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1007
1004화. 타진(打診) (2)
누군가 사색에 잠겨 첫 마디를 뗐다.
“만요국이 다시 나타났다는 건 인족이 구주를 통일하려 한다는 걸 의미하는데. 큰일을 짊어져 책임이 막중하겠군. 인족은 지금껏 진정으로 구주를 통일한 적이 없네. 언제나 북방 요족이나 오랑캐가 있었지. 하지만 남요가 이 시기에 나라를 세운 건 오히려 대봉을 위해 불문을 꼼짝 못 하게 만든 것이야…….”
요족과 대봉이 동맹을 맺은 일로 운록서원 지식인들은 보기 드물게 ‘종족 차별’을 버렸고, 남요에 약간은 호감이 생겼다.
“잠깐, 원장님께선 어째 ‘허칠안과 연합’한 건 주석을 달지 않으신 거지?”
“내 기억으론 요족과 대봉이 동맹을 맺은 건 허 은라 홀로 추진한 걸세.”
순간 의논 소리가 멎었다. 서생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만 쳐다보았다. 굳이 말을 나누지 않아도 이제는 다 알 수 있었다.
바로 허 은라가 남요를 도와 나라를 세운 것이었다.
“이해했네!”
한 서생이 붓을 들고 선지에 빠르게 적기 시작했다.
「영흥 1년, 겨울.
불문이 동맹 조약을 파기하고 창을 거꾸로 돌려 운주 반란군을 도와 중원을 도탄에 빠트렸다. 허 은라가 남강으로 급히 달려가 군요를 이끌고 불문과 싸워 서역인을 십만대산에서 내쫓았다.
이로써 불문을 견제하고 중원의 전쟁 피해를 해소하였으므로 이 거사의 의의는 중대하다…….」
서당 안은 바로 조용해졌다. 서생들은 종이를 펼치고 붓을 휘갈겼다. 선생들 역시 아예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글을 쓰는 데 몰두하였다.
* * *
왕부.
임안이 기분 좋은 얼굴로 왕사모와 후원을 산책 중이었다.
두 사람은 따뜻한 차와 다과를 먹고 두꺼운 외투도 입어서인지 추위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잠시 걷다가 왕사모가 먼저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
“공주마마, 소원을 이루셨는데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것 같네요?”
임안도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았다. 그녀는 자연스레 꽃밭으로 눈길을 돌리며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왠지 아름다운 꽃들이 조금 쓸쓸하게 보였다.
“소원을 이뤘으니 당연히 기쁘지. 다만 폐하께서 정해주신 혼사라…….”
그녀는 당연히 기뻤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날 바로 혼사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테고, 심장이 그렇게까지 미친 듯 뛸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임안은 이런 식으로 그와 혼인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원했던 시작은 허칠안이 먼저 황제에게 혼담을 청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이익과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임안이 바라는 건 허칠안이 진정으로 자신을 원하는 것이지 이렇게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못 이기는 체하는 것도 싫었다.
임안은 단 한번도 허칠안에게 목적을 둔 적이 없었다. 그에 대한 감정은 늘 순수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일국의 공주가 왜 보잘것없는 동라, 은라와 어울려 지냈겠는가.
임안에게 신분의 차이 같은 건 처음부터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래도 임안은 지금껏 이처럼 많은 일을 겪어오며 제멋대로인 성격도 많이 수그러들었고, 마음도 많이 성장했다.
왕사모가 웃으며 말했다.
“흠모하는 이와 혼인할 수 있는 건 가장 큰 복이지요. 어떤 이유인지, 어떤 목적인지 너무 따질 필요 없어요. 지나치게 따지는 사람은 스스로 걱정거리를 만드는 것이지요. 저희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정치의 본질은 타협이래요. 인간으로서도 적당히 타협해야 하고요.”
임안은 그녀를 살짝 노려보았다.
“알아. 그리 거창한 도리까지 늘어놓을 필요 없다고. 하지만 폐하께서 혼사를 정해주셨다는 걸 정작 본인은 모를지도 몰라. 허 천호가 승낙했다고 해도 유효할지 아닐지는 아직 알 수도 없고.”
