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3)
절대회귀-83화(83/424)
제83회 두 개의 유성이 만난 것처럼.
이틀 후, 풍천교주는 데려온 수하들을 모두 거느리고 천마신교를 떠났다.
천마와는 작별 인사를 했지만, 팔마존과는 인사도 없었다.
그 일을 두고 마인들은 신물을 도난당한 일 때문에 화가 나서 돌아간 것이라 수군거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귀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교주는 성질이 급한 사람이니 풍천교를 정리하고 최대한 빨리 돌아올 겁니다.”
차기 풍천교주로 누굴 세우고, 어떻게 내부 정리를 할지는 이미 고월과 충분히 상의를 마친 후였다.
“이번에 제 첫 제안을 받아들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자네에게 고마워해야지. 자네 덕분에 풍천교주라는 대단한 고수를 내 편으로 만들었으니.”
“그 사람 수련 게을리하고 놀고먹어서 살 뒤룩뒤룩 찐 것 보셨잖습니까? 돌아오면 수련 제대로 시켜야 할 겁니다.”
“자네가 시켜야지. 누가 새외지존에게 그런 말 할 수 있겠나?”
“제게 맡겨주십시오.”
정말 큰 일을 치른 느낌이었다. 고월이라는 탁월한 군사를 얻고, 거기에 풍천교주라는 절대고수까지. 이번에 풍천교주가 본교에 와서 이리 채이고 저리 시달리고 했지만, 그래도 그는 새외의 최강자다. 고수들의 싸움이야 워낙 변수가 많아 뭐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를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마존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보게, 고 군사.”
“네, 공자님.”
“군사란 직업은 다른 사람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일임을 아네. 그래도 틈이 날 때마다 자신도 챙기게.”
자신을 들여다보란 말 대신 챙기라는 말을 썼다. 굳이 충고 같은 조언을 하지 않더라도 똑똑한 고월은 내 말에 담긴 속뜻을 정확히 알아들을 것이다.
“공자님은 참 따뜻하고 친절하신 분이십니다.”
“자주 듣는 말이네. 내가 연기를 잘하고 있다는 증거기도 하고.”
고월은 연기라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친절함이 가지는 약점은 제가 메우도록 하겠습니다.”
“천천히 하게. 그래도 돼.”
“네.”
“난 잠시 다녀오겠네. 자네 챙기느라 기존의 내 사람들에게 소홀했어. 이제 좀 챙겨야지.”
“다녀오십시오.”
나는 곧장 천마전으로 향했다. 챙기는 것은 위에서부터 아래로다.
* * *
아버지는 수련장에 계셨다.
내가 수련장으로 들어서면 기습 공격으로 나를 시험하던 아버지였는데 오늘은 수련장 가운데서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바둑도 두십니까?”
아버지가 바둑을 좋아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바둑을 두시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본교 내에서 날 이길 사람 손에 꼽는다.”
“바둑으로 말입니까?”
“당연히.”
“국면이 불리하면 손날로 목을 스윽 긋는 신호를 보내시는 것 아닙니까? 그때마다 휘 아저씨가 상대편 등 뒤에 스르륵 나타나서 푹.”
“가끔은. 대결은 이겨야 하니까.”
아버지의 농담에 난 웃으면서 아버지 옆으로 갔다. 아버지 바둑 실력은 내가 잘 안다. 말씀처럼 그리 대단하지는 않고, 그럭저럭 두시는 정도다. 많이 이기셨다면 많이 져준 거겠지. 천마 앞에서의 하향 평준화다.
“사마 군사가 내준 문제인데, 통 답을 알 수가 없다.”
제법 어려운 사활문제였다.
나는 가만히 문제를 살피다 아버지에게 말했다.
“여기 두면 백이 살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바둑만큼은 아버지보다 고수인 나다. 그게 정답임을 확인한 아버지가 의외라는 기색을 내비쳤다.
“제법이구나.”
“원래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더 잘 보지 않습니까?”
“훈수? 나도 혼자서 문제를 풀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상대가 있으셨잖아요?”
“누구?”
“자존심요. 이 문제 반드시 풀어야지 하는 승부욕도 나란히 저기 앉아 있네요.”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며 바둑판 앞에 앉았다.
“그 옆에 너도 앉아라. 한판 두자.”
“좋습니다. 대신 불리하다고 목에 손날 긋기는 없기입니다.”
나는 아버지와 바둑을 뒀다.
사냥에 이어, 식사, 그리고 바둑이라니. 정말 회귀 전에는 꿈도 못 꿔본 일들을 이렇게 해 본다.
나는 일절 실없는 소리를 하지 않고 바둑에만 집중했다. 텅, 텅. 적막함 속에서 바둑돌 놓는 소리가 경쾌했다.
