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98)
절대회귀-98화(98/424)
제98회 내 세상은 시시할 겁니다.
눈구멍 속 극악소마의 두 눈이 활짝 웃고 있었다.
자신의 금제를 풀어주는 대가로 가면을 벗으라는 조건을 걸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는 분노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에게 두 상반된 감정을 공존하게 만든 상대는 내가 처음일 것이다.
평생 살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드는 사람도 본 적 없을 테고. 심지어 아버지도 마존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안다. 극악소마가 얼마나 이런 순간을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지. 피가 빠르게 흐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을 것이다. 난 이것도 일종의 병이라 생각한다.
“내가 가면을 벗겠다고 약속하고선 나중에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쩔 겁니까?”
“달려들어서 억지로 벗겨야죠.”
“자, 지금 한 번 연습해 보시죠.”
순식간에 극악소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싸울 준비가 된 그는 조금 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의자를 뒤로 물렸다.
“그랬다간 제 얼굴 가죽이 벗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극악소마가 기도를 풀며 여유롭게 물었다.
“자, 억지로 벗겨낼 수도 없다면 이제 어떡할 겁니까?”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차분히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순간 극악소마가 흠칫했다. 난 방금 당사자인 극악소마조차도 모르는 정답을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기.
이 청개구리 같은 극악소마에게는 이게 정답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나를 믿겠다는 뜻입니까?”
“솔직히 믿지 않습니다. 극악소마,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이름은 아니잖아요?”
내가 장난이라는 듯 웃었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자, 그만 일어나시죠. 소마님도 가셔서 식사하셔야죠.”
나는 그에게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때론 말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효과를 낼 때가 있다. 이번처럼 별 이유가 없을 때가 특히 그렇다.
때때로 상대가 이 별것 아닌 것을 부풀려서 뭔가 그럴듯한 이유로 만들어주곤 하니까.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극악소마가 뒤따라 일어났다.
풍류주점을 나선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잠시 나와 나란히 걷던 그가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가면을 파는 행상에게로 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백색 가면을 하나 사서 내게 주었다.
“오늘을 기념하는 선물입니다.”
가면을 받아들며 그에게 말했다.
“가면을 벗으라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오히려 제 얼굴에 가면을 씌우시는군요.”
나는 순순히 가면을 썼다.
“답답하네요. 장담하건대 가면을 벗고 싸우면 소마님은 두 배는 더 잘 싸울 겁니다. 대체 이게 편해지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쓰고 있어야 합니까?”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반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가면이 없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 말입니다.”
가면의 눈구멍으로 보이는 극악소마는 말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은 나를 이렇게 보고 있었구나.
그도 이제 눈구멍 속의 내 눈으로만 나를 살필 수 있다. 어쩌면 그게 나에게 더 불리할지도 모르겠다. 극악소마는 아주 오랜 세월을 가면을 쓴 수많은 수하 속에서 살아왔으니까.
내가 가면을 모자처럼 머리로 끌어 올렸다.
“이렇게 쓰십시오. 얼마나 편하고 좋습니까? 쓰고 싶을 때 쓰고, 벗고 싶을 때 벗고. 딱 이렇게.”
그러면서 나는 내 머리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가면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이 녀석도 기분 좋을 겁니다. 이렇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그러자 극악소마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우리 둘 다 하늘을 보게 되겠지요.”
텅 빈 눈빛으로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던 극악소마가 시선을 내게 주었을 때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좋습니다. 이공자가 제시한 조건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금제를 풀어주시면, 단둘이 있을 때는 가면을 벗겠습니다.”
나는 그가 약속을 지킬 거라 믿지 않는다.
회귀 전에도 죽기 전에 딱 한 번 본 얼굴이다. 그는 쉽게 가면을 벗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 약속을 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과연 나는 그의 젊은 시절 얼굴을 보게 될까?
“감사합니다, 소마님.”
마음에 그어진 선 위의 세로줄이 조금 더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아직 멀었다. 반 이상 넘어가야 비로소 나를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상태가 될 테니까.
“저도 이 정도 조건은 되어야 아버지를 들이받을 수 있겠지요?”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도 나도 속마음을 전혀 싣지 않았지만, 이번 약속의 징표는 이 웃음이라는 듯 우린 활짝 웃었다.
* * *
다음 날, 천마전에 들어섰을 때 총군사 사마명도 함께 있었다.
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린 후 사마명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요즘 군사님 때문에 제가 궁지에 몰렸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버지가 두 집 차이까지 따라붙으셨습니다.”
그제야 바둑을 두고 한 말임을 알아듣고 사마명이 웃었다.
“바둑 못 두는 군사에게 사기를 당하셔서 그렇습니다.”
“이미 들으셨군요.”
이번에는 내가 웃었다. 무뚝뚝해서 우리가 나눴던 농담은 어디 가서 안 하실 것 같은 아버지인데, 사마명에게는 이렇게 다 하신다. 그만큼 사마명이 가깝다는 의미리라.
그렇게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아버지에게 오늘 방문의 목적을 밝혔다.
“아버지, 부탁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말해라.”
“극악소마의 금제를 풀어주십시오.”
아버지는 놀라지 않으셨다. 아마 근래 내가 극악소마와 만나고 다닌다는 것을 보고받으셔서 그럴 것이다.
묵묵히 날 내려다보는 아버지 대신 사마명이 나섰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극악소마가 찾아와서 부탁했습니다.”
“그럼 거절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거절했다가 네 가족을 죽이겠다! 협박이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아, 그럼 제가 천마가 되겠군요. 받아들였어야 했나요?”
내 농담에도 사마명은 웃지 않았다.
“농담하실 사안이 아닙니다. 극악소마가 무슨 이유로 금제를 당했는지는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사도맹 무인들을 학살했었지요.”