“공주마마, 안심하세요. 허 은라는 어릴 때부터 숙부, 숙모 손에 자랐지요. 친부모는 아니나 부모보다 나은 분들이에요. 본디 혼인 대사는 부모의 명이자 중매쟁이의 말이라고도 하잖아요. 제가 허씨 집안에 대해 이해하는 바로는 허 대인의 승낙은 큰 힘이 있어요.”
“응.”
임안은 어색하게 답했지만 속으론 은근히 기뻤다.
이때, 왕사모가 느리게 탄식을 했다.
“공주마마께서는 존귀한 공주시라 누구와 혼인하든 괜찮을 테지만……. 허씨 집안에선 그 고귀한 신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허칠안의 현 지위, 수련 경지로 볼 때 제아무리 공주라 해도 그를 속박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의 동생이 황궁에서 멋대로 군다고 한들 황자, 황녀들 그 누구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었다. 호들갑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니 공주가 허부로 온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질까. 분가하지 않는 한 임안 역시도 허칠안 숙모의 억압을 받게 될 터였다.
임안은 바보가 아니기에 왕사모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사모, 직설적으로 말해도 무방해.”
왕사모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 부인의 수단이 정말 굉장해요. 허가에 들어가면 절대 그분과 충돌하면 안 되고 얌전하게 굴어야 해요. 만약 규칙에 얽매이고 괴롭힘을 당한다고 해도 최대한 참을 수 있으면 참으세요.”
임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표정도 심각했고, 의아함도 짙었다.
“너를 이렇게까지 꺼리게 할 정도라고?”
왕사모가 탄식을 했다.
“제 재간 정도는 한참 멀었지요. 혹시 허영월을 만난 적이 있으세요?”
임안은 전에 관성루에서 허영월과 한번 본 인연이 있었다.
“응, 철이 들어 성숙하고 차분하고 애교도 있던데. 모습은 참 가녀리고.”
왕사모가 냉소를 지었다.
“그게 다 꾸며진 모습이에요! 그 아이야말로 수법도 음흉하고 마음씨가 악랄하다고요! 참, 그 아이는 오라버니한테 아주 연연해요. 허 은라 말이에요. 마마께서 장차 허 은라와 혼인하시면 가장 첫째로 해야 할 일이 저와 손잡고 그 아이를 혼인시키는 거예요. 안 그럼 고생 좀 하셔야 할 거예요.”
임안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왕사모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가 암암리에 그 아이와 여러 번 맞붙었지요. 득 될 게 없었어요. 그런 딸을 낳고 가르친 분인데 허 부인이 어디 마음 놓을 인물이겠어요? 듣건대 신년의 재주가 남다른 것도 허 부인이 어릴 적부터 독서하라 공부하라 채찍질한 결과래요. 마마께선 숙부님이 그저 일개 무사란 걸 아셔야 해요. 숙부님은 신년 같은 지식인을 가르칠 수 없어요.
그리고 제가 듣기론 허 은라가 어릴 때부터 숙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지요? 핍박당해 어쩔 수 없이 이웃집 소원에 살면서 청빈하게 살았대요.”
임안은 아연실색했다. 허칠안에게 그런 과거가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녀는 허칠안을 잘 알았다. 그는 늘 오만하고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제는 보잘것없는 장락현 쾌수에서 땅에 우뚝 서 하늘을 떠받치는 영웅이 되었기에 천하에 그를 제압할 인물은 그 아무도 없었다.
그토록 대단한 인물이 숙모에게 내쫓겨 살았을 줄이야!
왕사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때 허 은라는 아직 기세를 떨치지 않아 남에게 얹혀살았지요. 하지만 마마, 허 은라가 벼락출세한 뒤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고 오히려 숙모님과 가족들을 허심탄회하게 대했어요. 이것만 봐도 아시겠지요? 허 부인의 사람 다루는 수완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 나는 별일도 없는데 허 부인이 날 뭐 하러 건드리겠어. 내가 허 부인을 건드릴 것도 아니고…….”
