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2)
절대회귀-82화(82/424)
제82회 그때 그 족쇄, 그때 그 교주.
내가 풍천교주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교주의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만약 자네와 손잡는다면 지금과 뭐가 달라지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서 성급함보다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는 진지했다. 고월이 그를 거의 설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확신에 찬 말을 해주면 좋았겠지만, 나는 진실을 말해주었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달라지는 게 없다고?”
“그럼요, 뭐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허락도 안 받았는데 풍천교 지부를 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손잡았다고 공표를 하겠습니까? 그냥 우리끼리의 약속이죠.”
“그것뿐이라고?”
풍천교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고월을 쳐다보았다. 이게 뭐야? 이러려고 나를 데려가려는 거냐? 이런 눈빛을 보였지만, 고월은 조용히 내 말만 기다렸다.
“다만 이건 있겠죠. 정말 교주님이 내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면, 교주님이 위험에 빠지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 저는 구하러 달려갈 겁니다.”
“난 위기에 빠진 적이 없어서. 살면서 위기에 빠지는 일, 잘 없지 않나?”
“그만큼 순탄한 삶을 살아오신 거죠.”
풍천교주가 힐끗 고월을 쳐다보았다. 그 순탄한 삶의 많은 부분은 고월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반면에 저와 손잡으시면 위기에 빠지실 겁니다. 뭐? 이공자와 풍천교주가 손잡았어? 풍천교주부터 없애버려! 이런 적들이 안 나타난다는 보장이 없죠.”
“그럼 내가 미쳤다고 자네와 손을 잡나?”
“교주님과 손을 잡는 일은 제가 원한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교주님이 부담스럽습니다.”
“어렵게 말해서 나 헷갈리게 하지 말고. 쉽게 말하게.”
“아버지가 교주님이나 풍천교에 대해서 좋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죠?”
“물론이네.”
“그런 상황에서도 저는 교주님과 교류했습니다. 이제 고월 이 사람까지 제 사람이 되었지요. 과연 아버지가 그 사실을 모르실까요?”
“알겠지.”
“저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이 관계를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신물 욕심도 있었지만…….”
나는 왼손을 그 앞에 내밀었다. 극품천잠사가 팔목에 감겨있었다.
“이 천 쪼가리가 아무리 귀해도 아버지의 눈 밖에 나는 것을 감수할 정도는 아닙니다.”
풍천교주는 반박하지 못했다. 천마가 되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한데 왜 이 난리지? 왜 날 번갈아 찾아와서 내 마음을 흔드냐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제 생각이 아니라고요. 바로 고 군사 생각이죠.”
고월은 반쯤 눈을 내리 깐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 사람들 옆자리로 교주님을 데려오자는 생각은 전적으로 여기 고 군사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고 군사에게 제가 묻겠습니다.”
나는 고월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왜 아버지와의 갈등을 감수하고서라도 교주님을 내 편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풍천교주는 나보다 더 궁금한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고월이 차분하게 말했다.
“송구하게도 이 결정은 공자님을 위한 결정이 아닙니다. 제 옛 주인을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고월이 풍천교주를 응시했다.
“교주님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하고 싶어섭니다. 교주님과 새 인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교주직을 후계자에게 맡기고 오십시오.”
“교주직을 버리고 오라고?”
“네. 저는 풍천교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주님 개인을 원하는 겁니다.”
풍천교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실 그는 한 집단을 이끌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이기심과 욕심은 모두를 속이는 지독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현실에 안주했던 새외의 지배자는 이제 위태로운 줄 위에 서 있다. 저 아래에는 수많은 창과 검날이 장대처럼 솟구쳐 있는 위태로운 줄 위에.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알지 못했다.
과연 그가 한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풍천교주의 자리를 버리고 내게 올까? 이 세상에 정말 그런 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없으면 본교는…….”
“더 잘 돌아갈 겁니다. 걱정 마시고 오십시오.”
“생각 좀 하자고! 좀! 제발!”
그때 내가 바깥에 있는 풍천교주의 수하에게 황천각에 가서 서대룡을 데려오라고 했다. 내 행동에 풍천교주와 고월 모두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잠시 후 서대룡이 바람처럼 그곳으로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갑작스러운 부름에 풍천교주의 거처까지 온 그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나는 장난스러운 인사는 일절 생략한 채 진지하게 그에게 물었다.
