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99)
절대회귀-99화(99/424)
제99회 이 여정을 끝내고 돌아올 때면.
악인곡을 나온 나는 혈천도마의 거처가 있는 남도종으로 갔다.
그곳 마당에서 수련하고 있던 서대룡은 내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백색 가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헉! 설마? 극악소마도 죽인 겁니까?”
말해놓고 저도 놀랐는지 서대룡은 황급히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당연하지. 그런 악당을 내가 살려뒀겠어?”
내가 차갑게 말하자 오히려 서대룡은 입을 막았던 손을 내리며 안도했다.
“다행입니다. 저는 정말 죽인 줄 알았습니다.”
“죽였다니까!”
“각주님은 살인 증거를 허리에 차고 다닐 만큼 어리석은 분이 아니시죠.”
“그걸 아는 사람이 죽였냐고 물어?”
“가면 보는 순간 너무 놀라서 그랬습니다. 한데 그 가면은 뭡니까? 악인곡에 잠입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거길 잠입하는데 이게 왜 필요하겠나? 자네가 잠입할 때나 필요하겠지.”
지금 내 풍신사보는 그 어떤 무면객도 나의 기척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올라 있었다.
“이건 극악소마가 내게 준 선물이다.”
서대룡은 앞서보다 더 놀랐다.
“극악소마가 선물로 줬다고요?”
“그것도 마가촌에서 소마가 직접, 무려 돈까지 내고 산 선물이다.”
“그 사람이 돈 가지고 다닌 것이 더 놀랍네요. 그냥 죽이고 뺏을 것 같은데. 아무튼, 각주님은 극악소마에게 선물을 받은 최초이자 마지막 사람이 될 겁니다.”
“서 조사관.”
“네.”
“사람 속만큼이나 모르는 것이 우리 앞날이다. 자네와 내가 혈천도마 어르신의 집 마당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 우리가 처음 만날 그날 상상이나 했겠나?”
“하긴, 그렇죠. 주점에서 각주님의 꼬드김에 빠질 때만 해도 제게 이런 수련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줄 정말 몰랐죠.”
한숨을 내쉬는 그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또 이런 말도 할 거다. 그때 그 지옥 수련이 제 목숨을 구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서대룡이 날 보며 씩 웃었다. 서대룡 자체가 그 말을 입증하는 존재다. 이제 그에게서 그 어떤 삐딱함이나 우울함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다.
다시 수련을 시작하는 그를 뒤로하고 혈천도마의 집으로 들어갔다.
혈천도마는 책장에서 책들을 꺼내고 있었다.
“그런 장난 치다가 대갈통 날아가네.”
“시화를 읽으시는 고상하신 분이 그런 격 떨어지는 말씀을 하십니까?”
“그딴 재수 없는 것을 쓰고 있으니까 그렇지.”
방으로 들어갈 때 장난삼아 백색 가면을 쓰고 들어갔던 것이다.
난 극악소마에게 했듯 가면을 머리 위로 모자 쓰듯이 올렸다.
“내일 극악소마와 같이 출교합니다. 제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 교내 일을 부탁드린다고 찾아뵈었습니다.”
혈천도마는 여전히 책장의 책을 빼며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걱정 안 해도 알아서 잘 돌아간다. 나 없어도 돌아가고, 자네 없어도 잘만 돌아간다.”
“그렇죠? 너무 잘 돌아가서 탈이죠. 참, 검존님께는 어르신이 저 대신 전해주십시오.”
“내가?”
“네. 바빠서 인사 못 드리고 간다고요.”
굳이 혈천도마에게 부탁하는 이유는 이 일 핑계 삼아 두 사람이 한 번 더 만나기를 바라서였다.
혈천도마 역시 내 의도를 짐작했는지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이럴 때 보면 그 역시 검존과 화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분명 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서 나가려는데 뒤에서 혈천도마가 물었다.
“정말 극악소마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작정인가?”
“우리 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적이 되게 하진 않을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극악소마가 형과 손을 잡으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까다로워질 겁니다.”
“어차피 극악소마는 대공자라고 진심으로 모실 사람이 아니야.”
“그게 문젭니다. 두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과업과 보상을 주고받으며 계속 나아갈 겁니다. 둘의 성격상 서로 감정싸움 할 일도 없고, 자존심 상할 일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마불보다도 더 잘 지낼 겁니다.”
실제로도 그러했으니까. 두 사람은 일 궁합이 잘 맞아서 결국에는 마불이나 혈천도마보다 더 가깝게 지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기다리게.”
혈천도마가 꺼낸 책들을 다시 원래 꽂혀 있던 곳 말고 다른 곳에 꽂았다. 마지막 책이 꽂히는 순간.
스르륵.