임안이 더듬거리며 겨우 대답했다. 반쯤 겁먹은 것이 분명했다.
“…….”
왕사모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사실 그녀가 뒤이어 하고 싶었던 말은 숙모를 상대하는 게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고, 자신의 말만 잘 들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자신들끼리 손을 잡고 잘 의기투합해보자는 소리였다.
하지만 임안은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에 왕사모도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했다. 절로 말문이 막혔다.
* * *
산책이 끝난 후, 임안은 호화로운 마차에 올랐다.
만족스러운 답은 얻었지만, 허 부인에 대한 왠지 모를 두려움이 생긴 그녀는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 * *
덜커덩- 덜커덩-
마차 바퀴 소리와 함께 임안은 황궁으로 돌아왔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그녀는 바로 어머니의 거처로 향했다.
진 태비(太妃)는 탁상 가득 산해진미를 차린 채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임안이 들어오는 걸 보고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모녀의 사이는 약간 냉랭했다.
먼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진 태비가 담담히 운을 뗐다.
“폐하께서 제위에 오르신 뒤 점점 더 모비의 말을 듣지 않으시더구나. 내가 어미로서 딸의 혼사조차 좌지우지하지 못한다니.”
‘법도대로면 어머니께선 본래 제 혼사를 좌지우지하실 수 없어요…….’
임안은 속으로 중얼거리다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어머니, 제 혼사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오라버니를 찾아가시면 되지, 저한테는 뭐 하러 말씀하세요?”
진 태비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필요는 없지. 네가 그를 흠모한다는 건 어미도 잘 안다.”
그녀는 그저 복비 사건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 그 자식이 임안의 체면은 조금도 고려치 않고 그녀의 계획을 까발려 지위를 강등시키지 않았던가.
“폐하 말씀을 들으니 그가 청주에도, 경성에도 있지 않다더구나. 지금 중원이 큰 혼란에 빠지고, 청주 전쟁이 교착 상태인데 조정을 위해 힘쓰지 않고 뭐 하러 동분서주한단 말인가.”
‘네가 그와 혼인한다 해도 폐하께서 그 천하에 죽일 놈을 잘 구슬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고…….’
진 태비는 불평은 해도 차마 못 할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녀는 그래도 딸을 아주 아끼는 어머니였다.
잡다한 생각을 하던 중, 식탁 위 음식이 다 차려졌다.
모녀는 그 후로도 한참을 기다렸으나 영흥제는 오지 않았다.
진 태비는 눈살을 찌푸리며 분부했다.
“폐하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으니 안신전에 사람을 보내 알리거라.”
시중드는 궁중 환관이 대답한 뒤 물러갔다.
* * *
일각(*一刻: 15분) 후, 환관이 빠르게 돌아왔다.
“폐하께서는 제공들과 공무를 논하고 계시어 뵙지 못했습니다.”
진 태비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무슨 일인지 아는가?”
지금은 매우 불안정하고 민감한 시기라 그녀도 정사에 관심이 많았다.
환관이 말했다.
“안신전 환관의 말에 따르면 방금 감정께서 사천감 술사를 파견해 궁에 말씀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남쪽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기운이 뒤집혔다고 했습니다. 남요가 십만대산을 되찾고 만요국을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만요국이라…….’
만요국의 존재를 떠올린 진 태비는 그 우아한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조정과 동맹을 맺은 그 요족 말이냐?”
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 태비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임안을 돌아보았다.
“좋아, 좋구나……. 얼마 전 폐하께서 만약 그 남요가 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불문을 견제하는 계획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고, 중원 형세가 걱정스럽다고 말씀하셨단다.”
임안도 웃으며 맞장구쳤다.
“이제 오라버니의 걱정이 실현되지 않겠네요.”
진 태비는 미친 듯이 기뻐했다.
“하늘이 대봉을 보우하고, 하늘이 폐하를 보우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