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91)
절대회귀-91화(91/424)
제91회 정말 표나냐?
풍천교주는 창가에 앉아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섭혼마존 청선이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섭혼마존이 되고 나서 수련 시간이 줄었지만, 그럼에도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고 있었다. 그녀는 확실히 섭혼술에 재능이 있었다.
만년한철 비수를 만지작거리며 청선의 수련을 지켜보던 풍천교주가 습관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신물이 놓여 있던 빈 장식장들이 있었다.
풍천교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비수를 받으면서 신물로 삼아도 괜찮겠다고 했지만 이제 자신의 방에 신물은 손에 든 만년한철 비수뿐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그 모든 신물을 이 비수 한 자루와 바꾼 셈이다.
‘아니다. 더는 뒤돌아보는 인생 살지 말자.’
허전함을 후련함으로 바꿔야 한다.
예전이라면 신물이 신경 쓰여 어디 차라도 한잔 마시러 나갈 수가 있었나?
하지만 이제는 이 비수 하나 옆구리에 차고 어디든 떠날 수 있다. 비워야 자유로워진다더니, 정말 그 말이 딱 맞았다. 그래, 이렇게 생각하는 거다.
그러는 사이 청선이 수련을 마쳤다.
“사부님,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수고했다.”
돌아서려던 청선이 다시 와서 망설였던 말을 꺼냈다.
“사부님.”
“왜 그러느냐?”
“언제쯤 사부님의 진짜 비기를 전수해주실 겁니까?”
아직 풍천교주는 자신의 비기를 전수하지 않고 있었다.
“청선아.”
“네, 사부님.”
“왜 그리 급하냐?”
“약해서 그렇습니다. 약하니 절로 마음이 급해집니다.”
사형을 죽이고 마존 자리에 오른 그녀다. 처음에는 모든 서환진의 귀술사들이 그녀에게 열광했지만, 이제 그 인기가 슬슬 식고 있음을 느꼈다. 뭔가 압도적인 무공을 귀술사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요즘이었다.
게다가 틈만 나면 자신을 만나려 하는 사우종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좋던 그였는데 마존의 자리에 오르자 거짓말처럼 싫어졌다. 행동 하나하나가 다 거슬렸다.
마음 같아선 확실하게 끊어버리고 싶은데, 혹시나 이상한 소문이라도 내고 다닐까 봐 가끔 만나주고는 있었다.
어쩌면 그를 죽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마저 들었으니, 이래저래 심란한 그녀였다.
“너는 어떤 마존이 되고 싶으냐?”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은 할 겨를도 없습니다. 이 실력에 잠이나 오겠습니까?”
“야망 있고 재능 있는 네가 한 삼십 년 열심히 수련하면 내가 된다. 어떠냐? 네 미래 모습이.”
순간 청선이 움찔했다.
“지금보다 열 배는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선은 말하고서도 괜한 농담을 했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풍천교주는 껄껄 웃으며 기분 좋게 받아주었다.
“한 다섯 배 정도로만 해주지 그랬느냐?”
“죄송합니다, 원래는 스무 배라고 하려고 했었습니다.”
내친김에 한 번 더 농담했고, 풍천교주는 더 크게 웃어주었다.
만난 이후 처음으로 농담을 주고받은 그들이었다.
청선은 풍천교주의 새로운 면모를 보았다. 그냥 꽉 막힌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래, 너도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으니 내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상황인지는 대충 알 거다.”
그녀에게 직접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알 만큼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교주 자리를 포기하고 검무극과 손을 잡은 것을. 과연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네가 속으로는 나를 한심하게 여긴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아닙니다. 저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한심하겠지?”
“그래서 더 존경스럽습니다.”
“내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무공도 중요하지만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서다.”
“그게 뭡니까?”
“사람이다. 정확히는 사람을 보는 눈이다.”
“네.”
“지금 속으로 이런 생각 했지? 사람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아닙니다, 사부님.”
“나라도 그랬을 거다. 그러니 괜찮다.”
“절대 아닙니다.”
풍천교주가 그녀를 응시하자, 청선은 속마음을 드러냈다.
“무공이 약하면 사람도 다 소용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다 떠나버릴 테니까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직은 무공이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언젠가 너도 내 말을 이해하는 날이 올 거다.”
