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7)
절대회귀-87화(87/424)
제87회 하늘에서 피가 내리고.
두 사람 중 젊은 남자가 먼저 나서서 포권하며 인사했다.
“섬서에서 온 소태라고 합니다. 평소 신교를 우러러보는 마음이 깊었는데 우연히 마존님과 인연이 되어 이렇게 뵙게 되었습니다. 여기 이분은 제 사부이십니다.”
뒤이어 노인도 인사했다.
“섬서에서 온 종막이라 하오. 신교의 여러 영웅분들을 뵙게 되어서 반갑소이다.”
섬서에 소태와 종막이란 사제지간은 살지 않는다. 산 적도 없고, 앞으로도 살지 않을 거다.
이들의 진짜 정체는 운남쌍괴(雲南雙怪)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변장술의 달인으로 나이를 속이는 건 기본이었고, 때론 홀쭉이로, 때론 뚱보로, 장사치나 중, 심지어 여자로 변장하기도 했다.
실제로는 먼저 인사한 이 젊은 놈이 쌍괴 중 일괴(一怪)로 저기 노인으로 변장한 이괴(二怪)보다 나이가 더 많다.
이들은 온갖 사람들로 변장해서 사람들을 속였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상인들의 재산을 약탈했고, 단지 기분 나쁘게 생겼다는 이유로 처음 본 사람을 희롱하다 죽였다.
색욕도 강해 아름다운 여인이 눈에 띄면 반드시 겁탈했고, 그들을 막거나 말리는 사람은 모두 살해하는 악독한 자들이었다.
무림맹에서는 이들을 무림공적(武林公敵)으로 선포했지만, 끝내 잡지 못했다.
무공도 고강한 데다 변장술까지 달인이었으니 쉽게 잡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천수를 누렸다. 한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하늘은 무심하지 않다. 이미 죽었으니까.
다 이자들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놈들은 내 인생까지 망쳤다.
젊은 놈으로 분장한 일괴가 나서서 말했다.
“평소 존경하던 이공자님께서 한 수 가르쳐 주신다면 가문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회귀 전 인생에서도 이 무렵에 같은 일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멍청이였다. 멍청이 중에서도 상멍청이, 똥멍청이였다.
대체 왜 비무를 받아들인 것일까?
물론 그때는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 이자와 비무를 했다.
당시에도 이들은 마불을 따라왔었다. 마불은 본교의 마인들이 모인 연회 자리에서 저 운남쌍괴를 소개했고, 내가 거절하지 못하게 바람을 잡았다.
그는 내 심리를 제대로 이용했다. 내게 한 수 가르쳐 주란 권유 대신 일괴를 야단쳤다.
“귀하신 분께 무슨 비무신청인가? 자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네. 까닥 잘못하다가 이공자가 다치기라도 하면 자넨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야.”
그때도 지금처럼 저렇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술상을 엎게 하려면 ‘남자답게 엎어라’라고 할 게 아니라 ‘저 쫄보가 엎겠냐?’라고 하는 게 더 효과적이듯이, 남들의 이목에 목숨 걸던 스무 살 시절의 나는 저 얄팍한 도발에 넘어갔었다.
게다가 당시의 나는 신마쟁투에서 산공독에 당해 비무를 지고 어떻게든 명성을 만회하려고 눈에 불을 켜던 시절이었다.
자존감이 바닥일수록 상대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기 마련임을 나는 몸소 증명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설마 같은 또래에게 질까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우린 같은 또래가 아니었다.
난 팔이 부러지고 늑골에 금이 갔으며 얼굴에 피멍이 들어서 한동안 바깥출입을 못 했다.
문제는 몸의 상처가 아니었다. 또래에게 졌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무너졌고, 상대의 도발에 너무 쉽게 넘어갔다는 자괴감이 나를 괴롭혔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본교의 마인들은 나에게 실망했다. 외부에서 온 무인에게 흠씬 처맞고 털려버렸으니, 권위와 위신이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운남쌍괴는 그날로 달아나 버려 당시에는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지도 못했다.
바로 그놈들이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저들이 마불을 따라 내 방으로 들어왔을 때, 내가 얼마나 흥분했겠는가?
“그럼요, 이 귀한 몸 다치면 안 되죠. 요즘 신진 고수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냥 이렇게 빼면 된다. 자기 실력에 자신 있는 사람일수록 이렇게 여유롭게 대처한다. 물론 오늘 그러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래도 이렇게 간곡히 부탁하는데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요?”
나는 궁금했다. 형은 마불과 어울리는 저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고는 있을까? 형, 이건 알아도 문제, 몰라도 문제야.
“비무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연 명성이 자자하신 이공자이십니다.”
“한데 아까부터 자꾸 내 얼굴에 금가루를 뿌려대는데, 내 명성에 대해 들은 것이 있소? 최근에 내가 한 일 중에 아는 것이 있으면 하나만 말해보시오.”
내가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일괴는 당황했다.
