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9)
절대회귀-9화(9/424)
제9회 내가 생각하는 마도는.
다음 날, 이안이 당황한 얼굴로 날 찾았다.
“저 어제 어떻게 돌아왔죠?”
“네가 날 업고 돌아왔어. 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안 나.”
그러자 이안의 볼이 붉어졌다.
“거짓말 마세요. 저, 그 정도로 취하진 않았어요. 많이 무거웠죠? 죄송해요, 도련님.”
“가벼웠다면 거짓말이고. 죄송할 정도로 무겁진 않았어. 이 팔뚝 보라니까!”
“어휴, 안 그래도 가는 팔뚝이 더 가늘어지셨네.”
“울퉁불퉁한 근육을 똑바로 보라고!”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은 후에 이안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했어요, 도련님.”
“다음에 또 마시자.”
“네, 도련님.”
돌아서려던 그녀가 다시 물었다.
“저 혹시라도 말실수라도 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솔직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서요.”
“실수 안 했으니까 걱정 마. 아, 혹시 다음에라도 실수하면 사면권(赦免權)을 써.”
“사면권요? 그게 뭐죠?”
“내게 실수나 잘못을 해도 용서받는 권리야.”
“저 주셨어요? 안 받았는데요?”
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
이안이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자, 지금 발급했어.”
“기왕 주시는 것 통 크게 열 장은 안 되나요? 평생 도련님 따라다닐 텐데, 한 장으로 부족하지 않겠어요?”
“안 돼! 딱 한 장이야. 그러니 아껴 써!”
“네! 도련님!”
활짝 웃는 그녀의 눈이 살집 속에 파묻혀 사라졌다.
‘살면서 용서받을 사람이 나면 나지, 어디 너겠느냐? 사면권은 네가 내게 한 오십 장 발급해줘야 하는데…….’
* * *
그날 밤, 홀로 앉아서 기 발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세 곳을 탐지하던 중 좌측으로 날아가던 기운이 한 사람을 감지했다.
나는 요즘 기를 통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기를 보내다가 사람을 발견하면 우선 상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것으로 시작한다. 키는 얼마나 크며, 무기는 뭘 쓰고, 무공 수위는 어느 정도 되는지.
이번 역시 상대를 살펴보려던 바로 그때.
상대가 슬쩍 옆으로 피했다.
우연이겠지 싶어 그를 향해 기운을 내보냈다. 하지만 상대는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움직여서 내 기운을 피했다.
‘설마 알고 피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 실처럼 얇고 은밀한 기운은 상대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한데 상대는 마치 내 기운을 느끼기라도 하듯, 요리조리 피하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지?
상대가 궁금했다. 나는 계속 기를 발출하면서 방에서 나갔다.
움직이면서도 기를 발출하는 연습을 한다. 물론 가만히 있으면서 발출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심력 소모를 해야 했지만, 실전에서는 움직이면서 기를 발출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상대가 뒤로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잡힐 듯 말 듯 달아나는 그를 뒤쫓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내전의 정자였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내 기운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그럼 그렇지. 다른 누군가 제 기운을 감지한 줄 알고 긴장했습니다.”
“뭐 대단한 기운이라고. 저기 담장 아래에서 졸고 있던 개도 알아차릴 거다.”
“개야 원래 감이 좋은 녀석들 아닙니까? 한데 제 거처에는 어떤 일이십니까?”
“지나는 길이었다.”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분명 나를 찾아왔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우연히라도 뵙게 되는 것을 보니 과연 우린 운명적인 관계가 틀림없습니다.”
“주접은 거기까지.”
“네!”
나는 입을 닫고 조용히 아버지가 바라보는 밤하늘에 시선을 보탰다.
잠시 후에 내가 물었다.
“후계자는 언제 정하실 겁니까?”
“백 년 후에. 너희들은 아직 멀었다.”
“백 일 후로 하시죠. 저는 다 온 것 같습니다만.”
“그랬다면 혈천도마가 널 찾아가지 않았겠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둘만의 만남이었는데 아버지는 알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나를 주시하고 계신다는 의미. 하긴, 내가 산공독에 당한 것도 알고 계셨으니까.
