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6)
절대회귀-86화(86/424)
제86회 오랜만이야, 형.
아버지와 비무 후, 두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나는 비천검법이 십일성에 이르렀다. 아버지와 일화검존과의 비무를 통해 얻은 심득으로 다음 단계로 올라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한 단계였다.
마지막 단계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계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비무가 될 수도 있고, 진짜 실전 싸움이 될 수도 있으며, 일화검존과 꽃을 보다가, 혹은 혈천도마 옆에서 시화집을 읽다가, 아니면 이안과 달밤에 산책하다가 이룰 수도 있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십이성 대성의 영역이다.
이제 비천검법의 완성은 또 다른 내 운명으로 미뤄두고 시공이환술 수련에 열중했다.
무공을 익히다 보면 느낌이 올 때가 있다. 간질간질 온몸을 자극하며 ‘조금만 더’라고 무공이 속삭인다. 이때가 바로 다음 단계로 성장할 때다.
시공이환술은 그 자극이 계속 찾아왔다.
십여 일 전, 천천히 백 정도의 숫자를 세면 공간이 펼칠 수 있게끔 시간을 줄였다. 그 이후 제약이 풀어졌는지 시공이환술을 펼칠 때마다 시간이 줄어들었다.
무인과 무공 사이에 궁합이 있다면, 이 시공이환술은 나와 궁합이 너무나 잘 맞았다.
아마도 이 무공 자체가 수련 기간보다는 깨달음이 얼마나 깊으냐, 무공에 대한 재능이 얼마나 높으냐가 중요한 요인이라서 그럴 것이다. 그 두 가지만큼은 거의 최고 높은 경지에 올라선 나였으니까.
수련할수록 시간은 계속 줄어들었다.
백에서 구십구, 구십팔, 구십칠…….
나는 멈추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질주하는 마차에 올라탄 것처럼 미친 듯이 공간을 만들었다. 이러다 길을 잘못 들면 절벽에서 마차가 추락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나는 쉬지 않고 연마했다.
수련하고 또 수련하고.
그리고 드디어 마차는 마지막 역에 도착했다. 말은 쓰러지지 않았고, 나 역시 마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내 주위가 바뀌었다.
동시에 내 입에서 터져 나온 환호성.
“해냈다!”
드디어 시공이환술을 즉시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애초부터 내 무공이었다는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나는 지금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모래사장에 서 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태양은 뜨거웠다. 해변에는 잎이 큰 나무가 서 있었고 그 아래 그늘에 보기에도 편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저 멀리 갈매기가 날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꿈꾸는 나만의 공간.
완벽했다.
만들어내는 시간이 줄어든 만큼 이곳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내공 역시 줄어들었다.
난 편하게 의자에 기대있다가 옷을 벗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헤엄을 치다가 하늘을 보고 누웠다. 둥둥 떠가는 구름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완벽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행복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바깥에서의 시간보다 느리게 가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이곳에서 무공수련을 할 수 있다면? 완전히 시간을 멈추진 못해도, 하다못해 절반만이라도 느리게 가게 할 수만 있다면?
꿈같은 생각이지만, 애초에 이런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도 꿈 같은 일 아닌가?
풍천교주가 돌아오면 이 부분에 대해서 의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한참을 그렇게 바닷가에 누워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데 시공이환술 바깥에 누군가 도착한 것을 느꼈다.
내가 섭혼마존이나 풍천교주가 만든 공간에 들어갔을 때는 외부의 상황을 전혀 느낄 수 없었는데, 내가 직접 공간을 만드니 외부의 일을 알 수 있었다.
난 즉시 시공이환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공자님, 계십니까?”
문 앞에서 나를 부르고 있던 사람은 장호였다.
“나 여기 있네.”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자 장호가 깜짝 놀라서 돌아섰다.
“공자님? 어디 계셨습니까?”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해변가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잠시 은신술을 수련 중이었네. 한데 자네가 어쩐 일인가?”
“철방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만년한철을 맡겨 부탁한 물건의 제작을 마쳤다고요.”
“그럼 부탁 좀 하세. 가서 물건 찾아오고, 그날 모였던 사람들 다 불러주게.”
“알겠습니다.”
* * *
일곱 명이 원을 그린 채 서서, 탁자 위에 놓인 물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여섯 명은 이안과 서대룡, 장호, 혈천도마와 일화검존, 그리고 고월이었다.