별일 아닌데. 아버지와 아들이 바둑 한판 두는 일인데. 이 별일 아닌 것을 우린 어찌 한 번을 못 해 봤을까? 아버지의 얼굴만 봐도 왜 그리 무서워했을까?
바둑이 좋은 점은 끝날 때까지 말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많은 일이 일어난다. 나는 내 집을 만들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집을 만들었다. 때론 아버지의 집에 침입하기도 했고, 곤마가 되어 쫓기기도 했다. 때론 양보했고, 또 과감한 행마를 하기도 했다.
아버지와의 바둑이 더없이 즐거웠지만 나는 제대로 실력을 발휘했다. 아버지가 승부욕의 화신임을 잘 알지만, 봐주지 않았다. 괜히 봐주는 기색이라도 들키는 날에는 만방으로 이기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국면이 밀리자 아버지가 턱을 매만졌다.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시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무림맹과 전쟁이 났을 때, 전황판을 바라보는 눈빛도 이렇게까지 진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너스레를 떨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괜히 그랬다가 아버지는 불리한 바둑판을 엎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버지도 이 순간 손날로 목을 한 번 긋는 장난을 치고 싶지 않으실까?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바둑이 끝났고, 내가 여섯 집 차이로 이겼다.
“천마 아니시랄까 봐, 정말 지독한 싸움 바둑이시네요. 간신히 이겼습니다.”
“바둑은 언제 배웠느냐?”
“틈틈이 배워뒀습니다. 아버지께서 사마 군사에게 바둑 배운다는 소리를 듣고요. 아, 그리고 복수전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의기양양한 내 모습에 아버지가 바둑판 위로 손을 내밀었다.
촤르르르륵.
바둑돌이 그대로 허공으로 올라가더니, 백돌과 흑돌이 빠르게 교차했다. 마치 공연을 펼치듯 화려한 움직임을 보이며 돌들이 자기 통으로 들어갔다. 마치 살아있어서 스스로 제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 한 수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허공섭물의 마지막 경지는 이런 거다, 알겠냐?
이 수법만 해도 내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지만 아버지는 부족하신 모양이다.
“내가 진 채로 널 보낼 수는 없으니, 비무 한판 하자.”
“너무하시네요. 간만에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당당히 천마전을 걸어서 나가려고 했는데.”
“그간 무공수련에 소홀했다면 너는 걸어서 이곳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거칠게 다루겠다는 뜻이었다. 마치 바둑에 져서 화풀이하시는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풍천교주 일로 화가 나셨다는 것을. 당신께서 풍천교와 교주를 멀리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교류하고, 군사까지 받아들인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자고로 대마불사랬는데 설마 죽지는 않겠지요?”
“네가 지은 집이 옥집이 아니길 빌어야 할 거다.”
나와의 비무를 간절히 기다리는 비무친구는 따로 있는데. 물론 일화검존과의 비무 열 번 보다 아버지와의 비무 한 번이 내게는 더 큰 도움이 되겠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천마검을 뽑자 주위 공기가 무거워지며 무형의 기운이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찔러오는 기운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바윗덩이가 사방에서 짓누르는 그런 기운이었다.
나도 흑마검을 뽑으며 자연스럽게 천마호신공을 발휘했다.
첫 압박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버티자 아버지의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
나는 천마호신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일전에 무아지경을 겪으면서 상당한 경지에 오른 내 천마호신공은 이번에도 잘 버텨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의 기운에 살기가 담겼다.
아버지의 살기를 직접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섬뜩하지 않아서 섬뜩했다.
분명 죽음이 내 몸 어딘가에 내려앉았는데, 이게 나비처럼 가벼워서 어디에 앉았는지 모르는 섬뜩함, 그래서 그 살기가 어디에 있나 막 찾다 보니 문득 내가 살기의 바다에 풍덩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의 공포심, 그런데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막막함. 아버지의 살기는 이런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집합체였다.
나는 아버지의 살기를 적대하지 않고 그대로 느끼며 받아들였다. 지독한 공포와 막막함 속에서도 단 하나, 나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공포에 잡아먹히지 않고, 공포를 느끼는 나를 느끼려 애썼다.
반발하지 않고 버티는 것.
때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버티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대에게 큰 압박이 될 수가 있다.
과연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그 놀람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네 경지가 정녕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눈빛에서 그 감정을 읽는 순간, 아버지는 나를 향해 쇄도했다.
명왕보로 달려드는 아버지를 향해 나도 명왕보를 발휘했다.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아버지를 향해 달려든 것이다.
챙!
차가운 금속성만 남기고 우린 교차해서 지나갔다.
