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90)
절대회귀-90화(90/424)
제90회 안 친한 것보다 더 나쁜 관계는.
사실 검무극에게 두고 보자는 말을 했을 때까지만 해도 혈천도마는 믿지 못하는 마음이 컸다.
검무양이 자신을 먼저 찾아온다고? 다른 마존들을 챙기지 않고?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검무극과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날 밤, 검무양이 찾아왔다.
“자네가 어쩐 일인가?”
그러자 검무양이 가져온 술병을 들어 보였다.
“어르신과 한잔하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이 술 좋아하셨지요?”
“용케 기억하고 있었구먼. 자, 이리로 오게.”
혈천도마는 그를 집으로 들이지 않고 마당에 마련된 넓적한 바위에 마주 앉았다.
“시원하니 여기서 한잔하세.”
“좋습니다.”
혈천도마는 시비에게 술잔과 간단한 안줏거리를 가져오게 했다.
검무양이 돌아온 날 만났지만, 그때는 서로를 살필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 비로소 혈천도마는 차분히 검무양의 기도를 살폈다. 과연 떠날 때와는 기도가 달랐다.
“듣자니 마도구벽을 넘어섰다고?”
“걱정해 주신 덕분에 통과했습니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교주께서 기뻐하셨겠군.”
“네.”
혈천도마는 마도구벽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고, 검무양은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 성심껏 대답해 주었다. 예전에도 두 사람은 무공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검무양은 혈천도마와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이상하게도 그와 잘 통했다.
술이 다 비어갈 때쯤 혈천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묻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것 아네. 그러니 편히 묻게.”
“네, 그럼 남자답게 말 돌리지 않고 여쭙겠습니다. 왜 동생을 선택하신 겁니까? 계기나 이유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만.”
“물론 있지.”
혈천도마는 뭐라 대답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 동생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네.”
검무양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끄는 힘이라…….”
여러 대답을 예상했고 이런 류의 대답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데 막상 직접 듣자 검무양은 막막하면서도 섭섭한 감정에 휩싸였다.
자신은 태어나서 누군가에게서 마음을 끄는 사람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힘을 저는 무극이에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아, 무극이를 깎아내리려고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서요.”
“당연히 못 느꼈겠지. 이공자가 자네 마음을 끌 이유는 없었을 테고, 자네 역시 동생의 마음을 받아줄 여유는 없지 않았나?”
“네, 그랬지요.”
혈천도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검무양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자네는 훌륭한 무인이네. 분명 천마가 될 자질도 있지.”
혈천도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이지 검무극이 미친놈처럼 치고 올라오지 않았다면, 검무양을 계속 지지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동생을 선택하셨잖습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떠밀릴 때도 있는 법이라네.”
“그 바람이 향하는 곳에 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어르신과 함께 이 길을 가고 싶습니다.”
혈천도마를 향한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적어도 이 순간, 검무양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다른 마존들도 많지 않나?”
“아닙니다. 저는 어르신이 꼭 필요합니다.”
“이유는?”
마불이 오른팔처럼 자신을 따르고 있지만, 검무양의 마음 깊은 곳에는 혈천도마를 더 좋아했다.
“제게…… 꼭 필요한 분이시니까요.”
그는 다른 어떤 이유도 대지 않았다.
혈천도마는 검무극에게 검무양이 찾아올 거란 말을 듣지 않았다면, 어쩌면 이 간곡함에 감동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께 몇 가지 제안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게.”
“제가 천마가 되면 어르신을 제일마존(第一魔尊)의 자리에 앉혀드리겠습니다.”
“제일마존?”
“네. 천마전에서도 인정하는 마존들 중 최고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또한 남도종의 규모를 지금보다 세 배로 늘려드리겠습니다. 도귀의 숫자 제한을 풀고 남도종에 대한 지원 역시 대폭 늘리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르신께는 특별히 천마서각을 개방하겠습니다. 언제든지 가셔서 보셔도 좋습니다.”