“널 만나고 곧장 혈천도마가 날 찾아왔다.”
“뭐라고 하던가요?”
“네게 벌을 내리길 바랐다.”
“네?”
생각지 못한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혈천도마가 그 길로 아버지를 찾아가서 벌을 내려달라고 했다고?
“뜻밖이었지. 제자가 죽은 정도로 날 찾아와서 그런 요구를 할 사람이 아닌데.”
“대체 왜 그랬을까요?”
모른 척했지만 나는 혈천도마의 속마음을 짐작했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시험하려는 거다. 아버지가 정말 벌을 내릴지, 벌을 내린다면 어떤 벌을 내릴지. 아버지가 나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거다.
“그래서 벌을 내릴 생각이다.”
“제게 벌을 내릴 명분은 없습니다. 그 제자 놈은 죽어 마땅한 놈입니다.”
“명분은 만들면 그뿐이다.”
나는 검을 뽑아서 바닥에 선을 길게 그었다.
그리고 십분 지 일쯤 되는 곳을 그으며 말했다.
“혈천도마가 제게 말했습니다. 이쪽 긴 쪽이 아버지가 자신을 생각하는 크기라고요. 혹시 그 명분은 이 길이에서 나왔습니까?”
아버지는 대답 대신 사냥터에서 내가 질문했던 내용을 되물었다.
“마존들 중에 누굴 가장 믿느냐고 물었더냐?”
“네.”
아버지는 그에 대한 답을 지금 하셨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대답으로 혈천도마가 그은 선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도 동시에 대답했음을.
“너는 어느 쪽이냐? 사람을 믿는 쪽이냐, 믿지 않는 쪽이냐?”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어떤 사람인지 네가 어떻게 알 수 있지?”
“지내다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멍청한 생각이다.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아무리 투명해 보이는 사람이 네 옆에 있을지라도, 절대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문득 이안이 떠올랐다. 그녀에 대해 잘 안다 생각했는데, 자꾸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이치.
“명심하겠습니다.”
“본교의 기강을 잡아야 한다고 했느냐?”
“네.”
“부정부패를 잡아야 한다는 헛소리 집어치우고. 솔직한 네 생각을 말해봐라.”
“정말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언제는 거짓으로 고했느냐?”
“그렇진 않습니다만. 이번 대답만큼은 무례한 대답이 될 것 같아서요.”
“말해라.”
“언젠가부터 우린…… 마도(魔道)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눈 아래가 파르르 떨렸다. 적어도 아버지 앞에서는 할 말이 아니었으니까.
“네가 생각하는 마도는 무엇이냐?”
“제가 생각하는 마도는…….”
잠시 사이를 두고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생각을 밝혔다.
“절대악을 때려잡는 본교만의 신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아버지는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돌아보았다.
“……절대악을 때려잡는 본교의 신념이라?”
“전 우리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정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무엇이냐?”
“절대악입니다.”
분명 지금부터 하는 말은 아버지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담담히 내 생각을 아버지에게 전했다.
“세상에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겁하고 악랄하며 지독한 악이 존재합니다. 악마조차 혀를 차며 돌아앉을 절대악말입니다. 전 정파가 내세우는 정의와 협이 작은 악을 제압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절대악을 감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파는 태생적으로 근간에 용서를 품고 있기 때문이죠. 인간을 아끼는 마음을 품는 한, 인간임을 포기한 채 미쳐 날뛰는 악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아버지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말에 이렇게 집중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그 절대악이 우리 아니었더냐?
―아닙니다, 아버지. 제 세상의 천마신교는 절대악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아니게 할 겁니다.
내 말은 계속 이어졌다.
“비열하고 악랄한 악을 더 비열하고 더 악랄하게 없애버릴 수 있는 무림의 유일한 존재, 전 여기서 우리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선인지 악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때론 선의 얼굴로, 때론 악의 얼굴로. 정파가 감당하지 못한 대악(大惡)이 우리 앞에 무릎 꿇고 벌벌 떨 때, 저는 비로소 진정한 마도가 세워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무림은 본교의 위엄 앞에 진정 고개를 숙일 겁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겁니다. 오직 천마신교만이 무림을 구할 수 있다면서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마도입니다.”
