주님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 때문에? 왜?”
천마를 언급하고 있기에 고월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두 교주분 간의 그릇 크기가 너무 차이가 납니다. 공자님 아버님께서는 역대 천마 중 손에 꼽히는 무재를 지니신 분이죠. 야망도 크신 분이고요. 결국 풍천교는 천마신교에게 잡아먹히고 말 겁니다.”
나는 고월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제 고월조차 없는 풍천교가 새로운 군사를 제대로 들이지 못한다면 어떤 화를 겪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풍천교주를 살려주고 싶다?”
“네, 그렇습니다. 공자님의 사람이 되면 그 화를 면할 수 있겠지요.”
풍천교주를 얻는다? 그 결과 여러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실만큼이나 득도 있는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내 군사의 첫 제안인데 받아들여야지. 좋아, 풍천교주를 우리 쪽으로 끌어 들여보세.”
“감사합니다.”
고월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나는 그에게 제대로 군사 취급을 해줄 작정이다. 아버지가 사마명을 대하듯 말이다.
“제가 망쳐버릴까 봐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뭘?”
“풍천교주와 제가 감정적으로 깊이 얽혀 있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까닥 잘못 그를 다루다가 풍천교가 적이 돼버릴 수도 있고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한데 왜 허락하신 겁니까?”
“서로 외면한다고 괜찮아질까? 오히려 보지 않으면 미움과 증오는 더 커진다고 생각하는데? 차라리 풍천교주와 지지고 볶아서 결판을 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 우리 편을 만들든 원수가 되든, 어떻게든 결론을 내보자고.”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처럼 말이다. 내 말에 고월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악수 한 번 하세.”
고월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족쇄보다 더 단단한 손입니다.”
“만년한철을 부술 손이란 말인가? 자넬 붙잡아 둘 족쇄 같은 손이란 말인가?”
“어느 쪽이십니까?”
“난 둘 다 같은데?”
“전 둘 다 좋습니다.”
우린 힘차게 손을 맞잡았다.
드디어 내게 군사가 생겼다.
* * *
다음 날 나는 풍천교주를 찾아갔다.
“중원에서 나는 좋은 차입니다.”
풍천교주는 고맙다는 말 대신 코웃음부터 쳤다.
“자네 군사에게 백만 냥 준 것 자랑하러 왔나? 돈 많아서 좋겠군.”
“그냥 뵙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리고 돈은 교주님이 저보다 백 배는 더 많지 않습니까?”
“백 배는 무슨! 천 배는 더 되겠지.”
“그럼요. 저도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 사람입니다. 교주님 앞에서 돈 자랑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왜 왔나?”
“차 한잔하면서 담소나 나눌까 해서 왔지요.”
풍천교주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부터 보냈다. 나 때문에 쌓인 피해의식이 뒤에 놓인 신물보다도 더 쌓인 그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사실 고월과 관련해서 고민이 있습니다.”
“무슨 고민?”
“어제 보셨지요? 교주님 앞에서 경망스럽게 돈 자랑 하는 것.”
“실망이라도 했다는 건가?”
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약간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물론 고월이 시킨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어제 고월이 돈 자랑을 한 것이다.
“저는 고월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지극정성을 보인 건가?”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해봤는데?”
“어쩌면 교주님과 저와 인연을 맺어주기 위한 디딤돌 같은 역할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사람은 아나? 자네가 이렇게 뒤통수를 치고 있다는 것을.”
“험담이나 배신은 아니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지.”
“그래서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고월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해서요.”
풍천교주의 표정에 불쾌감이 스쳤다.
“이보게, 이공자.”
“네.”
“좋게 말할 때 오늘은 그만 가시게.”
싸늘한 축객령에 인사만 하고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렇게 쫓겨나는 것도 고월의 예측에 있었다.
* * *
다음날은 고월이 풍천교주를 찾아갔다.
“이것들이!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인가?”
그래도 검무극이 왔을 때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손님으로 왔으니 예의를 갖춰주십시오.”
“지랄한다.”
풍천교주가 옆으로 돌아앉았다.
고월이 옆에 놓인 탁자로 가서 제 손으로 차를 탔다. 풍천교주의 거처에는 시비도 잘 들이지 않고 둘만 있었기에 주로 풍천교주가 차를 탔었다.
“독이라도 타려고?”
“교주님을 독살해서 뭐 하겠습니까?”
“나 없는 세상에서 이공자와 즐겁게 살 수 있잖아?”
“교주님이 살아계셔야 자랑을 하지요. 어제 돈 자랑처럼요.”
“이런 미친놈이.”
고월이 차를 가져왔다.
“드십시오. 그러고 보니 처음 제 손으로 타 드리는 차네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풍천교주는 차를 호호 불어가며 마셨다.
“어떻습니까?”
“맛없다.”
“한 잔만 마시고 가겠습니다.”