검무양은 혈천도마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마서각에는 무공비급만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 혈천도마가 보고 싶어 할 시중에서는 쉽게 구하기 어려운 시화나 문집들도 많이 있었다.
다른 마존들과의 공평성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물론 혈천도마는 그 말을 그대로 다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나중에 천마가 되어서 ‘다른 마존들의 반발이 생각보다 너무 심하니, 마존께서 좀 양보해 주시지요’ 하면 어쩌겠는가?
심지어 자신은 지금보다도 더 늙어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있을 텐데.
“마불 그 사람이 들으면 섭섭하겠는걸? 자신이 제일마존이 될 거라 확신하고 있을 텐데.”
당연히 이런 반응을 예상한 듯 검무양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마불 어르신을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그 자리에 어울리는 분은 도마 어르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마불 어르신께 지금 제가 드렸던 이 말씀을 전하셔도 됩니다.”
마불에게 이 말을 절대 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는 모양이다. 대체 어디서 나온 믿음일까? 자신을 그렇게 고상한 사람이라 여기는 것일까?
“자네 제안은 생각해 보겠네.”
“네, 감사합니다.”
마지막 잔을 건배하고 검무양이 일어났다.
나가려던 검무양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어르신, 반드시 천마는 제가 될 겁니다.”
검무양이 사라지고 나서 혈천도마가 입에서 뭔가를 꺼냈다. 검무극이 선물로 준 피독주였다. 술을 가져온 검무양을 완전히 믿지 않았던 그였다.
혈천도마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래, 그걸 확신했던 적도 있었지.”
* * *
검무양이 돌아왔을 때 마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혈천도마를 찾아가셨습니까?”
“본교는 여전하네요. 비밀이 없어요.”
“그렇게 대낮에 당당하게 찾아가서는 무슨 비밀타령입니까?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그를 회유하려고 갔습니다.”
“그래서요?”
“생각해 보겠다는군요.”
“그는 배신잡니다.”
마불은 일부러 배신자란 강한 표현을 썼다.
“한 번 마음이 돌아선 사람은 또 돌아섭니다. 아시잖습니까?”
그러자 검무양이 놀랄 말을 꺼냈다.
“술을 마시는데 피독주를 물고 계시더군요.”
“그 인간이 미치지 않고서야!”
버럭 화를 내는 마불에 비해 검무양은 담담했다.
“일부러 감추려 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너 못 믿는다, 도마 어르신답더군요.”
“더는 상종하지 마십시오.”
검무양의 입에서 더 놀랄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참, 도마 어르신에게 제일마존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순간 마불은 깜짝 놀랐다. 너무 뜻밖의 말이라 잠시 얼어붙었다.
제일마존 자리는 원래 자신이 차지할 자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마불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일단 회유하기 위해서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라는 말을.
하지만 검무양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뭡니까? 진짜로 주겠다는 겁니까?’
마불은 자신도 모르게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사람이 어금니를 꽉 깨무는 모습, 상대를 자세히 살피면 알 수 있다. 더구나 검무양 같은 고수가 어찌 모르겠는가? 한데도 검무양은 못 본 척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온갖 생각이 마불의 머릿속을 스쳤다.
실수일까? 아니면 무신경해서? 그것도 아니면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어쩌면 이번에 운남쌍괴를 끌어들인 일을 벌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이런 순간에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검무양이 누구보다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단지 실수가 아니라 어떤 의도가 담긴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마불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악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이런 감정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직설적으로 물었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날 무시하는 거냐고? 이러지 말라고.
하지만 검무양에게는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관계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일까? 아니면 검무양이 의도한 어떤 보이지 않는 벽이 그와 자신 사이에 세워져 있는 것일까?
검무양과 자신의 관계는 자신 혼자서만 끙끙 앓는 관계다.
차라리 안 친한 것보다 더 나쁜 관계…….
결국 마불은 언제나처럼 이렇게 정리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아직 젊으니.’
어른인 자신이 참아야 한다고. 자신이 덤벼든 이 일은 혈기 왕성한 젊은이를 천마로 만드는 일이었으니까.