“네! 알겠습니다.”
알긴 뭘 알겠나? 자기도 저랬다. 저 나이 때는 누가 말해줘도 귀에 안 들어왔다.
검무극 같은 자에 홀려서 돌아설 때마다 신물이 사라지고, 족쇄로 목이 칭칭 감겨서 질질 끌려다녀 봐야 아, 그때 우리 사부 말이 다 맞는 말이었구나 싶을 것이다.
사람 죽일 때나 무공이 중요하지, 현실에서는 사람 보는 눈이 백 배는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조만간 네 성취를 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마.”
“감사합니다, 사부님.”
청선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그곳을 나섰다.
처음 청선을 제자로 삼을 때는 야망 가득한 독한 년이라고만 여겼다. 그때는 다른데 정신이 팔려 이 청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과연 그녀에게 큰 정을 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가르치다 보니 나름의 정이 생기고 있다.
특히 근래에 똑똑한 것들에게 이리저리 당하다가, 이렇게 잔소리도 좀 하고, 어른 노릇 할 수 있는 상대가 생기니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방문자가 있었다. 바로 대공자 검무양이었다.
“교주님을 뵙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미리 기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소. 들어오시오.”
검무양이 풍천교주와 마주 앉았다.
“그날은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였으니 개의치 마시오.”
“제 아우와 많이 친해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여러 곡절이 있었소.”
“무극이에게 큰 기연이었겠군요.”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았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우분께서 워낙 똑똑해서 내가 배울 점이 많았소.”
풍천교주는 자신의 수난을 돌려서 말했지만, 검무양은 풍천교주가 검무극을 높여 말한다고 오해했다.
“제 아우가 똑똑하긴 합니다.”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똑똑했소.”
혈천도마는 마음을 움직였다고 했고, 풍천교주는 자기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똑똑하다고 한다. 똑똑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매력이 있다?
검무양은 아직까진 그런 칭찬들이 동생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바쁜 분이 어쩐 일이시오? 대공자는 천마신교에서 제일 바쁜 사람 아니오?”
“실제로도 그렇게 되게 도와주십시오. 저는 바쁜 게 좋은 사람이라서요.”
검무양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와 손을 잡아주신다면 교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 두 가지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풍천교주가 듣고 보니 정말 자신이 가장 원하는 두 가지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내내 한 사람을 떠올렸다.
* * *
풍천교주가 고월을 찾아왔다.
“이공자는?”
“아직 안 돌아오셨습니다.”
검무극이 없어서인지, 풍천교주는 괜히 고월에게 심술을 부렸다.
“여기 혼자 외롭게 있으면 족쇄에 묶여 있는 거나 뭐가 다른가?”
“족쇄에 안 묶여 보셔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한 번 묶여 보시겠습니까?”
“됐네, 됐어.”
같은 농담이라도 예전보다 마음이 편해졌음을 느꼈다.
“이보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우리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말을 편하게 하면 안 되겠나?”
고월이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교주야.”
“그래! 이거다!”
“나를 위해 그 중요한 교주직도 버렸는데 어찌 이깟 부탁을 못 들어주겠느냐? 다만 걱정되는 것이 있다.”
“뭐냐?”
“지금은 이렇게 좋아하는데, 나중에 싫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 내가 싫어지면 이런 생각부터 들 거다. 이 어린놈의 새끼가 반말은, 그땐 더럽게 거슬릴 거다.”
“그때 되면 어차피 관계가 박살 났는데,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널 잃어버린 상황인데.”
순간 고월의 가슴이 격동했다. 정말 이 사람을 많이 미워했는데, 또 이 사람만큼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
“그래, 좋다. 나중에 후회나 마라.”
“후회는 내 몫이다. 걱정하지 마라.”
“오늘은 왜 왔나? 이 말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그냥 너 보러 왔다.”
가만히 풍천교주를 살피던 고월이 불쑥 말했다.
“대공자가 찾아왔었지?”
순간 풍천교주가 움찔했다.
“어떻게 알았나?”
“그럴 것 같았다.”
