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94)
절대회귀-94화(94/424)
제94회 아니까 싸운다.
극악소마를 만나러 가기 전에 혈천도마의 거처에 들렀다. 그에게 확인할 것이 있어서였다.
혈천도마는 창가에 앉아서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정말 평소에 책을 읽으시는군요.”
“허세 부리는 거다. 멀리서 네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책장으로 달려간다.”
그가 책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왔냐?”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창밖에 서서 그에게 말했다.
“한 사람에 관해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누구?”
“극악소마에 대해 아십니까?”
순간 혈천도마가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를 묻는 거냐?”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까 해서요.”
혈천도마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젠장. 입 싼 여편네 같으니라고.”
“무슨 말씀이신지요?”
“시치미 떼지 마라.”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혈천도마는 일화검존이 그 사실을 이야기한 것을 알아차렸다. 어차피 그가 어디 가서 이 내용을 떠들고 다닐 사람은 아니었으니, 나는 편하게 말했다.
“애초에 설득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어르신이라고 말해준 사람은 검존이었습니다. 어르신을 위해서요.”
“날 위해서가 아니다. 도덕적인 결벽증이 있어서지.”
“이렇게 서로 잘 아시면서 왜들 그리 다투십니까?”
“모르는 사람이 어디 싸우던가? 아니까 싸우지.”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서 뭘 묻고 싶냐?”
“어떻게 극악소마를 설득하신 겁니까?”
오늘 혈천도마를 만난 것은 그것을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극악소마가 먼저 찾아왔다고요?”
“그래. 내가 뭐 아쉽다고 그 기분 나쁜 놈을 찾아가서 부탁했겠느냐?”
“검존 선배가 틀렸네요.”
“뭐랬는데?”
“같은 악당이라서 설득이 통했을 거라고 했거든요.”
“뭐? 그런 놈과 나를 하나로 묶어?”
혈천도마는 기분 나빠하며 펄쩍 뛰었다.
괜히 일러바치는 것 같지만, 이 역시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한 내 노력의 일환이다.
이렇게 자꾸 서로를 언급해줘야 한다. 서로가 잊지 않고 있다고. 여전히 미워하고 있다고. 이래야 언젠가 계기가 찾아왔을 때, 이 모든 조각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는 화해는 없다.
“무슨 조건을 걸던가요?”
“청선을 찍어줄 테니, 나중에 도움을 요청할 때 도와달라고 하더라.”
“나중에 뭘 요구할지 알고 받아들인 겁니까?”
“저 위한 것 부탁하겠지. 말도 안 되는 일 부탁하면 안 들어주면 되고.”
“제게 생색이라도 내시지 그러셨습니까? 너 때문에 갚아야 할 빚도 생겼다, 어떡할래? 왜 그냥 계셨습니까?”
“생색은 무슨!”
처음 봤을 때의 혈천도마는 정말 계산적이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온갖 생색 다 내고, 다 받아낼 것만 같은 사람.
하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또 다른 혈천도마가 있었다. 생색 같은 것은 저기 구석에 던져두고 햇살 아래 책 읽기를 즐겨 하는 한 남자가.
“어르신, 생색도 내고 해야 상대가 아는 겁니다.”
“몰라도 된다. 그리고 딱히 내게 뭘 부탁하려고 이번 일을 도운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극악소마가 굳이 내게?”
네가 봐도 그건 아니잖아 하는 표정으로 혈천도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만약 그 예감이 맞다면, 그는 왜 우릴 도운 것일까?
“어쨌든 감사합니다, 저는 극악소마를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내가 작별을 고하자 혈천도마는 기다렸다는 듯 덮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극악소마 만나러 간다는데 걱정도 안 되십니까?”
“누구? 자네? 아님 극악소마?”
나는 웃으며 돌아섰다.
혈천도마의 거처에서 나온 후 나는 내원의 북동쪽에 위치한 악인곡(惡人谷)으로 향했다.
악인곡은 이름 그대로 계곡이었다.
자연 계곡은 아니고, 인공적으로 만든 계곡이었는데, 시냇물을 따라 좌우로 무면객들이 기거하는 크고 작은 거처들이 늘어서 있었다.