“제가 머리가 나빠서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배운 것이 없어서 예의도 없고요. 이공자께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럴 줄 알았소. 초면에 대뜸 비무부터 하자는 걸 보니 예의는 애초에 없고, 이 병신이 내 성격이나 실력도 모르면서 왜 이러나 싶은 걸 보니 머리도 확실히 나쁜 것 같고. 그래도 자신을 잘 아니 그나마 다행이오.”
내 조롱에 쌍괴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감출 수 없는 악심을 애써 억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가 나쁘니 몸으로라도 한판 즐겨보시죠, 이공자.”
“그럽시다.”
그렇게 우린 밖으로 나가 마당에 마주 섰다.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따라 나왔다.
“권장(拳掌)을 쓰시오?”
“그렇습니다.”
“나는 검법을 사용하니 내 검에 그 두 손이 잘리지 않기를 조심하시오.”
“이공자도 조심하셔야 할 거요. 앞으로 그 검, 왼손으로 들어야 할 수도 있을 테니.”
그가 눈에 힘을 주며 긴장감을 조성했을 때, 혈천도마가 나섰다.
“나는 먼저 가보겠네. 나이 드니 저녁잠이 많아져서.”
그는 비무 결과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고, 굳이 대공자와 내가 함께 있는 자리에 오래 있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자 일화검존도 따라나섰다.
“저도 이만 가겠습니다. 잠을 못 자면 피부가 푸석푸석해져서.”
두 사람이 작별을 고하자 검무양이 그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차후에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형이 하고 싶었던 질문은 마불이 대신했다.
“이공자가 걱정되지 않으신가 보오.”
혈천도마는 나를 힐끗 쳐다보지도 않고 한마디 툭 내던지며 걸어갔다.
“걱정은 개뿔.”
그 뒤를 일화검존이 따라 걸었다. 적어도 이때만큼은 한마음인 그들이었다.
이런 싸움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구설수는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좋다는 것쯤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고, 무엇보다 날 걱정하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놀랍게도 장호도 따라나섰다.
“그럼 저도 용무가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눈치 빠른 곰이 떠나려 하자 꼬리 아홉 달린 여우도 따라나섰다.
“그럼 저도 이만.”
내가 이안에게 말했다.
“이안, 너도 가?”
“네. 가서 수련해야 해요.”
“딴 사람은 몰라도 넌 남아서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너 변했어!”
“그럼요, 변했죠. 누가 옆에서 변해야 한다고, 변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시는 바람에요.”
그녀가 걸어가다 서대룡을 돌아보았다.
“안 가세요?”
“저는 남아서 보려고요. 무공수련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러자 저 멀리 걸어가던 혈천도마가 그에게 소리쳤다.
“네가 봐서 도움 될 것 하나도 없다. 가서 잠이나 쳐 자라.”
사부가 그러는데 그가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서대룡이 날 보면서 씩 웃었다.
“그러시다네요. 귀가 어찌나 밝으신지.”
서대룡마저 떠나자 풍천교주도 움직였다.
“다 가는데 남아 있으면 너무 한가한 사람처럼 보이잖아?”
그렇게 다들 한마디씩 남기고 떠나버렸다.
“다들 너무하십니다!”
내 공허한 외침에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가는 이유야 각기 다르겠지만 나에 대한 존경심이 담긴 행동이었다. 형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우린 이 정도로 이공자를 믿는다.
떠나는 것으로, 나름 세련되다면 세련된 방식으로 나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준 것이다.
이제 그곳에는 같이 지내는 고월만 남았다.
“자네야말로 진정한 내 충신일세.”
“저도 먼저 들어가서 자겠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던 차였습니다. 제가 싸움 구경을 안 좋아해서요.”
“안 되네. 그래도 한 사람은 봐줘야지.”
“그럼 빨리 끝내주십시오.”
“그러지.”
이 모습을 모두 놀라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철저하게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는지 운남쌍괴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검무양조차 이 상황이 의외라는 표정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일괴가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구경꾼들이 가서 김은 빠졌지만 그래도 내 주먹에 힘은 빠지지 않았으니 한판 붙어봅시다.”
혹시라도 비무가 취소될까 봐 그는 마음이 급했다.
걱정마시라, 악인이여.
“그럽시다. 오래 기다린 싸움이니.”
너희는 상상조차 못 할 만큼 오래 기다렸으니.
내가 비무를 받아들인 것은 내 복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단죄를 위해서였다.
내가 말한 절대악에 이자들도 포함되었으니까.
너무 강해서 절대악이라 불리는 자들도 있지만, 이들처럼 교묘하고 사악해서 절대악인 경우도 있다.
변장술에 능해 어디론가 숨어버리면 잡을 길이 막막한 놈들. 남의 목숨은 파리 목숨처럼 여기지만, 자기 목숨은 귀하디귀해 어떻게든 부지하려는 놈들.
그래서 늙어 죽을 때까지 잘 살다가 가는, 바로 이런 놈들도 절대악이다.
하늘도 자신이 죽었다는 유행어가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이들을 내 앞으로 보낸 걸 보면.
“자, 이공자라고 봐주지 않을 테니 조심하시오!”
