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4)
절대회귀-84화(84/424)
제84회 제 단골집입니다.
아버지와 마가촌으로 들어섰다.
함께 저자를 걸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언제나 처음이 주는 감격이 있는 법이다.
“마가촌은 얼마 만에 나오신 겁니까?”
“꽤 됐지.”
말씀으로 봐서 이곳에 나와보신지도 오래되신 것 같았다.
“바깥바람 쐬시니까 좋죠?”
아버지에게 이 거리는 어떤 의미일까?
우린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길에 늘어선 상점들과 그 앞에 자리한 행상들, 오가는 행인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그곳을 거닐었다.
사람에게는 타고나는 기세란 것이 분명 있는 모양이다. 아버지는 내공을 일으키거나 기를 발출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걷는 길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다들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 앞을 막지 않고 옆으로 피하는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존재감이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 있었다.
비단과 옷을 함께 파는 포목점 앞에서 내가 발걸음을 멈췄다.
“아버지, 이렇게 나온 것도 기념인데 같이 무복 한 벌 맞추시죠?”
“의복 장인이 만든 무복만 수십 벌이다.”
“대신에 아들과 같이 맞춘 무복은 없으시잖아요? 딱 한 벌만 하시죠. 네?”
내가 먼저 포목점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못 이기는 척 나를 따라 들어왔다.
가게 내에는 온갖 비단과 천, 옷들이 쌓여 있었다.
아버지 마음이 변하시기 전에 서둘러 무복을 골랐다.
“저기 걸린 무복 어떻습니까?”
본교를 대표하는 천마혼이 그려진 무복이었다. 원래는 함부로 도용하면 안 되는 문양이었지만, 막는다고 안 팔리는 것이 아니라서 언젠가부터 기념품처럼 용인했다.
한데 아버지는 다른 곳을 가리켰다.
“저건 어떠냐?”
화사한 백의 무복이었다. 팔과 다리에 매화가 수놓아져서 누가 봐도 정파인들처럼 보이는 무복이었다.
“저걸로 하자고요?”
“다음에 중원에 놀러 가자면서? 그때 저런 걸 입고 갈 수는 없지 않으냐?”
“!”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중원에 함께 놀러 가자던 내 말을 기억해주시다니!
“저도 좋습니다. 저 무복으로 두 벌 주시오.”
놀랍게도 계산도 아버지가 했다.
“밥 산다면서? 옷은 내가 사주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내가 종이에 각각 포장된 두 벌의 무복을 잘 챙겼다.
뭐라 드리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하지 않았다. 괜한 너스레를 떨면 아버지가 어색한 이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따끔한 말로 받을 것 같아서였다. 그냥 지금은 이 기분과 상황을 즐기는 것이 상책이다.
“밥은 어디서 살 거냐?”
“저깁니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풍류주점으로 갔다.
아버지를 모신다면 이곳에서 제일 좋은 객잔이나 주점, 기루로 가야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일 좋아 봐야 마존들이 다니는 곳일 테고, 차라리 내게 의미 있는 곳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제 단골집입니다.”
활짝 웃으며 조춘배가 우릴 맞았다.
“오늘은 처음 뵙는 손님과 함께 오셨네요.”
“손님이 아니라 가족이라오.”
“가족은 처음이시네요. 그렇죠? 네? 가족요? 가족이라 하시면…….”
흠칫 놀란 조춘배가 아버지를 살폈다.
죽립을 써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풍기는 느낌이 젊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조춘배는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아니죠? 정말 아니죠?
난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했다.
맞소, 주인장이 생각하는 그 사람.
함께 온 사람이 천마임을 알아차린 조춘배는 사색이 되면서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었다. 이런 큰 재미를 어떻게 놓치겠는가?
그에게 아버지가 고른 요리를 주문했다.
“자, 맛있게 해주십시오.”
“네.”
주방으로 걸어가는 조춘배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덕분에 그는 내 전음도 처음으로 들었다.