책장이 열리며 비밀방이 나왔다. 특정 자리에 특정 책이 꽂히면 열리는 그런 정교한 비밀 통로였다.
이곳에 비밀방이 있다는 사실보다 내 앞에서 스스럼없이 그것을 열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혈천도마가 비밀방에 들어가더니 뭔가를 가지고 나왔다.
그가 꺼내 온 것을 무심히 내 앞에 놓인 탁자에 툭 던졌다.
“가져가게.”
“이게 뭡니까?”
잘 포장된 것을 열어보니 안에는 얇은 상의가 들어있었다.
“귀호의(鬼護衣)다. 입고 있으면 얻어터질 때 좀 덜 아플 거야.”
좀 덜 아픈 정도가 아니었다. 귀호의는 보의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한 도검불침의 보의였다.
“이렇게 귀한 걸 정말 절 주시는 겁니까?”
“그렇네.”
“어르신 입으십시오.”
“다 늙은 내가 뭐하게. 추하다.”
“그럼 내다 파십시오.”
“팔아서?”
“돈 버는 거죠.”
“벌어서는?”
그러고 보니 그에게는 재산을 물려줄 혈육이 아무도 없었다.
“중원 유람하시면서 산해진미나 드시고 다니십시오.”
“산해진미는 무슨. 나이 드니까 점심때 먹은 국수도 소화가 잘 안 되는데.”
농담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마음이 아팠다. 나도 겪어봐서 안다. 아무리 고수라도 나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입기 싫나? 싫으면 말고.”
“그럴 리가요.”
그가 다시 가져가려 하자 내가 잽싸게 낚아채서 그 자리에서 귀호의를 입었다. 원래 이런 보의는 그 자리에서 입어주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딱 맞습니다! 정말 편한데요?”
얇고 신축성이 좋아서 안 입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위에 극품천잠사를 감고 천마호신공을 발휘하면 검기나 검강에 적중당해도 몸이 잘려 나가지 않을 것이다.
생색과는 거리가 먼 혈천도마는 행여 내가 감사 인사라도 할까 봐 어느새 서대룡이 있는 마당으로 나가서 잔소리를 시작했다.
잠시 두 사람이 무공수련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그의 거처를 나섰다.
혈천도마에게는 말로 갚지 않을 작정이다.
* * *
“출발이 언제라고요?”
어찌 된 일인지 이안은 혈천도마보다도 더 날 걱정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
“그럼 송별회 못 하겠네요. 아, 오랜만에 다 모여서 한잔할 수 있을까 했더니.”
“이안! 지금 그게 대수야? 나 지금 극악소마와 함께 중원에 나간다고.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어디 갔어? 내 옛날 이안!”
“저도 그립네요, 그 애틋하던 이안.”
“이게 다 수련 때문이야. 못하게 해야겠다.”
나는 다가가서 이안의 손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손바닥에 겹겹이 쌓인 굳은살이 그녀의 고된 수련을 말해주고 있었다.
“요즘 검을 쥐면 뭔가 좀 달라요.”
부연 설명이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팔 성에 이른 비천검법이 끊임없이 그녀를 유혹하고 자극하고 있을 것이다. 강한 상대를 만나서 싸우자고.
나나 마존들과 비교하면 아직 손색이 많지만, 팔 성에 이른 비천검법은 무림에 나가면 그야말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실력이었다.
“나는 그 무서운 극악소마와 두려움에 떨며 다녀올게.”
“그 무서운 일을 당하기 위해서 직접 천마전에 가서 허락도 받으셨다면서요?”
“그건 누구에게 들었어?”
“이미 서 조사관이 다녀갔습니다.”
“무림에서 가장 입 싼 오른팔일 거다.”
내 농담에도 이안은 웃지 않았다.
“도련님 소식은 항상 제가 제일 먼저 알았었죠. 이렇게 출교하시면 당연히 따라갔고요.”
“섭섭하냐?”
그러자 울컥 그녀의 본심이 나왔다.
“네, 섭섭해요. 너무너무 섭섭합니다.”
긴 한숨과 함께 그녀의 참았던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걱정된다고요! 제가 따라가서 지켜드리고 싶다고요! 이제 호위도 아니고 과분하게도 귀영대주 자리를 주셨지만, 여전히 제가 원하는 것은 도련님 곁에서 지켜드리는 일이에요. 저는 죽어도 도련님 옆에서 죽고 싶은 사람인데. 그게 제 꿈인데…… 지금보다 더 고수가 되면 도련님을 진짜 지켜드릴 수 있겠지, 그런 쓸모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 참아야지, 참고 수련해야지…….”
그러다 이안이 울컥했다.
“……도련님 너무 바쁘시고 힘들다는 것 알아서…… 그래서 이런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저, 열심히 수련하고 있을게요.”