“최근 자네 인생을 바꿀 결정을 어디에서 했나?”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서대룡 역시 솔직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주점에서 했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데 걸린 시간은?”
“채 일각도 안 걸렸을 겁니다.”
“그 결정 후회하나?”
“아뇨.”
“만약 그날 그곳에서 결정 안 했다면?”
“영원히 못 했을 겁니다.”
“그때 일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주게.”
원래 앞에 나서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는 서대룡이다. 하지만 기왕 나섰다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똑똑한 사람이기도 하다.
“제 경험상 인생을 바꿀 결정은 순간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집을 떠날 때도, 황천각에 들어올 때도. 오래 고민하지 않았죠. 제가 옷 한 벌 살 때는 며칠을 고민해서 삽니다만, 이번에 제 인생은 일각 만에 바꿨습니다. 미루면? 저는 결정 못 합니다. 다음 날에는 다른 사람으로 깨더라고요.”
내가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어떻습니까?”
풍천교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짰지? 말 다 맞추고 와서 이러는 거지? 어제 밤새 연습했지?”
그러자 서대룡이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감히 교주님께 한 말씀 드리자면, 이공자님을 만난 후에 저도 비슷한 경험 여러 번 했습니다. 다 짜고 절 놀리는 것 같은 상황 말이죠. 이게 뭐지, 저건 또 뭐지 하다 보면 상황이 끝나 있고. 이리로, 저리로, 시키는 대로 정신없이 가다 보면 또 상황 끝나 있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풍천교주님 앞에서 이런 대답을 한다고요? 왜요? 지금도 다 짜고, 절 놀리는 것만 같습니다.”
서대룡이 나를 보며 따지듯 물었다.
“맞죠? 저 놀리려고 이러시는 거죠? 이래 봬도 저 황천각 수석입학자라고요. 척 보면 다 안다고요!”
난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역시, 내 오른팔답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마음에 든다. 안 짜도 되는 게 오른팔이다. 그래서 오른팔인 거다.”
서대룡도 날 따라 웃었다.
“오른팔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요즘인데, 점수를 딴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럼 오른팔 아직까진 잘 붙어 있는 걸 확인했으니,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잠시 기다려. 어쩌면 역사적인 순간이 될 수도 있는 자리니까.”
“혈투가 벌어지는 자리는 아니겠지요? 저 아직 무공수련 기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교주님 마음속에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모두의 시선이 풍천교주에게 집중되었다.
“뭐야? 정말 지금 결정하라는 건가? 풍천교주 자리를 포기하는 것을 일각 만에 결정하라는 거야? 다른 자리도 아니고 풍천교주 자리를?”
그 순간 서대룡이 화들짝 놀라며 ‘헉!’ 탄성을 내질렀다. 자기는 신나게 설명했지만, 풍천교주가 결정을 내릴 내용이 이런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맙소사! 저라면 백 년은 고민했을 겁니다. 지금 결정하지 마십시오!”
그의 솔직한 말이 오히려 풍천교주에게 자극이 되었다.
“자넨 정말 후회하지 않나?”
“교주님은 후회하실 겁니다. 돌아가셔서 한 일 년은 고민하십시오! 적어도 백 일은 하십시오.”
“건방진 놈! 묻는 말에만 대답하게.”
“네, 후회하지 않습니다. 각주님을 만나 제 수명은 줄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무척 행복합니다.”
풍천교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방에 진열된 신물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음뢰종을 치기 시작했다.
뎅!
깊은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소리가 사라질 때쯤 그가 다시 종을 쳤다. 또 치고, 또 치고.
종소리를 들으며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음뢰종에 새겨진 악귀가 그에게 무슨 조언이라도 해주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몇 번이나 종소리가 울렸을까? 갑자기 풍천교주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가면 자네 오른팔 자리 나 줄 텐가?”
서대룡이 너무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자기 오른팔 자리를 노려서가 아니라, 정말 풍천교주가 교주직을 포기하려는 사실에 놀라서일 것이다.
내가 풍천교주직까지 포기하려는 사람에게 한술 더 뜨며 말했다.