탁자에 놓여 있는 것 중 부채를 먼저 들어서 고월에게 주었다.
“자네가 부탁한 부채라네. 내가 살펴보니 잘 만들어졌더군.”
“정말 감사합니다.”
“재료도 재료지만 본교 최고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점이 더 가치가 있네.”
“정말 만들어주실 줄 몰랐습니다.”
거기에 비수도 그날 모인 사람 숫자만큼 만들었기에, 비수도 그에게 주었다. 부채에 비수까지 받자 고월은 미안한 기색이었다.
“저는 두 개나 받네요.”
“애초에 자네가 아니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비수라네. 자네가 모두에게 선물하는 셈이지.”
“그럴 리가요. 풍천교주가 이 족쇄를 준 것은 공자님이셨는데요. 감사합니다. 크나큰 선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큰 선물이긴 했다.
만년한철 비수는 더없이 날카로우면서도 절대 부러지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값으로 따지기도 힘들었다. 제값에 팔 수만 있다면 몇 대가 놀고먹어도 되는 돈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는 선물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는 흑마검의 손잡이에서 극품천잠사를 풀었다. 부채를 채울 정도만 잘라서 고월에게 건넸다.
“극품천잠사라네. 그 부채에 이걸 붙이면 훌륭한 병장기가 될 거야.”
고월의 눈동자가 감격으로 떨렸다. 세 개의 선물은 정말 평생 받기 어려운 선물이었으니까.
“이 은혜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꼭 갚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난 현재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주는 것이지, 미래의 목숨이나 충성심을 담보로 선물하는 게 아니니까.”
고월에게 했지만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나머지 비수를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제 옆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네.”
“잘 쓰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다들 기뻐하며 비수를 받았다.
서대룡이 비수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잃어버릴까 봐 걱정됩니다.”
“무공수련을 더 열심히 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잃어버릴 확률이 줄어들 테니까. 수련이 힘들 때면 그 비수를 봐라.”
“네.”
내 말에 서대룡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비수는 각자에게 여러 의미를 지니게 될 거다.
그때 혈천도마는 괜히 고월에게 시비를 걸었다.
“저 비실비실한 선비 놈도 있는데, 네가 뭔 걱정이냐?”
그때 누군가 그곳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비실비실하기는 그쪽 제자가 더 한 것 아니오?”
들어선 사람은 바로 풍천교주였다.
내가 놀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벌써 돌아오신 겁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돌아온 것이다. 적어도 육 개월 이상은 걸려야 돌아올 줄 알았는데.
“내가 원래 성질이 급한 사람이라서.”
그러면서 고월을 힐끗 쳐다보았다. 든든한 지지자의 등장에 고월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디 가서 굶은 사람은 아닌가 보네. 딱 비수 받는 운명적인 날에 돌아오잖나? 내 비수 주게.”
풍천교주가 비수를 살폈다.
“정말 잘 만들어졌군. 이건 신물로 삼아도 될 것 같네. 내 것까지 챙겨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애초에 교주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족쇄를 풀어주셔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좋은 말로 그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는 말처럼 운명적인 날에 돌아왔다. 하지만 그 운명이 비수를 받는 날은 아니었다.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문자는 큰 키에 누가 봐도 잘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문양이 수놓아진 백의 장삼이 잘 어울리는 그는 나의 형 대공자 검무양(劍武洋)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검무양의 뒤를 따라 세 사람이 들어왔다.
먼저 들어선 사람은 마불이었고, 그 뒤로 노인과 청년이 함께 들어왔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를 발견한 검무양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우야, 잘 지냈느냐?”
맞다. 형은 이랬다.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바가 지나쳐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같은 편에게는 자만을 자신감으로 보이게 하는 재주도 있었다.
“나야 잘 있었지. 오랜만이야, 형.”
난 와락 형을 끌어안았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안아주었다. 내 반응에 형이 살짝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형, 내가 형 시신을 안으며 후회하지 않게 해줘. 아버지의 길을 걷지 않게 해줘.’
나는 안다. 고월은 그 결과가 형에게 달렸다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번 일은 내 노력에 달렸다.
‘그래서 난 노력할 거야. 형을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교를 떠날 때와는 내가 느낌이 사뭇 달랐는지 검무양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나 없는 동안 제법 명성을 날렸다던데?”
