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8)
절대회귀-88화(88/424)
제88회 탯줄이 끊어질 때부터.
피를 씻어낸 검무양은 동경 앞에 서 있었고, 시비가 새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는 맨몸에 도검을 막아주는 얇은 보의를 입었다. 그 위에 다시 조금 더 두툼한 보의를 겹쳐 입었다. 죽음에 대한 강박증을 적어도 마불에게는 그대로 내보였다.
마불은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운남쌍괴를 끌어들인 일에 대해 역정을 낼 법도 한데, 검무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불은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공자는…….”
원래는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을 바꿨다.
“……어떤 사람입니까?”
동경 속에서 검무양이 대답했다.
“동생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까 보니 잘 모르겠더군요.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옛날 생각은 잊으셔야 합니다!”
갑자기 마불이 목청을 높이는 바람에 옷깃을 만져주던 시비가 손톱으로 검무양의 목을 긁었다.
“앗! 죄송합니다, 살려주십시오.”
시비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식었다.
“이깟 일로 내가 너를 왜 죽이겠느냐?”
검무양은 부드럽게 말했지만, 마불이 차갑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안 죽일 수도 없지 않으냐? 천마가 되실 분의 옥체에 상처를 낸 시비를 살려뒀다? 남들이 들으면 얼마나 우습게 보겠느냐?”
시비가 간절히 애원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검무양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다. 그만 나가보거라.”
“감사합니다, 공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시비가 방을 나갔다.
“아랫사람의 실수를 쉽게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됩니다. 벌이라도 주셔야 합니다.”
그러자 검무양이 불쑥 물었다.
“동생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습니까?”
“네, 그랬지요.”
“똑같이 이런 일이 있으면 놀란 시비에게 밥을 사줄 아이입니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따뜻한 아이였지요.”
“그렇다고 방심해선 안 됩니다.”
“방심하자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아까 무극이 사람들 보지 않았습니까?”
마불을 향하던 동경 속 시선이 검무양 자신을 향했다.
“솔직히 조금 부러웠습니다.”
마불은 가끔 이 검무양이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석하고 냉정하게 일 처리를 하다가도 이렇게 속마음을 불쑥 드러낼 때가 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사이 검무양이 걸어와서 마불 앞에 마주 앉았다. 그가 식은 차를 찻잔에 부어 마셨다.
“마존께서는 뭐가 그리 걱정이십니까?”
“이공자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엇보다 혈천도마는 교활한 늙은이입니다. 그가 이공자를 선택했다는 것은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시비에게 밥을 사줘서든,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든지요.”
그러자 검무양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저는 그 답이 아버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마불은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버지는 제가 없는 동안 무극이를 밀어주셨습니다. 흑마검을 내리셨고, 황천각주의 자리에 앉히셨지요. 힘을 얻은 무극이를 내가 어떻게 상대하나 시험하려는 겁니다. 후계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시험이라 생각합니다.”
순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내 마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이공자가 튀어 오르는 과정에서 섭혼마존이 죽었소이다. 사인이 주화입마라고 하지만 석연찮은 점이 많아요.”
처음에는 검무극의 소행이 아니라는 풍천교주의 말을 믿었지만, 이제는 믿지 않았다.
“이공자 짓일 수도 있소이다. 한데도 교주님의 시험이라 생각하시오? 교주님은 섭혼을 본교의 주력으로 아끼셨소.”
“아버지도 거기까진 예상하지 못하셨겠지요. 무극이는 아버지의 예상을 넘어서는 역량을 지닌 겁니다.”
“그럼 정말 이공자가 섭혼마존을 죽인 겁니까?”
그러자 검무양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마존께서는 섭혼마존을 죽일 수 있습니까?”
“나는 당연히…… 죽일 수 있소!”
잠깐의 망설임이 섭혼마존이 어떤 실력인지 말해준다. 마불도 섭혼마존만큼은 자신이 없던 상대였다.
“맞습니다. 마불께서는 죽일 수 있었겠지요. 대신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검무양은 마불의 체면을 살려준 후 원래 하려던 말을 이어 나갔다.
“저도, 무극이도 지금의 무공실력으론 섭혼마존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그게 누굽니까?”
직접 생각해 보라는 듯 검무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누구일지를 떠올리던 마불이 흠칫거리며 소리쳤다.