불규칙적으로 아무 곳에나 세워진 것 같지만, 무면객들의 실력과 지위에 맞춰서, 더불어 외부 침입에 대비해서 철저한 계획하에 만들어진 일종의 요새였다.
악인곡 입구에서 극악소마를 찾아왔다고 기별하자 백색 가면을 쓴 무면객이 나를 안내했다.
극악소마의 수하들은 무면객이라 불린다. 그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다녔는데 백색의 가면에 오직 눈구멍만 뚫린 가면이었다.
눈구멍 모양은 초승달을 눕혀 둔 것 같은 웃는 모습이었다. 눈구멍 모양은 웃고 있지만, 그 속에 진짜 눈은 웃지 않으니, 그 조화가 안 되는 가면을 보고 있으면 절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계곡의 가장 깊숙한 곳에 극악소마의 거처가 있었다. 건물은 백색 가면을 본떠 만들어졌다. 눈이 있는 위치에 유일한 창이 있었는데, 아마 그곳이 극악소마의 거처인 모양이다.
극악소마에게 삼켜지는 느낌을 받으며 가면에는 없는 입으로 걸어 들어갔다.
빙글빙글 돌아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가자 극악소마의 방이 있었다.
그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느낀 감정은 섬뜩함이었다.
사방 벽은 물론이고 바닥까지 온통 하얗게 칠해져 있었는데, 그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탁자도, 장식장도, 하다못해 의자나 방석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덩그러니 극악소마만 서 있었다.
벽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백의를 입고 있었는데 뒤통수 쪽에 드러난 검은색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곳에 서 있는 줄도 모를 만큼, 그는 공간에 동화되어 있었다.
내가 들어왔음에도 그는 계속 벽만 보고 있었기에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극악소마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무면객들처럼 백색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웃는 눈구멍 속 그의 눈빛은 맑고 차가웠다.
특별히 제작된 극악소마의 가면은 밖에서는 그의 눈이 보이지 않게 제작되었는데, 나의 신안술은 어둠을 뚫고 그의 눈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비로소 극악소마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는 듣기 좋았고, 큰 키에 기다란 팔다리는 그가 훤칠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극악소마란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정중했다.
정중하기에 섬뜩한, 그는 이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사실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공식 석상에서 먼발치에서 보는 것 말고 이렇게 개인적으로는 처음 마주하는 것이니까.
“어르신이라니요? 나는 아직 젊으니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십시오.”
“그 말씀에 속아 지금까지 몇 명이나 세상을 하직했습니까?”
극악소마가 웃었다. 그는 이름처럼 잘 웃는 사람이었다.
“이공자는 어떻습니까? 주로 속는 편입니까? 아니면 속이는 편입니까?”
“굳이 따지자면 속아주는 척하는 편입니다.”
극악소마는 습관적으로 웃었다.
“항상 그렇게 웃어주시기 힘들지 않습니까?”
순간 뻥 뚫린 구멍 속 그의 두 눈에서 이채가 흘러나왔다.
“웃는 것이 왜 힘듭니까?”
“우는 것보다 웃는 것이 더 힘들지 않나 해서요. 울며 사는 건 쉬워도 웃으면서 사는 건 어렵잖습니까?”
“드디어 본인의 고됨을 알아주는 분이 나타나셨네요.”
그러면서도 또 웃었다. 이번 웃음은 마치 저잣거리의 배우처럼 크고 과장되게 껄껄 웃었다.
나는 그의 웃음을 믿지 않는다.
저 웃음은 깊은 바다에 사는 물고기의 머리에 달린 촉수 같은 거다. 살랑살랑 흔드는 화려한 촉수에 현혹당해 정신이 팔리다 보면 어느새 커다란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절대 잊어선 안 된다. 네가 좋아서 웃는 것이 아니다.
“이공자, 왜 나를 찾아온 겁니까?”
일화검존이 규칙을 깨고 투표 내용을 내게 말해준 것을 밝힐 수는 없었다.
“어르신과 이렇게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지요? 그래서 어떤 분이신지 가르침을 얻으려 찾아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형 말고 저를 지지해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우리 잠시 걸을까요?”
극악소마가 천천히 흰 벽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생각을 정리할 때면 전 이렇게 걷습니다.”
나도 그를 뒤따라 걸었다. 가면을 묶은 끈이 뒤통수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아이가 잡아당겨도 풀릴 저 매듭을 무림의 그 누구도 풀지 못했다.