“안 됩니다. 제 오른팔은 여기 서 조사관입니다. 장 군주 뒤에 줄 서시고, 싸워서 쟁취하셔야 합니다.”
서대룡이 눈을 더 크게 뜬 채 애절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검무극과 서대룡이 떠난 거처에는 풍천교주와 고월만이 남았다.
풍천교주와 고월은 음뢰종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악귀가 뭐라고 합니까?”
“나보고 미친놈이란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정말 오시게요?”
“너야말로 미친놈이냐? 지금껏 그렇게 설득해놓고 뭔 소리냐?”
“정말 올 줄은 몰랐으니까요. 이공자에게 그렇게 단호하고 멋있게 함께 가자는 말씀을 하실 줄 몰랐습니다.”
“내일 마음 바뀔지 모른다. 모레 바뀔지 모르고. 내년에 바뀔지도 모르지. 나 원래 줏대 없는 놈이잖아? 기왕 이렇게 됐으니 하나만 묻자.”
“네.”
“왜 나와 함께 하고 싶은 거냐? 그냥 정 때문이냐?”
고월이 한참 동안 음뢰종을 쳐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혼자 가기 두려웠나 봅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에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여전히 고월은 시선을 음뢰종에 두었다.
“혼자 가서 멍청한 짓 할까 봐 두려운가 봅니다. 이공자에게 가서 그쪽 사람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겁나나 봅니다. 그런데 교주님이 함께 있으면 힘이 날 것 같아서요. 교주님 앞에서는 제가 항상 최고로 똑똑하지 않았습니까?”
고월이 천천히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저야말로 속 좁고 이기적인 놈입니다. 절 위해서 교주 자리까지 내려놓게 만드는 놈이거든요.”
만난 이래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은 고월이었다. 그랬기에 풍천교주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오히려 다른 이유보다 좋다.”
“왜 좋습니까?”
“내가 자네를 지켜주려고 가는 거잖아?”
이번에는 고월이 피식 웃었다.
“생각 더 하셔도 됩니다. 이공자는 풍운을 몰고 가는 운명이라서, 우리 인생이 어떻게 휩쓸릴지 모릅니다. 정말 그때 그 족쇄, 그때 그 교주 이런 신세가 되어 구석에 처박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쫄딱 망해서 저자에서 약이나 파는 신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살아남았으면 됐지. 그리고 그 약, 같이 팔자면서? 그럼 됐다.”
풍천교주도 자신의 속마음을 밝혔다.
“나라고 이기적이지 않겠나? 그냥 오란다고 가겠나? 머리 굴릴 만큼 굴리고 계산 다 끝났으니 가는 거지. 새 교주 세우고 나는 중원에 본교 진출시키는 일 하겠다고 올 거다. 그냥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본교의 대업을 위해 희생하는 모양새로 떠날 거다. 혹시라도 마음 바뀌면 다시 돌아갈 수 있게. 중원에 풍천교를 제대로 세우려면 얼마나 걸릴까? 꽤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 차기 풍천교주가 새외에서 모래바람 맞고 고생하고 있을 때, 재미는 중원에서 내가 보는 거지. 긴장되고, 짜릿하고, 간이 철렁철렁하는 그런 재미.”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생각까지 다 하셨소? 교주도 참 똑똑하시오.”
“솔직히 말해도 된다. 너도 참 이기적이라고.”
“교주.”
“왜?”
“우리 잘해봅시다.”
“나 긴장된다.”
“새외지존께서 뭐가 긴장되시오?”
그러자 풍천교주는 생각지도 못한 농담을 했다.
“오른팔 못 될 것 같아서.”
“뭐요?”
“내가 또 집착하면 한 집착 하는 사람이지 않나? 그 자린 내가 꼭 먹고 만다.”
눈빛 보니 농담만은 아닌 듯 보였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자네가 말했지. 교주직을 내려놓으면 나도 꽤 멋있는 사람일 거라고. 어디 한 번 자네 말이 맞을지 보세. 아, 이제 이 음뢰종을 볼 일도 없겠구나.”
애틋하게 종을 쓰다듬던 풍천교주가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이 악귀놈아!”
아마도 악귀가 이렇게 말했나 보다. 오른팔을 두고 벌이는 일개 황천각 조사관과의 숨 막히는 대결, 정말 기대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