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93)
절대회귀-93화(93/424)
제93회 악당들끼리 잘 통해서.
마불은 자신의 거처로 가지 않고 검무양을 다시 찾아갔다.
검무극을 만나고 나니 검무양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졌다. 더 봐야 잠이 올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언제나 반듯하고 정중한 그였다.
아까 만났다가 헤어졌으니 원래라면 왜 또 오셨습니까? 라고 물어야 하는데, 검무양은 사적인 궁금증이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천마가 되기 위해서 그러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오늘만큼 그 거리감이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날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에 흔들릴 마불이 아니었다.
“이공자가 찾아왔었습니다.”
“무극이가요?”
“네.”
“그렇군요.”
검무양은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이다.
“왜 묻지 않으십니까? 왜 찾아왔는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괜찮습니다. 저는 어르신을 믿고 있습니다.”
마불은 검무양을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대공자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섬세하지 못하고 무뚝뚝하지만, 진국 같은 사람. 그래, 나도 믿자. 이렇게 다 푸는 거다.’
마불은 쌓였던 감정을 모두 풀려고 노력했다.
풍천교주를 만난 것도, 혈천도마에게 제일마존의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한 것도, 모두 훌훌 털어버렸다.
“그럼 쉬십시오.”
마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 여기까지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이 모든 감정의 찌꺼기들을 버리는 일을 자신에게 그냥 맡겨뒀으면 되었을 텐데.
검무양이 뒤에서 말했다.
“혈천도마에게 제일마존 자리를 제안했던 것은 그를 회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불이 흠칫하며 동작을 멈췄다.
‘왜 하필 지금? 왜 지금입니까? 그토록 해주기를 바랄 때는 안 하다가 왜 검무극을 만나고 왔다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가라앉은 속마음이 표정에 드러날까 봐 마불은 바로 돌아서지 않았다.
뒤에서 검무양이 다시 말했다.
“제가 천마가 되면 제일마존은 당연히 어르신 것입니다.”
마불은 화가 났다.
여태껏 잡은 물고기 취급하다가 검무극이 자신을 회유할지도 모르니까 마음이 급해져서 이런 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겁니까? 나를 믿고 있다면서요?’
인지상정이겠거니 이해하려 해도 속상한 건 속상한 거였다.
‘대공자, 그대는 동생을 무시하던 사람 아니었소? 무극이 따위야 하며 당당하던 사람 아니었소?’
하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운남쌍괴까지 동원해가며 검무극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 자신이었으니까.
맞소, 그대의 동생은 이렇게 긴장해야 하는 상대요.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질 필요는 없었는데…….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마불이 돌아섰다.
“당연히 그러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동생을 만나고 온 시점에 드리는 말씀이어서 혹시 제 마음을 오해하실까 봐 걱정됩니다.”
아, 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냥 우연이겠거니, 무신경해서이겠거니, 자신이 오해했겠거니.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
“제가 무슨 오해를 하겠습니까? 저를 중히 여겨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연한 일인데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마불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검무양의 거처를 나섰다.
오늘따라 달빛도 없어 어두운 길을 홀로 걸어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을 때, 마불은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 젊어서 그렇다. 이공자처럼 완벽하면 내가 왜 필요하겠는가? 능구렁이 같은 이공자보다 약점이 있는 대공자가 더 낫다. 내가 잘 살펴주면 된다.’
검무양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그의 몸에서 뿜어내는 광채만큼이나 빛나는 그였다.
* * *
일화검존이 황천각 집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자, 이건 선물이네.”
그녀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예쁘네요.”
나는 화분을 창가에 두었다.
꽃에 대해 그녀와 몇 마디 나누고 있을 때 서대룡이 차를 가지고 들어섰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서대룡에게 근엄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없을 때 저 꽃은 서 조사관 책임이네. 검존께서 특별히 주신 선물인데 저 꽃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둘만 있었다면 온갖 우울하면서도 재미난 말들이 다 튀어나왔을 텐데, 일화검존이 있었기에 서대룡은 순순히 네라고 대답하고 나갔다.