단언하건대 아버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으셨을 것이다.
이 생각은 본교에서 배웠거나 깨달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평생 중원을 헤매면서 나 스스로 느낀 것이다.
“마도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 우린 오래 가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 우린 우릴 벌해야 합니다.”
감정을 감추는 데 능숙한 아버지조차 지금, 이 순간의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거짓말을 확인하기 위해 얼굴에 지풍을 날리는 아버지다. 하지만 이 순간 아버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지풍이 날아와도 열 번은 더 날아왔을 이야기가 펼쳐졌음에도.
아버지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보다 긴 인생을 살아보았지만, 지금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느낀다.
회귀한 지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아버지도, 나도 운명이 바뀌고 있음을. 우리는 다른 미래를 향해 방향을 틀기 시작했음을.
이윽고 아버지가 긴 침묵을 깼다.
“더 떨 건방이 남았느냐?”
“아뇨, 오늘은 없습니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혈천도마가 왜 나를 찾아와서 너를 벌주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왜입니까?”
확신에 찬 아버지의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네게서 뭔가를 읽었다. 그래서 나를 통해서 너를 시험하려는 거다.”
“후계자가 될 가능성을 읽었나 보네요.”
“본교를 말아먹을 위험일지도 모르지.”
“그게 어느 쪽이든…… 해골바가지 같은 늙은이가 눈치는 있네요.”
잠시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는 뭔가 결심이 섰다는 듯 성큼성큼 정자를 걸어 나갔다.
“따라오너라.”
* * *
아버지는 나를 천마전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데려가셨다. 그곳은 나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석동(石洞) 위에 자그맣게 걸린 현판.
소천동(小天洞).
나는 깜짝 놀라 아버지에게 소리쳤다.
“설마 이곳에 들어가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이곳은 천마가 될 후기지수들을 위한 곳으로 일종의 수련동이다.
보통 천마의 제자나 자식들이 시험에 들 때 들어간다.
수련동이라고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 갈 수 있지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관문을 뚫지 못하면 영원히 그곳에서 나오지 못한다고 들었다. 성공률은 절반. 실제로 이곳에 들어갔던 천마의 혈육 중 절반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랬기에 그 야망 넘치는 형도 이곳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스스로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천마가 되기 위해선 한 번은 통과해야 할 곳이기도 했다. 천마가 된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통과했으니까. 이렇게 보면 천마도 극한직업 중 하나다.
“나도 네 나이 때 이곳에 들어갔었다.”
“그래서 얼마 후에 나오셨습니까?”
“두 달.”
“맙소사. 제 빛나는 청춘 두 달을 이 어둡고 습한 곳에서 보내라고요?”
“착각하지 마라. 나라서 두 달이지 평균 돌파 시간은 삼 년이다.”
아버지는 역대 천마 중에서 최고의 무재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천무지체도 이런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일 테고.
“아버지,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널 벌 줄 생각이라고.”
“너무 가혹한 벌이지 않습니까?”
“네가 죽인 양포는 영원히 땅속에서 보낼 거다.”
“그가 괴롭혔던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면서요.”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아버지. 정말 죽을 수도 있는 곳에 절 보내시는 겁니까? 혈천도마 그 늙은이가 벌주라고 했다고요?
문득 아버지가 사냥에서 말씀하신 독심이 떠올랐다.
‘아들쯤은 죽어도 상관없으신 겁니까? 아니면, 제가 더 강해져서 나오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살아나오지 못하면 벌이지만, 살아나오면 상이 될 수도 있는 곳이었으니까.
‘아니면 송곳처럼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저를 혈천도마로부터 지켜주려 하시는 겁니까?’
전혀 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아버지였기에,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석굴 옆에 붙어 있는 석판에 손을 대고 고유의 내력을 주입하자 석문이 열렸다.
드르릉.
잔소리 말고 들어가라는 아버지의 눈빛에 나는 더는 거부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전 아버지보다 더 빨리 나올 겁니다.”
드르르릉.
닫히는 석문 사이로 무정하면서도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행여나. 죽지나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