“설마? 풍천교주입니까?”
“맞습니다. 그의 도움이라면 섭혼마존을 죽일 수도 있었겠지요.”
마불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풍천교주가 뭐 때문에요?”
“중원진출을 위해서죠. 결국 섭혼마존의 제자를 자신의 제자로 들이지 않았습니까?”
“아!”
마불은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식의 의심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풍천교주가 배후에 있었다?
“그래 놓고 뻔뻔하게 시체를 조사하러 왔다? 이 말씀이시군요.”
최근 풍천교주와 사이가 나빠진 마불이었다. 의심과 분노가 객관적인 판단을 방해했다.
“풍천교주는 마존들께서 자신을 부를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가 당당하게 본교에 입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지요.”
마불을 붙잡는 마지막 의심은 이것이었다.
“허나 풍천교주는 그럴만한 배짱이 없는 잡니다. 섭혼마존을 죽였다는 것이 들통나면 풍천교 전체가 멸문을 당할 텐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항상 해주신 말씀이 있지요. 함부로 누군가를 안다고 단정하지 마라.”
마불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아는 풍천교주는 이런 큰일을 저지를 위인이 못 되었다. 하지만 검무양의 말은 딱 맞아떨어졌다. 거기에 또 다른 이유가 더해졌다.
“풍천교주의 군사가 무극이에게 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말씀하셨다시피 그 치밀하신 혈천도마께서 그냥 손을 잡았겠습니까? 이런 배경이 있었으니 잡았겠지요.”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젠장! 내 발로 가서 흉수를 끌어들였다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저는 이 상황을 역이용해서 마존들을 장악할 겁니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요?”
마불은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검무양은 대수롭지 않게 언급했다.
“무극이를 죽일 거냐고요? 아뇨, 죽이지 않을 겁니다. 동생을 죽이는 형을 아버지가 어떻게 보겠습니까?”
마불은 느꼈다. 검무극을 죽이지 않는 이유는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어서라는 것을.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무극이에게 붙은 자들을 모두 내 편으로 끌어들일 겁니다. 무극이는 자존심이 강해서 자기 사람이 자신에게서 돌아서면 스스로 교를 떠날 겁니다. 아까 보셨죠? 무극이의 비무를 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진짜로 무극이를 떠나게 할 겁니다. 그래도 웃고 농담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죠.”
“이공자를 살려두면 후환이 될 겁니다.”
“그렇게 떠나도 본교에 위기가 발생하면 우릴 구하러 오면 구하러 오지, 죽이러 올 녀석은 아닙니다. 그게 녀석의 최대 약점이지요.”
검무양은 다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속 자신을 응시하며 그는 차분히 말했다.
“천마전 태사의는 이 무림에서 가장 단단한 자리입니다. 무극이 같은 물렁물렁한 녀석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앉아서도 안 되고요.”
* * *
다음 날 아침 천마전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서 형을 만났다.
“이렇게 나란히 천마전에 들어간 것도 오랜만이구나.”
“그러네.”
우린 함께 걸음을 옮겼다.
“긴장돼?”
“별로.”
하지만 형은 긴장하고 있었다.
아버지 앞에서는 유난히 굳어지는 그였다. 어려서부터 형은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어 했다.
어렸을 적 언젠가 형은 아버지에게 ‘우리 장남’이란 말을 딱 한 번 들었었는데, 며칠이 아니라 몇 년을 그 일을 자랑했다.
지금의 내가 화무기에게 사로잡혀 있다면, 형은 아버지에게 사로잡혀 있으리라.
형과 내가 천마전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버지와 총군사 사마명이 함께 있었다. 우린 나란히 피의 길을 걸었다. 사방에 세워진 악귀상들이 형의 귀환을, 우리들의 입장을 차갑고도 묘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형이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잘 돌아왔다.”
나는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형을 향한 얼굴에 반가움이 담겼다. 반면 형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떨림이 느껴졌다.
“장남이 돌아오니까 좋으신가 봅니다.”
내 말에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같이 마가촌을 걸을 때의 아버지와 지금의 아버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좀 더 무뚝뚝해진 아버지를 나는 이해한다.
회귀하기 전 이 무렵의 아버지는 이미 후계자로 형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 회귀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뒤흔들었지만, 저 마음에 먼저 들어가 있던 사람은 형이었다.