―편하게 요리하시오. 설마 우리 아버지가 맛없다고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조춘배가 더욱 크게 휘청거리며 간신히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주점에서 술을 드셔본 적이 언제가 마지막이었습니까?”
“젊어서는 왔었는데.”
“교주가 되고 나서는 한 번도 안 오셨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답답하세요?”
“괜찮다.”
“하긴, 세상으로 나오면 더 답답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죽이고 싶은 놈들이 지천으로 널렸는데 다 못 죽이니.”
피식 웃는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아버지도 내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이제 술을 주고받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긴 이제 옷도 맞춰 입는 사이다.
“내공이 많이 늘었던데 어디서 얻었느냐?”
“풍천교주에게 혈신단을 얻었습니다.”
내 솔직한 대답에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그걸 줬어? 그 욕심 많은 사람이?”
“다들 제가 안쓰러워 보이나 봅니다. 저만 보면 영약을 그렇게 주고 싶어 해요.”
“행여나.”
아버지가 술을 마셨고 나도 술잔을 비웠다. 아버지는 뭐라 할 말이 많아 보이셨는데, 결국 이 말만 하셨다.
“네 것 뜯기지 않았으면 됐다.”
“걱정마십시오. 저도 아버지 닮아서 무공에 있어서 만큼은 욕심이 많습니다.”
그러는 사이 요리가 나왔다.
조춘배는 원래 주점을 활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양손에 요리를 가득 들고도 하나도 흘리지 않고 뛰어다니는 기술을 지녔다.
바닥에 술이 쏟아져 있어도 미끄러지지 않는 그였다. 등평도수(登萍渡水)를 쓰는 고수처럼 우아하게 뛰어다니다가, 다른 자리에서 비싼 요리를 주문하면 이형환위(移形換位)처럼 빠르게 달려가서 주문을 받는 그다.
한데 오늘의 조춘배는 달랐다. 살금살금, 행여 요리가 흐트러지기라도 할까 봐 기듯이 걸어왔다. 그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음식을 가지고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살수가 오는 줄 알았소.”
내 놀림에 제발 말 걸지 말아 달라는 애절한 얼굴로 걸어온 조춘배가 가져온 요리를 정중히 내려놓았다.
“더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그리고는 조춘배는 거의 질식할 것 같은 얼굴로 일 층으로 내려갔다.
아버지의 맛 평가를 훔쳐 들으려고 일 층 계단에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감히 천마를 엿들으려 했다간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랄 테니까.
아버지가 요리를 맛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나쁘지 않다.”
“나중에 주인장에게 직접 말씀해주십시오. 정말 좋아할 겁니다.”
“쓸데없는 소리.”
“그 쓸데없는 소리가 누군가에는 평생 추억이고 보람이 될 겁니다. 말 안 해주면 모른다니까요.”
아버지는 말없이 젓가락질을 할 뿐이었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풍천교주는 왜 그리 흔들어댄 거냐? 그거나 말해봐라.”
원래라면 ‘신물을 얻다가 나중에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라고 답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후계자로서 더 어울리는 대답을 했다.
“풍천교를 팔마존에게서 떼어내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성공은 했고?”
“지금으로선 성공한 듯 보입니다.”
“대가로 뭘 주기로 했느냐?”
“중원에 풍천교 지부 하나 열어주고 싶습니다. 아주 작게라도.”
“불가!”
“왜 안 됩니까?”
아버지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내가 왜 그들이 중원으로 나오는 것을 반대하는 줄 아느냐?”
“과거 혈교와 본교와의 역사 때문 아닙니까?”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거가 무슨 상관이라고. 그것 때문이 아니다.”
“그럼 팔마존과 손을 잡아서 그런 겁니까?”
“그건 일부러 손을 잡도록 내버려 둔 거다.”
마존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말이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풍천교를 치거나, 혹은 팔마존을 치거나. 서로 엮여 있으면 빌미를 만들기 쉬우니까.”