“그러든지.”
두 사람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러다 불쑥 풍천교주가 말했다.
“이공자가 자넬 완전히 믿지 않고 있어.”
원래라면 절대 말해주지 않으려 했다. 검무극에게 뜨거운 맛 좀 봐라, 이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까 그게 잘 안되었다.
“이간질이십니까?”
기껏 말해줬더니 뭐? 발끈하려던 풍천교주가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여기든지.”
그제야 고월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동입니다. 제게 그런 말씀도 다 해주시고.”
“이간질이라면서?”
“아닌 줄 압니다.”
“어떻게?”
“작전이거든요.”
작전이란 말에 풍천교주가 깜짝 놀랐다.
“작전? 무슨 작전?”
“교주님을 끌어들이려는 작전이죠. 이공자님이 저를 의심해서 궁지로 몰아가고, 교주님 약한 마음을 이용해서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작전입니다.”
“뭐?”
잠시 멍하게 있던 풍천교주가 목청을 높였다.
“그런 시답잖은 작전에 내가 넘어갈 줄 알고?”
“제가 궁지에 몰리면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
“당연히! 이미 간 사람인데, 내게 왜?”
“하면 지금 왜 흥분하고 계십니까?”
“흥분 안 했다. 안 했다고!”
하지만 분명 풍천교주는 흥분하고 있었다.
“한데 왜 내게 말해주는 거냐?”
“교주님을 속여서 데려오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
풍천교주가 뭐라 말할까 몰라 망설이고 있던 그때. 고월이 다시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까지도 작전입니다. 더욱 저를 신뢰하게 만드는 작전이죠.”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이 망령 같은 놈이 떠나서도 날 괴롭히는구나! 훠이! 물러가라!”
“이제 교주님 같으십니다.”
“소리나 질러대는 것이 나답다고? 놀리냐? 그래? 원 없이 질러줄 테니 맘껏 조롱해봐라!”
한바탕 소리를 질러대자 풍천교주는 속이 후련해짐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해서 날 데려가려는 이유는?”
“이대로라면 천마신교 교주에게 당할 것 같아섭니다.”
고월은 처음부터 끝까지 솔직하게 풍천교주를 대했다.
“안 당해! 돌아가자마자 새 군사 구할 거야.”
“대충 풍천교 내에서 어떤 사람이 제 자리에 앉을지 제가 알잖습니까? 그들로는 무립니다.”
“구하면 되지. 자넬 구했던 것처럼.”
“그런 행운이 두 번이나 올까요?”
“젠장! 망할! 이 시건방진 놈!”
“저는 이제 패를 다 깠습니다. 이제 교주님이 패를 까실 차례입니다.”
“……어차피 내 패는 다 알고 있으면서.”
풍천교주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공자는 내 모든 것을 털어먹을 거다.”
“그럼 그때마다 교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다 얻어내십시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어서 채워 넣으십시오.”
“내 머리로는 그게 안 되잖아?”
“제가 돕겠습니다.”
“가서 너 자신이나 도와라. 거기서 개털 돼서 족쇄에 묶이지 말고. 인간들 착한 척, 잘난 척 해봤자 다 거기서 거기다.”
“그래섭니다. 거기서 거기니까 같이 어울리자고요.”
“정말 널 믿어도 되나?”
“떨리십니까?”
“너라면 안 떨리겠냐?”
그때 고월의 표정이 달라지며 갑자기 말투를 바꾸었다.
“교주야.”
풍천교주가 반가우면서도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거짓말마라. 지금까지 인생 살면서 떨렸던 적 없었잖아. 한 번도 없었지? 교주를 위협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중원진출 생각만 해도 떨린다고? 거짓말 마라. 중원진출, 중원진출 노래를 불렀지만, 그 역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 없었잖아?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솔직히 교주에게는 귀찮은 일이었지?”
“!”
부정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모두 다 숙원이기에 자신도 숙원이 된 일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을 거부하면 풍천교의 죄인이 되는 것 같아서 중원진출을 원했을 뿐이다.
“한마디만 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온갖 미녀를 안을 수 있고, 매일 산해진미를 먹는 인생도 좋지. 모두가 꿈꾸는 인생이니까. 한데 교주야, 교주는 그 인생 실컷 살아봤잖아? 이제 그 인생에서는 어떤 자극도 행복도 없잖아? 교주야, 우리 다른 인생 한 번 살아보자. 긴장되고, 짜릿하고, 간이 철렁철렁하는 그런 인생 한 번 살아보자. 모래바람에 녹슬어가는 교주 무공, 진짜 피바람이 뭔지 세상에 한 번 보여줘야지. 그러다 운 나쁘면꽥하고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인생 말이다. 다행히 우린 서로의 무덤가에 꽃 한 송이 가져다줄 사람은 있잖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윽고 풍천교주가 나직이 말했다.
“이공자 부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