상대의 시작점에서 우린 동시에 돌아섰다.
격돌의 여파로 내 손에 들린 흑마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천마검 역시 떨렸다. 예전이라면 보이지 않았을 텐데, 신안술로 시력이 좋아진 나는 그 미세한 떨림이 다 보였다.
아버지의 손목도 지금 나만큼 아플까?
“정치질이나 하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제법이구나.”
“원래 연애사와 무공수련은 보이지 않는 데서 하는 거잖습니까? 저 열심히 수련하고 있습니다.”
정말 나는 잠을 줄여가며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사실 수련하기 싫어도 몸이 허락하지 않았다. 단전에 쌓인 웅혼하면서도 정순한 내공은 세상을 향해 발출되기를 바랐고 풍신사보는 언제나 강적과 싸우기를 바랐다. 비천검법은 대성을 넘어 새로운 경지를 향해 가는 중이었고 신안술로 눈까지 좋아진 상태였다.
“그럼 이것도 막아낼 수 있는지 볼까?”
말이 끝나는 순간 아버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나도 사라졌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암영보를 사용한 것이다. 오늘 나는 흉내쟁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수련장 구석에서 몸을 드러낸 우리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쌍둥이가 펼친 것 같은 똑같은 자세!
교차한 검 너머 아버지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찰나에 지나간 감정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강적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었다.
절대자의 고독은 제가 잘 이해하지만, 그래도 아버지. 저 아들입니다. 적, 아닙니다.
검이 떨어지는 순간 천마검과 흑마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서로를 향해 균천식이 펼쳐졌다.
두 검이 만들어 낸 새하얀 검광이 허공을 양단했다.
밤하늘에서 두 개의 유성이 만난 것처럼 두 줄기 빛이 만났다가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광경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번에는 동시에 변천식을 발출했다.
허공에서 열두 번의 변화가 있었다. 천마검에서도 있었고 흑마검에서도 있었다.
이쪽이 화려하면 저쪽도 화려했다. 무거우면 무거웠고, 이쪽이 빠르면 저쪽도 빨랐다. 변화는 변화를 만나 소멸했다.
우리의 공격은 똑같았다. 종이 한쪽에 먹으로 그린 후 반으로 접으면 똑같은 그림이 다른 쪽에 나오듯, 우린 똑같은 공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버지는 감사하게도 흉내를 내는 내 의도를 받아들여 주었고 다른 변칙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다.
다음 공격은 제사식 염천식이었다.
강맹한 검기가 수련장을 휩쓸었다. 두 검기가 충돌하자 수련장이 크게 진동했다. 조금만 더 내공이 들어갔어도 수련장이 무너졌을 위력이었다.
“여기까지!”
아버지는 비무를 중단했다. 이후 초식은 아무래도 위험하다고 판단하신 듯했다. 그만큼 내가 강해졌다는 의미.
내게 더 놀랄 것이 있을까 싶은 아버지였지만, 오늘의 놀람은 또 새로운 것이었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아버지가 ‘많이’라고 표현했다. 그 말씀은 엄청나게 실력이 늘었다는 극찬.
“그럼 됐다.”
이 한마디에 용서가 담겼다.
근래 풍천교와 관련해서 벌인 여러 가지 일들, 그래서 무공수련을 게을리했다면 오늘 크게 혼을 내주려고 하셨는데, 내 실력이 크게 향상된 것을 보고 용서하신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벌이 아니라, 상이었다. 아버지와의 이런 쌍둥이 비무는 백만 냥을 주고서도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아버지에게 얼마면 됩니까? 얼마면 한 판 제대로 붙어주시겠습니까? 했다간 자식이라도 죽을 수 있다.
똑같은 초식을 구사하면서, 나는 느낀 바가 컸다. 제삼자가 봤다면 똑같았겠지만, 나는 차이를 확실히 느꼈으니까. 그 미세한 차이를 느낄 때만이, 진짜 초고수가 되는 것이다.
오늘 나는 비천검법의 십이 성 대성의 길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된 기분이다.
“배 안 고프십니까? 오늘은 아들이 밥 한 번 사겠습니다. 마가촌에 나가서 식사하시죠.”
근래 아버지가 마가촌에 나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당연히 거절할 거로 생각한 제안이었는데.
“가자.”
뜻밖의 허락에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 가시게요?”
“그냥 한 말이었냐?”
“그럴 리가요. 가시죠!”
아버지는 평범한 무복으로 갈아입고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죽립을 착용했다. 정식으로 행차했다간, 마가촌은 한바탕 난리가 날 테니까.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본단을 나섰다. 아버지와 나의 첫 마가촌 행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