그가 걸으면서 말했다.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시면 이공자를 지지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섭혼마존은 어떻게 죽였습니까?”
이 중요한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던졌고, 나 역시 그의 뒤를 따르며 담담히 대답했다.
“섭혼마존은 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분명 그대가 죽였어요. 내가 궁금한 것은 죽였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어떻게 죽였느냐입니다.”
그는 내가 죽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공자,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겠습니다. 제게만 말해주세요. 청선에게 했듯이, 또 한 표를 드리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극악소마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 앞까지 다가온 그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 친구합시다.”
나는 그가 이렇게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란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서 이 말을 두 번째 듣는다.
회귀대법 재료를 찾으러 본교에 돌아왔을 때, 극악소마와 나는 인연이 닿았었다. 그때도 그는 나에게 저 말을 똑같이 했었다.
“싫습니다.”
“왜 싫습니까?”
그와 친구가 된 사람은 모두 죽었으니까.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친구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세 가지나 있으니까요.”
“오, 이유가 세 가지나 있습니까?”
그가 적극적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첫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친구처럼 지내다 보면 언젠가 제가 실수할 겁니다. 편한 마음은 결국 무례를 부르기 마련이죠. 존대가 제 실수를 막아줄 겁니다.”
“좀 실수하면 어떻습니까?”
“그렇죠, 상대가 극악소마만 아니라면 괜찮겠죠.”
극악소마가 큰소리로 웃었다.
“우리 이공자, 소문보다도 더 재밌는 사람이네요.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뭡니까?”
“황천각주와 극악소마는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악과 선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고 했습니다. 내게서 악을 배우면, 선을 지켜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아마 그 말은 악 쪽에서 지어낸 말이겠지요.”
“무슨 뜻입니까?”
“어찌 선과 악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꼭 붙어 있겠습니까? 악은 끝도 없는 무저갱 아래에 있고, 선은 저 높은 산꼭대기에 있을 텐데. 악인들이 자기를 합리화하려고 만들어 붙인 말에 불과하겠지요.”
물론 앞서 그가 한 말은 한 인간의 내면에 선악이 공존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이는 비유이다. 하지만 나는 오직 선과 악만을 이야기하며 의도적으로 멀리 떨어뜨려 버렸다.
“그럼 이공자는 나를 위선자라 생각하시겠습니다.”
“그럴 리가요. 자기 별호에 당당히 악을 붙이는 사람이 어찌 위선자겠습니까?”
“그럼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악은 어떤 경우에도 멋있을 수가 없습니다. 악이 멋있는 유일한 경우는 다른 악을 제압했을 때뿐입니다.”
그가 웃었다. 껄껄 웃었지만, 눈구멍 속의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신안술이 아니라면 나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저렇게 신나게 웃으면서 저렇게 가라앉은 눈빛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무슨 소문 말씀입니까?”
“이공자가 고지식하고 답답한 정파 나부랭이가 되어 버렸다는 소문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느끼셨다면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언젠가부터 우린 그 고지식하고 답답한 정파 나부랭이들보다 못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바로잡아 볼까 합니다.”
나직이 웃던 극악소마가 물었다.
“이것이 이공자가 꿈꾸는 새로운 마도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나와는 결코 공존할 수 없겠군요. 나는 앞으로도 쭉 대공자를 지지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겠지요.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때 뒤에서 그가 물었다.
“참, 세 번째 이유는 뭡니까?”
문을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돌아섰다.
“나는 가면 쓴 사람과는 친구 하지 않습니다.”
웃음이 나와야 할 순간이었는데 그는 웃지 않았다.
나는 보았다.
소리로는 웃지 않았지만, 눈구멍 속 그의 두 눈은 웃고 있었다. 그가 진짜 화가 났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그는 누구 앞에서도 가면을 벗은 적이 없다. 따라서 당연히 누구도 저 가면 속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이는 몇 살쯤 되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가면을 벗으라는 것은 금기이자 역린.
하지만 그런 그도 평생에 딱 한 번 남에게 얼굴을 보였다.
대법 재료를 구하러 왔던, 회귀 전의 나에게. 그와 친구가 되고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에게.
나는 저 가면 속 얼굴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