일전에 풍천교주를 찾아갈 때 다 함께 갔던 사이지만, 그래도 아직 서대룡에게 일화검존은 너무나 어려운 사람이었다.
“바쁜데 찾아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일이야 조사관들이 하지, 저야 농땡이 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내 책상에 쌓인 서류가 너무 많았다.
황천각 일이 많기는 했다.
아무리 잡아넣어도 악인들은 계속 나왔다. 애초에 악인들의 숫자는 일정하게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명이 비면 자동으로 그 자리가 채워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황천각 일은 후계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화무기를 죽여야 하는 일생일대의 과업을 지고 있지만, 동시에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선배님께도 형이 찾아갔었지요?”
나는 오늘 그녀가 방문한 이유를 정확히 짐작했다.
“그래. 찾아왔었다네.”
“참, 부지런하네요, 우리 형.”
“그래서 인기가 많지.”
나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비열하고 가혹하게 굴었지만, 외부에 보이는 모습은 달랐다.
대공자니까 당연히 후계자가 되어야지, 하는 거만함이나 안일함 따윈 없었다. 이래저래 머리도 많이 굴리고, 고민도 많이 하고, 무엇보다 부지런한 사람이다.
“형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대공자는 본교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거든. 맡겨두면 왠지 잘 이끌 것 같은 안정감이 있지.”
“저는요?”
“자네는 정말 안 어울리는 사람이지. 대체 우릴 어디로 이끌까, 오히려 불안하게 하지. 그런데도 이 정도 인기가 있는 걸 보면…….”
잠시 사이를 두고 일화검존은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
“어떤 희망요?”
“자네가 말한 새로운 마도가 세워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잊지 말게. 본교에는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네. 악함이 우리의 힘이자 본질이라 믿는 사람들도 많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대공자가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는데 자넨 그냥 보고만 있을 건가?”
“도마 어르신과 선배님, 두 분 말고는 다른 마존들은 잘 몰라서요. 누굴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일화검존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굴었다.
그러자 그녀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일전에 섭혼마존을 뽑을 때 나와 도마 말고 청선에게 투표한 사람이 누군지 아나? 도마가 설득한 사람 말이네.”
“모릅니다. 어르신이 말해주지 않았거든요.”
“말해줄까?”
원래 마존들 사이에서의 일이나 결정은 외부에는 철저히 비밀로 했다. 그녀는 그 원칙을 나를 위해서 깨려는 것이다.
“제게 말씀해 주셔도 됩니까?”
“안 되지.”
“한데 왜?”
“나도 규칙을 어기면서 살아보려고.”
그러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야 어찌 반만 넘어온 사람이겠는가?
“사실 나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네. 정해진 규칙이 있으면 잘 깨려 하지 않지. 누군가와 만날 약속이 있으면 일찍 도착해야 하고, 오해를 받으면 신경 쓰여 잠을 못 자는 성격이라네. 굳이 안 해도 될 걱정도 많고 나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도 민감하다네. 이래저래 피곤한 성격이지.”
“그 피곤함이 지금 선배님의 명성을 만든 것 아닙니까?”
일화검존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점도 있었겠지. 어쨌든 이젠 좀 유연해지려고 하네. 규칙 좀 어기면 어떤가? 자네에게 도움 된다면 그걸로 가치가 있는 일이지.”
“마음이 바뀌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나도 나이를 먹는지 자꾸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네. 이게 아쉬웠고, 저게 아쉬웠고 온갖 것이 다 아쉬운 인생이지만, 그중에서 제일 아쉬운 게 바로 이거네.”
차아앙.
그녀가 부드럽게 검을 뽑았다. 그녀의 시선이 검날을 향했다.
“이 검이 누구에게도 부러지지 않게 하려고 평생을 바쳤네. 대신에 내 삶도 그만큼 딱딱해졌지.”
그녀는 검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삶을 너무 경직되게 살아온 것이 너무 아쉽네.”
그녀가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음을 느꼈다.
난 그녀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 삶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섭섭하신 거죠?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살아왔지만, 그걸 진짜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싶으셔서요. 다들 어영부영 잘만 살아가는데, 나 혼자 미련을 떨었나 싶으신 거죠?”