“우리 쪽 사람들도 챙기셔야 합니다. 그들도 모두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런 수많은 상념 후에 나온 말임을 너는 좀 알아야 한다!
그러한 마불의 속마음을 읽은 것일까?
“다른 마존들에게는 별로 정이 가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어르신이나 도마께서는 떳떳이 나서서 자기가 누굴 지지한다고 밝히지 않습니까? 한데 나머지 마존들은 그저 눈치만 보고 있지요. 나중에 유리한 쪽에 붙겠다? 참 얄팍합니다.”
그 말에서 혈천도마만 빠졌어도 정말 좋았을 텐데. 아니다, 정말 자신을 기만하려 했으면 의도적으로 뺐겠지. 이렇게 솔직히 말해주는 것이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그들이 꼭 필요합니다.”
“저는 어르신만 믿고 갑니다.”
마불과 검무양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마불은 어느 정도 기분이 풀렸지만, 마음속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제일마존은 누굴 주겠다는 겁니까?’
하지만 끝내 검무양도 마불도 그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 * *
혈천도마는 새삼 놀란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자네 말이 맞았네. 정말 대공자가 날 찾아왔더군. 대체 어떻게 안 건가?”
“이건 비밀인데…… 전 미래를 볼 줄 아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전히 미친놈인 걸 보니 누가 섭혼술로 자네 정신을 빼앗아 가진 않았군.”
혈천도마의 농담에 난 웃으며 말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형은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이번에 새삼 크게 느낀 바가 있네.”
혈천도마는 하려던 말을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어차피 하려고 꺼낸 말이었다. 과연 그의 성격상 망설일만한 말이었다.
“자네가 내게 어떤 사람인지 새삼 느꼈네.”
“!”
나는 긴장했다. 혈천도마가 이런 식으로 나에 대해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무슨 뜻입니까?”
“대공자가 어떤 유혹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네. 자네 말처럼 파격적인 제안을 하더군. 하지만 전혀 동하지 않았네.”
내 귓가에 그의 마음의 문이 조금 더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혈천도마가 고마웠다.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래, 이렇게 말해줘야 안다. 다들 다 아는 것처럼 굴지만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나는 곧장 흑마검을 뽑아서 바닥에 선을 쭉 그었다. 그리고 일전에 혈천도마가 그었던 선보다 좀 더 오른쪽에 선을 그었다.
“저를 아끼는 마음이 이제 여기쯤 왔습니까?”
혈천도마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경고도 잊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고만장했다간 어떻게 될지 알지?”
“어떻게 됩니까?”
“혹독한 대가를 치를 거다. 대가가 따르는 상품 중에서도 제일 앞에 진열된 것이 기고만장이다.”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혈천도마는 가끔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나는 그의 이런 면을 참 좋아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자네 말대로라면 대공자가 풍천교주도 찾아갈 텐데. 그대로 둬도 되나?”
“둬야죠.”
“과연 그 사람이 나만큼 굳건할까?”
“대신에 그쪽은 두 사람이지 않습니까?”
“두 사람? 누구? 고월?”
“풍천교주는 그 일을 반드시 고월과 의논할 겁니다.”
“고월을 믿나?”
“네.”
“사람을 그리 쉽게 믿어선 안 되네.”
나는 혈천도마의 경계심에 약간의 질투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그 질투심을 이용해서 혈천도마의 마음을 잡을 생각은 없으니, 나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다.
“네,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겠습니다. 어르신께서도 잘 살펴주십시오.”
“그러지. 그나저나 대공자가 이렇게 휘젓고 다니는데 자네는 그냥 있을 작정인가?”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한 번 정도는 선수(先手)를 양보해야죠. 형이 어떻게 나오는지 한 번 보죠.”
나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형은 우리 모두를 시험대에 올릴 것이고.
“비 온 뒤에 땅이 굳는지, 벌거벗은 채 진흙탕에서 뒹굴게 될지 한 번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