결국 그녀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짐 싸라.”
순간 이안은 흠칫 놀랐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절 쫓아내지는 말아주세요.”
“무슨 소리야? 짐 싸고. 내일 같이 가자.”
순간 그녀가 깜짝 놀랐다.
“정말요?”
“네 말이 옳다. 네가 안 지켜주면 누가 날 지켜주냐? 같이 가자. 가서 원 없이 날 지켜라.”
“좋습니다! 정말 좋아요!”
오랜만에 이안이 너무 좋아서 펄쩍 뛰었다.
“감사해요, 도련님. 정말 감사해요.”
“집 나가면 고생인데, 뭐가 감사해? 심지어 우리 동행은 극악소마라고.”
“극악소마가 아니라 교주님이라도 갑니다, 간다고요! 나중에 봬요. 저 챙길 게 많아서요. 여자들은 준비할 게 많아요!”
이안이 바쁘다는 듯 먼저 수련장을 달려나갔다.
그녀의 저 들뜬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무공수련도 좋고 삶의 변화도 좋지만, 지금 좋아서 날뛰는 저 감정이 가장 중요한데……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데.
어쩌면 그녀가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이면에는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한 이기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의 고난은 곧 나의 고난이 되리라는 비겁한 무의식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의 삶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서 현재를 진행 중인데, 나는 내 불안을 감추기 위해 그녀를 이 수련장에 몰아넣었는지도 모르겠다.
신독정화술을 펼쳐줄 진정한 시기는 그녀와 상관없이 내가 나의 불안을 이기는 순간이었음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랬기에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 이제야말로 진정한 때가 되었다.
이 여정을 끝내고 돌아올 때면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이안과 함께 악인곡으로 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극악소마는 이미 떠날 채비를 끝낸 상태였다.
“조용히 가려고 시중들 친구 하나만 데려가려고 합니다.”
극악소마가 소개한 무면객의 가면에는 푸른색 줄이 멋있게 그어져 있었다.
“청면(靑面)입니다.”
그가 내게 정중히 인사했다. 극악소마의 오른팔인 그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무공실력도 훌륭했고, 충성심은 더 훌륭한 인물이었다. 회귀 대법을 찾으러 왔을 때도 그는 여전히 극악소마의 오른팔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극악소마가 너무 오래 사는 바람에 차기 극악소마가 될 수 없었던 비운의 인물이기도 했다.
나도 그들에게 이안을 소개했다.
“여긴 제 호위입니다.”
이안이 극악소마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이안입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 심장이기도 합니다.”
이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내 말에 극악소마가 웃으며 말했다.
“오른팔도 내놓더니 심장도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시는군요.”
“약점을 다 드러내서 대체 어디가 진짜 약점인지도 모르게 만들려고요.”
“자, 그럼 출발할까요?”
“좋습니다.”
나와 극악소마가 마차에 올라탔고, 이안과 청면이 마부석에 앉았다. 두 사람은 마부석에서 서로 고갯짓으로 가볍게 인사했다. 처음 본 사이지만 주인을 호위한다는 공감대가 두 사람에게 있었다.
마차가 출발하자 극악소마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기분이 좋습니다.”
“오랜만의 중원행이라 저도 좋습니다.”
진심이었다. 한동안 교에만 갇혀서 황천각과 수련장, 그리고 천마전과 풍류주점만 돌고 돈 나였다.
그나마 답답할 때면 시공이환술로 새로운 곳에서 쉬었기에 망정이지, 그조차 없었다면 정말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년이나 갇혀 지낸 극악소마의 답답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 가면, 가져오셨군요.”
내 허리에는 그가 선물로 준 백색 가면이 걸려 있었다.
“소마님이 주셨는데 당연히 가져가야죠.”
“그런 싸구려 말고 더 좋은 거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쓰고 있는 것처럼 밖에서는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어주겠다는 의미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이게 더 좋습니다.”
“그게 좋다고요?”
“소마님이 직접 사주신 것 아닙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공자. 나는 사람을 보면 의심부터 하는 사람입니다.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더 의심하죠.”
“당연히 의심하셔야죠. 별호에 극악이 붙은 사람에게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분명 저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공자의 저의는 뭡니까?”
나는 씩 웃었다.
“여러 표정을 짓는 것이 더 힘들지 않냐고 하셨지요? 저는 오히려 더 좋습니다. 이럴 때 이런 모호한 표정으로 대답을 무마할 수 있잖습니까?”
그는 꼬치꼬치 캐묻지 못했다. 나 역시 그에게 가면을 벗는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냐고 재촉하지 않았으니까.
“어디를 가는지 왜 묻지 않습니까?”
“시시한 세상 어딘가로 가겠지요.”
내 농담에 극악소마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본교를 나섰고, 중원을 향해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