“호랑이 없는 골짜기에서 여우가 왕 노릇 했지.”
“형이 호랑이인데 어찌 아우가 여우가 될 수 있겠느냐? 내 앞에서만큼은 겸손 떨지 않아도 된다.”
그냥 봐선 정말 동생을 아끼는 우애 깊은 형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난 삶에서 형은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당시에는 그것이 괴롭힘인 줄 몰랐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형은 어떻게든 무림이나 권력에 관해 부정적인 심상을 심으려 노력했다.
무인끼리 싸우다 죽는 이야기, 심마에 빠져 미쳐버린 이야기, 마존들이 천마를 배신한 이야기.
내게 해주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잔인하고 부정적이었다. 혹여 내가 임독양맥(任督兩脈)이라도 타통하려치면, 혈맥이 터져 죽는 이야기로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난 타고난 굳건함으로 그것을 극복해 냈지만, 알게 모르게 내게 악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었다.
후계싸움에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예닐곱 먹은 어린 동생에게 할 짓은 아니었어, 형.
그때 마불이 끼어들며 말했다.
“이공자. 이제 대공자께서 돌아왔으니, 형님을 많이 도와야 하네. 이 험한 무림에 누가 있어 서로를 돌보겠나? 인간들은 배신을 밥 먹듯 하니 믿을 사람이 없다네.”
그러면서 마불은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애초에 그를 겨냥하고 꺼낸 말이었다. 검무양을 지지하다가 나에게 돌아선 혈천도마를 대놓고 비난하는 것이다.
대공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는 혈천도마는 그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도발적인 마불과는 달리 검무양은 혈천도마에게 정중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어르신.”
“덕분에 잘 지냈네. 이제 돌아오는 길인가?”
“네.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
“교주님은 뵈었나?”
“아버지는 이미 침소에 드셔서 뵙지 못했습니다. 낼 아침에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교주께서 좋아하시겠군.”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에 검무양이 넌지시 말했다.
“근래 어르신께서 동생 일을 많이 도와주신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원래 늙은이들 변덕이 더 심한 법이라네. 자네가 이해하게.”
“아닙니다. 동생 일이 곧 제 일이고 본교 일이지요. 형으로서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이해해주니 고맙네.”
검무양이 이번에는 일화검존에게 말했다.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형제 아니랄까 봐, 우리 대공자도 바람기가 다분하십니다.”
검무양이 장삼의 소맷자락에서 뭔가를 꺼내 일화검존에게 주었다.
“새외에서 어렵게 구한 화장품입니다. 중원 여인들이 쓰는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알려진 거니, 한 번 써보십시오.”
“고맙습니다, 대공자.”
어디 선물을 일화검존 것만 가져왔겠는가? 다른 마존들의 기분을 맞춰줄 것을 잔뜩 구해왔을 것이다.
이 짧은 인사에서도 이 무렵에 왜 형이 나를 앞지르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시의 나는 형이 이렇게 꼼꼼하게 마존들을 챙기고 있는 줄도 몰랐다. 나는 정말 나만 봤나 보다. 내 욕심만 보고 살았나 보다.
“장 군주, 늦었지만 군주가 되신 것 감축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인사는 거기까지였다. 이안과 서대룡에게는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형은 철저한 권위주의자였다. 윗사람만 확실히 자신의 사람을 만들면, 나머지 수하들은 자연스럽게 다 따라온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검무양이 두 마존과 인사를 마치자 이번에는 마불이 나섰다.
그는 풍천교주를 보자 대뜸 시비를 걸었다.
“본교 기둥에 꿀이라도 발라뒀나? 왜 자꾸 어슬렁거리지.”
물론 풍천교주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똥을 싸고 안 치우고 갔거든. 작고 귀여운 황금색 똥 말이야.”
대번에 마불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 사람이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사람 사이 가까워지는 것은 하세월이지만 멀어지는 것은 한순간임을 보여주듯, 가장 친했던 두 사람이 이렇게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두 사람이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자 검무양이 눈짓으로 뒤에 있던 두 사람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마불과 함께 들어왔던 노인과 청년이 인사를 하려고 앞으로 나섰다.
내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이들이 들어오고 내가 가장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사실, 이 순간을 수십 년이나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