“소마는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묶어두는 세월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 큰 분노가 되어 터질 겁니다.”
사마명도 이 말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못했다.
듣고 있던 아버지가 불쑥 물었다.
“네가 책임질 수 있겠느냐?”
“제가 왜 책임집니까? 책임은 사고를 친 당사자가 져야지요.”
“목줄 풀린 개가 사람을 물었다고 어찌 개에게만 책임이 있겠느냐? 풀어준 사람도 책임을 져야지.”
“그야 그렇지만요.”
“네가 책임지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금제를 풀겠다.”
“언제까지 그 사람 뒷바라지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금제가 풀리면 그는 곧장 출교할 텐데, 그 출교에서 일어나는 일까지만 책임지겠습니다.”
“좋다!”
흔쾌하게 허락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사마명은 못내 불안한 얼굴로 다시금 강조했다.
“극악소마는 지난 이 년 동안 본교에 갇혀 지내면서 쌓인 게 많을 겁니다. 중원으로 나가면 살육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명심해서 잘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아버지에게 감사를 전했다.
“아버지,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아버지는 호락호락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과연 감사할 일일까?”
천마전 입장에서는 언제까지 극악소마를 금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던 차에 내 부탁은 아버지에게 금제를 풀 계기를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일 역시 일종의 후계자 시험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이번 일은 제가 더 유리할 겁니다. 저는 극악소마가 출교해서 무슨 일을 저지르려 하는지 이미 알고 있거든요.
* * *
천마전을 나온 나는 곧장 악인곡으로 극악소마를 찾아갔다.
“정말 허락을 받은 겁니까?”
극악소마는 내가 단 하루 만에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네. 금제는 내일 풀릴 겁니다. 내일 중으로 통천각에서 공식 문서가 날아오겠지요.”
극악소마의 눈에 감탄이 스쳤다.
“이렇게 빨리 해 낼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형이 아니라 저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 아시겠죠?”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군요. 한데 교주님이 그냥 허락하시던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조건을 거셨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나는 다소 과장된 한숨을 한차례 내쉰 후 그에게 말했다.
“만약 소마님이 문제를 일으키면 그 일을 모두 제가 책임지기로요.”
“오호! 절 위해 후계자 자리를 걸었군요.”
“그런 셈이지요.”
극악소마는 놀랍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소마님 얼굴을 보는 일요? 저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작 이런 아부를 하려고, 이공자는 너무 큰 것을 걸었습니다.”
“그럼 기왕 들킨 아부니까, 하나 더 하겠습니다. 살면서 극악소마와 친구가 되는 일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할 일일 겁니다. 충분히 걸어볼 만한 조건이죠.”
극악소마는 나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내 속셈이 뭔지 알아보고 싶은 것이겠지만, 내 눈빛과 표정만으로 나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달리 말하자면 나는 마음껏 사고를 쳐도 되겠군요. 책임은 이공자가 질 테니까요.”
“정말 미칠 노릇이죠.”
“감추지 그랬습니까?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않았으면 되잖아요? 이공자에게는 약점이 될 일인데.”
“말해야죠. 우리가 겪는 문제 대부분은 말을 해야 할 때 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들 아닙니까?”
극악소마가 묘하게 웃었다. 습관적으로 웃는 웃음과는 다른 웃음이다.
“소마님을 무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숨긴다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지도 않고요.”
“이공자에 대한 소문이 들릴 때마다 저는 그것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이제 보니 많이 축소되었었군요.”
“그건 어쩌면 소마님이기 때문일 겁니다.”
“무슨 뜻이죠?”
“같은 보고를 해도 어떤 감정이냐에 따라 내용이 다르게 들릴 겁니다. 한데 소마님 앞에서는 수하들도 경직될 수밖에 없을 테고. 최대한 개인적인 의견이나 감정이 배제된 건조한 보고만 들어가겠죠. 저란 사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주 일리 있는 말입니다.”
웃음소리는 또 다르게 들렸다. 소마가 생각이 많을 때 저렇게 웃는다.
“대신 한 가지는 꼭 약속해주십시오.”
“뭡니까?”
“출교하실 일이 있으면 저와 함께 나가셔야 합니다. 이 약속을 어기면 금제는 다시 걸릴 거고, 아마 기간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셔야 할 겁니다.”
“나중을 기약할 것 없이 내일 당장 출교합시다.”
이런 즉흥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바로 극악소마다. 그래서 그를 상대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고.
나 역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소마님과의 여행이 기대됩니다.”
나는 일부러 그와의 출교를 여행이란 말로 표현했다.
“우린 여행 가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와 함께 가면 어딜 가도 여행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번 여정을 어떻게든 그가 사고 치는 것을 막아야지, 이렇게 마음 졸이며 접근하지 않으려 한다.
정말로 극악소마와 잠시 놀러 나갔다 온다는 마음으로 나갈 것이다. 친구가 싸우면 말리고, 친구가 위기에 빠지면 구하고. 딱 이 정도 마음으로.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이공자.”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극악소마가 뒤에서 물었다.
“혹시 가고 싶은 곳 있습니까?”
나는 그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많습니다. 근데 이번 출교에서는 소마님의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구경시켜 주십시오.”
“내 세상은 시시할 겁니다. 어쩌면 마가촌보다도 더요.”
“자기 세상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 남이 보면 또 다를 겁니다.”
그가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소마를 만나면 자주 웃게 된다는 것. 억지웃음이든, 웃음 속에 비수가 있든, 진심이 실리든. 어쨌든 웃게 된다. 자주 웃으면 오래 산다는데. 이렇게 좋은 점도 있다.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다 한마디 덧붙였다.
“참, 마가촌은 그리 시시한 곳이 아닙니다. 극악소마에게 가면을 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