일괴는 첫수부터 인정사정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를 패고 사라지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으니까.
마불에게 얼마나 받았을까? 본교까지 와서 나를 상대하는 일이니, 상당히 많이 받았을 텐데.
날아든 주먹을 피하며 가볍게 그의 팔목을 잡았다.
설마 첫수에 손목이 잡힐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놈은 경악했다.
놈이 뿌리치려 했지만, 꽉 잡힌 손이 꼼짝도 안 하던 바로 그때!
설마? 하며 놈이 두 눈을 부릅뜨던 그 순간, 내 검이 벼락처럼 빠르게 뽑혀 나왔다.
서걱!
단 일수에 놈의 손목이 잘려 나갔다.
“윽!”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고, 그가 본능적으로 손목을 지혈하려 했다.
쉬이이익! 서걱!
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다른 쪽 손목도 잘라버렸다.
“으아아아아아악!”
그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잘린 양손을 휘저으며 분수처럼 피를 뿌려댔다.
주위로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피하지 않았고, 형도 피하지 않았다.
후드득 쏟아지는 핏물 속에서 우린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때 이괴가 내 등을 기습했다. 나를 제압한 후 일괴를 치료하려는 속셈이리라. 돌아서서 막으려다가 형이 검을 뽑는 것을 보고는 그냥 있었다.
쇄애애애애애액!
순식간에 발출된 거친 검기가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날 스치듯 지나간 검기가 뒤에서 달려들던 이괴의 몸을 싹둑 양단했다.
순식간에 그곳은 피바다가 되었다.
난 마불에게 물었다.
“대체 뭘 기대하신 겁니까?”
많은 것이 담긴 질문이었다. 형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지만, 당신은 나에 대해서 다 듣고 봤으면서.
저 운남쌍괴가 날 패서 모욕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신 거요? 과거처럼 내가 저들에게 당해서 방구석에 처박힐 줄 알았던 거요?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일괴의 얼굴에서 면피를 벗겨냈다.
찌이이이익.
그러자 안에 중년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너는 누구냐?”
형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그의 정체를 밝히려 했다.
일괴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볼 뿐 말하지 않았다.
“발목까지 잘라주마.”
발목을 자르려 검을 치켜들자 놈이 소리쳤다.
“……우린 운남쌍괴다.”
퍽!
그 순간 일괴의 머리통이 터졌다. 핏물이 흐르는 주위로 황금빛이 서리다가 사라졌다. 그를 죽인 것은 마불이었다.
마불의 두 눈이 황금빛으로 일렁거렸고 엄청난 기운이 주위를 압박했다. 풍천교주와 말싸움이나 하던 마불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매서운 기세를 내뿜으며 차갑게 말했다.
“뭘 기대했느냐고 물었나? 자네 형에게 현실을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네. 운남쌍괴를 단 일 수에 베어버리는 이런 사람이 당신 경쟁자라고. 교주가 당신에게는 안 준 흑마검으로 저놈들을 베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네. 이게 지금 당신이 맞닥뜨린 현실이라고.”
내게 하는 말이 아니다. 형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 사람 마불! 확실히 악한 사람이지만, 형을 위한 마음만은 진짜다.
내 시선이 검무양을 향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뒤집어쓴 핏물이 그의 얼굴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검무양이 담담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덕분에.”
“이렇게 네 무공이 향상된 것을 보니 기쁘다. 본교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난 무공이 향상되었는데, 형은 연기가 늘었네.”
“무슨 뜻이냐?”
“형은 아무나 데리고 다니는 사람 아니잖아?”
“저자들이 운남쌍괴인 줄 알았느냐고 묻는 거라면 난 몰랐다. 내일 아침에 아버지께 인사드릴 때 보자.”
그렇게 형과 마불도 그곳을 떠났다. 이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모습에 나는 형을 인정했다. 과거에 혈천도마가 왜 그를 지지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럴 만하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운남쌍괴의 시체를 향해 걸어갔다. 손쉽게 죽여버린 것은 놈들의 죽음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고 싶지 않아서다. 이런 자들에겐 유언 한 마디도 허용하는 것도 아깝다. 뇌옥에서 주는 식은 밥도 아깝다. 벌레 죽이듯 죽이고 존재 자체도 잊어버리는 것이 최고의 응징.
두 시체의 품을 뒤져서 전표를 찾아냈다. 십만 냥짜리 전표를 각각 한 장씩 지니고 있었다.
“알아두게. 이십만 냥이면 천마신교 이공자를 패줄 수 있다네.”
내 농담에 고월이 옅게 웃었다. 나는 전표를 그에게 주었다.
“자네가 진행하는 일에 보태 쓰게. 혹 이자들 품에서 나와 더러운 돈이라 생각하시는가?”
“돈에는 이름표가 없는 법입니다. 그때그때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겠지요.”
고월은 나를 후회하게 하지 않는다. 이런 군사기에 그렇게 공을 들여서 데려온 거다.
“시체는 제가 치우겠습니다. 들어가셔서 피부터 닦으십시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형이 돌아오니, 당장 하늘에서 혈우(血雨)가 내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