그러자 일화검존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자넨 정말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아나?”
저도 한 번쯤은 느껴봤던 감정이니까요.
“제가 선배님을 많이 존경해서 그렇습니다.”
일화검존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려줘야지.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주고 날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깟 규칙이 뭐라고 꼭꼭 숨기고 있겠나? 찬성표를 던진 사람은 바로 극악소마라네.”
그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놀랍지?”
“네. 극악소마는 형 쪽 사람이지 않습니까?”
“맞네.”
의외였다.
극악소마가 우리 편을 든 것도 의외였고, 그를 혈천도마가 설득했다는 것은 더 의외였다.
이 부분을 일화검존은 이렇게 해석했다.
“둘 다 악당이라 잘 통한 거겠지.”
나는 피식 웃었지만, 그녀는 진지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극악소마가 개입된 일이라 알려주는 거네. 쉽게 볼 사람이 아니니까. 혹시 도마가 딴생각을 품고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웃으며 물었다.
“도마 어르신이 그렇게 밉습니까?”
“밉진 않네. 미워한다는 건 어떤 격렬한 감정이 있다는 거니까. 그냥 좀 싫을 뿐이야.”
애써 도마를 자신의 삶에서 밀어내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보겠네.”
“중요한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무친구의 선물쯤으로 생각해 주게.”
그녀가 나가려는데 복도에 서대룡이 화분에 줄 물병을 들고 서 있었다.
딴에는 일화검존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노력이었는데, 문제는 그녀가 도마를 언급하면서 살짝 예민해졌다는 점이었다.
이제 황천각의 조사관에서 악당 도마의 제자가 된 서대룡에게 일화검존이 차갑게 말했다.
“저 꽃 내가 제일 아끼는 꽃이에요. 만약 누군가의 실수로 죽게 된다면 나는 아주 많이 슬플 겁니다.”
그렇게 그녀가 가버리자 서대룡은 울상이 되었다.
“이제부터 저는 이 집무실에서 세 번째로 중요하네요. 저 꽃 이름은 이제부터 이인자입니다.”
그의 자학 깃든 너스레에 난 웃으며 집무실을 나갔다.
“어디 가세요?”
“극악소마 만나러.”
“헉! 그런 무서운 말씀을 밥 먹으러 간다, 하듯이 하신다고요?”
“극악소마가 무섭냐?”
서대룡은 놀란 눈을 크게 뜬 채 물었다.
“그럼 안 무서우세요? 저는 본교 마존 중에서 극악소마가 제일 무섭습니다.”
“전에는 섭혼마존이 제일 무섭다고 했잖아?”
“이젠 죽었으니까요.”
“극악소마는 왜 무서운데? 극악이란 말이 붙어서?”
“못 들으셨어요? 극악소마가 화나면 정말 무섭답니다.”
“화나면 나도 무섭다. 난 자네가 제일 무서울 것 같은데?”
“저는 빼주십시오. 저는 화나면 혼자 삭히는 사람입니다. 정말 화날 일 없이 사는 게 제 꿈입니다. 그런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꽤 변해버렸다는 것을 그도 알고 나도 알았기에 우린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정말 겁 안 나십니까?”
“웃긴 사람 보러 가는데 왜 겁이 나?”
“웃긴 사람이라뇨?”
“소(笑)마잖아?”
앞의 극악에 가려서 그가 소마란 사실을 흔히들 잊는다. 서대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웃을 소 아닐 겁니다. 웃을 소자 벗겨보면 그 아래 불태워 죽일 소, 찢어 죽일 소, 터뜨려 죽일 소, 이런 게 쓰여 있을 겁니다. 헉! 설마 극악소마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제발 아니라고 해주십시오.”
“그가 적인 게 겁나냐? 아군인 게 겁나냐?”
“당연히…… 그래도 극악소마는 안 됩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나왔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극악소마는 결코 아군이 될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그럼에도 내가 그를 만나러 가는 이유는 아군도 아니지만, 적도 아니게 만들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