과연 아버지는 풍천교나 팔마존을 전혀 두려워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하면 왜 반대하십니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 크게 다가왔다.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풍천교의 중원진출은 우리뿐만 아니라 무림맹과 사도맹에게도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과거 혈교의 중원침략으로 큰 피해를 본 적이 있는 무림맹에서 풍천교의 진출을 혈교 부활로 몰아가기 시작하면, 큰 정치적인 파장이 올 수도 있었다.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씀은 다시 말하면 때는 내가 정하겠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아버지, 혹 마음속 깊은 곳에 무림일통을 꿈꾸고 계신 겁니까?’
화무기로 인해 그 꿈은 미처 못 이뤘지만, 아버지의 능력을 볼 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혈천도마는 내게 잠룡이라 하지만, 진짜 잠룡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일지도…….
넌지시 아버지를 떠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괜히 그랬다간 오늘의 이 좋은 자리가 박살이 날 수도 있기에 일단 참았다. 나중에라도 알아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어떻게?”
“풍천교주와는 인간적으로 얽혔으니 인간적으로 풀겠습니다.”
“인간적으로? 제일 어려운 방법인데?”
“대신 효과도 제일 좋겠죠. 걱정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자만심은 부리지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겠다는 욕심도 내지 않을 것이며 절대 믿지도 않겠습니다.”
반만 진실이었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고 싶지 않다. 모두를 의심하면서 천마가 된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하겠지만, 알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며 사람의 마음을 다 얻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거짓과 위선으로 서로를 대하지는 않을 정도의 마음은 얻을 것이며, 믿을 사람은 그래도 믿을 생각이다.
“풍천교주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잘 처리하겠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잘 먹었다. 내달에 바둑이나 두러 오너라.”
“네! 돌을 잘 갈아두셔야 할 겁니다!”
아버지가 손을 내밀자 내 옆에 놓아두었던 두 벌의 무복 중 한 벌이 휙 하고 날아갔다.
그걸 들고 아버지는 일 층으로 내려갔다.
무복을 함께 산 것보다, 그걸 계산한 것보다, 말씀드리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무복을 챙겨가는 모습이 더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아버지의 의외의 모습은 조춘배가 완성했다.
아버지가 지나가자 계산대 옆에 서 있던 조춘배가 허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냥 나가려던 아버지가 발걸음을 멈췄다.
“맛이 괜찮았네.”
너무 놀라고 감격해서 헉하고 서 있는 조춘배를 뒤로한 채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다.
멍하니 있던 조춘배가 뒤늦게 소리쳤다.
“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들러주십시오!”
아버지는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조춘배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계산대 아래 숨겨둔 술을 꺼내서 쭉 들이켰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장사를 할 때는 술을 마시지 않는 그였는데, 오늘은 어지간한 일을 넘어섰다.
이 층 난간에 기댄 채 그에게 물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이제 죽어도 원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풍류주점 주인으로 살겠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무림의 영웅으로 사셔야죠.”
“싫습니다. 저는 공자님 같은 분을 옆에서 지켜보는 이 삶에 만족합니다.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는 거로 충분합니다.”
“고수가 되어서 이런 삶을 살면 되잖습니까?”
“그럼 더 불행할 겁니다. 내가 고수인데도 참아야 하잖습니까?”
“그렇군요.”
조춘배가 술을 마시는 진귀한 장면을 보다가 나는 주점 바깥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누가 알겠는가? 자신이 지금 막 천마를 지나쳐 갔다는 것을.
회귀 전의 난 잘 보지 않았다.
아버지의 저 뒷모습도, 발그레한 얼굴로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저 조춘배도, 어딜 가는지 바쁘게 길을 걸어가는 저 사람들도. 나는 보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그들의 눈과 입을 쳐다보지 않았다. 잘 보지 않았기에 알지 못했고 알지 못했기에 이기지 못했다.
그래, 난 화무기에게 진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인생에게 진 거다. 무심한 내 인생에게.
“공자님, 술 더 드릴까요?”
조춘배가 저 아래에서 물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봐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요.”
풍류주점을 나선 나는 아버지가 걸었던 그 길을 그대로 걸어 교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