“이거 그런 거지? 몰래 나 감시해서 알아낸 걸로 똑똑한 척하는 거지? 너희들 다 사기꾼들이지?”
풍천교주는 오죽하면 이런 말을 다 할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공자가 뭘 해준다더냐?”
“자기편이 되어 주면 중원진출을 약속했다. 이공자가 약속한 것보다 지부라면 자신은 지단을 세워줄 거라 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다. 거짓말이다.”
“왜 그렇게 단정하지?”
“대공자는 아버지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이다. 이공자처럼 어떤 변칙적인 면이 전혀 없는 사람이지.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풍천교의 중원진출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다. 대공자가 천마가 되면 풍천교는 영원히 이 중원에 손바닥만 한 현판도 달지 못한다.”
“네가 이공자 편이라서 편파적으로 판단하는 거다.”
고월은 풍천교주의 말을 무시하고 질문을 던졌다.
“또 뭘 제안했지?”
“다른 제안은 없었다.”
그러자 풍천교주를 향한 고월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았으니까.”
“너는 거짓말할 때면 표가 난다.”
“표가 난다고? 어떻게?”
고월은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검무양의 제안을 정확히 알아맞혔다.
“나를 걸었지?”
풍천교주가 눈을 번쩍 떴다.
“어떻게 알았나?”
“나를 교주에게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했겠지. 교주를 흔들 제안이라면 그것밖에 없을 테니까.”
풍천교주는 솔직히 대공자의 제안에 솔깃했다.
고월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미친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깟 중원진출 포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교주 자리까지 던지고 온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것을 보며, 대공자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대공자도 엄청 똑똑하더군.”
“대공자는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 진짜 똑똑한 사람이라면 이공자와 싸우지 않을 테니까.”
“너도 병이다, 병. 이공자병.”
“그래서 뭐라고 했나?”
“걱정 마. 단호하게 거절했으니까.”
“거짓말 마라. 교주는 두 사람의 갈등을 이용해서 어떻게 하면 나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 궁리 중일 거다. 날 찾아온 것도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날 떠보러 온 거고.”
잠시 말이 없던 풍천교주가 물었다.
“정말 다 표나냐?”
“교주야. 왜 자꾸 잊어먹는 거냐? 네 입으로 똑똑히 말했잖아? 이 똑똑한 놈들에게는 도저히 못 당하겠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또 잔머리를 굴리려는 건데?”
“그야…… 너 때문이지.”
“이러면 오히려 날…… 영원히 잃을 거다.”
풍천교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알면서도 또 머저리처럼 굴었다.”
“다른 장점으로 싸워야 한다. 머리 쓰는 놈에게는 다른 매력을 무기 삼아 싸워야 한다.”
“내가 매력이 어디 있다고?”
“교주가 매력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족쇄에 묶여 있었을 거다.”
풍천교주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이런 말 해주는 사람 너밖에 없다.”
“아니. 교주가 나밖에 보지 않아서 그렇다. 권좌에 앉아서 상대를 대충 내려봐서 그렇다. 이제 진짜 세상에 나와서, 교주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면 이런 말 해주는 사람 줄을 설 거다. 그땐 교주야말로 날 두고 이런 표현을 할지 모르지. 아, 그때 그 족쇄? 잘 살아 있으려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교주야, 나를 모닥불이라 생각해라. 조금 떨어져서 불을 쬐라. 날 너무 가까이 두면 불에 데고, 숯검정이 온통 다 묻을 거다.”
풍천교주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 그 교주로 날 기억하지나 마라.”
고월도 마음이 떨려왔다. 검무극도 자신에게 이런 마음의 파장을 주진 못했다.
“교주야, 오늘부터 자기 전에 이 말을 다섯 번씩 외치고 자라.”
“어떤 말?”
“끝까지 이공자다. 끝까지 이공자다. 자, 해라.”
나머지 세 번은 풍천교주가 억지로 채웠다.
말과는 달리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외쳤다.
‘부럽다 이공자, 부럽다 이공자, 이 자식아, 부럽다.’
그래도 고월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족쇄로 채워서 옆에 두었을 때보다 오늘 더 가깝게 느껴졌으니까.
누군가를 의지하는 일에도 궁합이 있는 모양이다. 솔직히 모닥불에 타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