형을 대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결코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한다. 내 궁극의 적은 아버지도, 형도 아니란 것을.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아버지의 물음에 형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마지막 관문까지 모두 넘어섰습니다.”
그 말에 아버지의 표정이 밝아졌다. 형은 변방에 잡무를 맡아 간 것이 아니었다.
마도구벽(魔道九壁).
마도구벽은 변방에 숨겨진 본교의 비밀수련장이었다.
아버지는 형에게 그곳을 개방했다. 마도구벽 역시 소천동과 마찬가지로 천마의 허락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마도구벽을 넘어서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앞서 내가 통과한 소천동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관문이었다. 다만 마도구벽은 중간에 포기하고 나올 수 있었다. 안전하지만 더 어려운 관문이라 볼 수 있었다.
사마명도 크게 기뻐했다.
“감축드립니다, 대공자. 마도구벽을 통과하다니. 정말 피는 못 속이는 것 같습니다.”
형도 아버지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무공 재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나는 모른 척 물었다.
“어딜 통과한 겁니까?”
그러자 사마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공자께서는 마도구벽을 통과하셨습니다.”
나는 와락 형을 안아주었다.
“대단해, 형!”
내 행동에 아버지와 사마명이 흠칫 놀랐다. 오히려 당사자인 형은 내 변화를 경험했기에 순순히 내 축하를 받아주었다.
“고맙다.”
“그럼 비천검법의 대성도 이뤘겠네?”
둘만 있었다면 대답하지 않았겠지만, 아버지가 계신 자리였기에 형은 솔직히 대답했다. 물론 내게 하지 않았고 아버지에게 했다.
“아버지, 마도구벽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비천검법의 대성도 이뤘습니다.”
“축하한다.”
“모두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시선이 형과 나를 향했다.
과연 아버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감축드립니다, 대공자.”
“감사합니다, 군사님.”
“축하해, 형.”
“고맙다.”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 시선이 아버지를 향했다.
“우리에게는 탯줄이 싹둑 끊어지는 것이 후계자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습니다. 그런 인생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아버지, 이번에는 형과 선의의 경쟁을 해 보려고 합니다. 형 생각은 어때?”
형은 내게 대답하는 대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없던 사이 무극이가 이렇게 큰 줄 몰랐습니다. 정말 철이 다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말없이 내려다보고만 계셨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이 순간에도 누가 후계자로 어울릴지 점수를 매기고 계실까?
아버지는 내가 말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선의의 경쟁? 나와 둘이 있었다면 딱 죽기 좋은 싸구려 감성이라고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굳이 말한 이유는 나도 아버지께 말씀드린 것이다. 형을 안고 가려고 노력해보겠다고.
“이만들 돌아가서 쉬어라.”
형과 나는 아버지에게 인사드리고 피의 길을 걸어서 천마전을 나왔다.
입구에서 내가 물었다.
“형은 왜 천마가 되고 싶어?”
그러자 형이 불쑥 말했다.
“천마가 못 되면 죽으니까.”
형이라면 다른 대답을 할 것 같았는데, 참 의외의 대답이었다.
“후계 싸움에서 지면 죽으려나?”
“지금까지는 다 죽었지.”
“우린 안 죽이면 안 되나? 검무양, 검무극 형제, 마교 역사에 길이 남을 형제애를 발휘하다.”
“다른 형제들은 그런 마음이 없었겠냐? 결국…… 인간은 다 배신하니까.”
“우린 안 하면 되잖아?”
내 말에 피식 웃더니 검무양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저만치 걸어가던 형에게 내가 소리치며 말했다.
“나 진심이었어. 선의의 경쟁 하자는 것.”
형은 발걸음을 멈추고 날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내 마음에 선의라는 게 있는지부터 물어봤어야지. 넌 있냐?”
“난 있어.”
“그럼 이 싸움, 내가 유리하게 시작하겠네.”
다시 걸음을 옮기는 형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비로소 피식 웃었다.
그래, 이 일이 어찌 쉽겠는가? 내게 호의를 가진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일도 그렇게나 어려운 일인데.
‘그래도 형, 우린 해내야 해. 우리 등을 찌를 비수의 이름은 형제애가 아니라 화무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