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1011
1008화. 가치 없는 지도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백제가 운을 뗐다.
“그전에 자네는 그가 술사 체계를 창설했는지 전혀 몰랐는가? 그가 대봉 고조 황제를 따라 천하를 빼앗을 때 평소와 다른 점을 보이진 않던가?”
살륜아고는 오래된 기억을 거슬러갔다. 무려 600년이 빠르게 지났다. 세세한 건 부러 기억하지 않는 이상 떠올리기 어려웠다. 1품이라도 그러했다.
“출정한 지 3년째, 그는 일찍이 내게 서신을 써서 이상한 질문을 한 적이 있네. 당시 난 아주 놀랐었지. 그가 말하길, 중원 역대 황제는 모두 몸에 기운이 더해졌는데 어떤 이가 국운을 받아들였다더군?
무신교 수행은 기운과 무관하니 그는 본래 이런 문제가 있으면 안 됐네. 내가 서신을 보내 그에게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물으니, 당시 유가의 대유와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고, 그때 느낀 바가 있었다더군.
지금까지도 나는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네. 그래도 아마 그가 기운과 관련된 문제를 접한 건 처음이었을 거야. 더 이후에 나는 그가 스스로 연기술(煉器術)을 창안했다고 들었네. 당시에는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지. 그의 천부적 차질로 획기적인 성과를 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으니.”
백제가 말했다.
“그 연기술이 바로 지금의 연금술사다. 그는 그때 이미 술사 체계를 창설했던 것이지.”
살륜아고는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바로 내가 여러 해 동안 혼란스러워했던 일이야. 그의 변화가 정말 너무 빨라. 불합리할 정도로 빠르지.”
백제는 점점 더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난 그가 문지기라 추측한 것이다. 하늘이 보살펴주니 고작 십여 년 사이에 술사 체계를 창설하고 1품으로 승직할 수 있었던 것이지. 대봉의 고조 황제가 영토를 점령할 때마다 그의 실력도 조금씩 강해진 거야. 만약 그가 문지기라면 이 모든 것이 설명되네. 도존이 사라진 이래로 뛰어난 인재가 배출되고 초범 고수가 한 세대, 한 세대 바뀌었지만, 유독 초대 감정은 가장 예사롭지 않았지.”
살륜아고의 회갈색 눈에 큰 깨달음의 빛이 스쳤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대는 그가 왜 죽었는지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그는 확실히 죽었네. 이 점은 내가 확신할 수 있어.”
백제는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내 생각에 자네는 이미 답을 얻은 것 같군.”
살륜아고는 깊이 탄식했다.
“그대가 대신 오랫동안 날 괴롭혔던 의혹을 풀어줬군.”
“나 역시 그러하다.”
백제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이후 백제는 살륜아고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늘로 솟구쳤다. 그렇게 백제는 운해 속으로 사라졌다.
* * *
몇 시진 후, 청주 반란군 군영.
척광백과 중원 지도를 내려다보던 허평봉은 느낀 바가 있는 듯 소매에서 흰색 비늘을 꺼냈다.
비늘은 방패 모양으로 금속 광택을 띠고 있었고, 견고하고 영구했다. 마침 은은한 흰빛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어두웠다가 밝았다 했다.
허평봉이 비늘을 손바닥에 펼쳐놓고 말했다.
“무슨 일이신지요?”
비늘의 흰빛이 오르락내리락하더니 백제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전했다.
“네 요구에 동의한다.”
말을 마치자 비늘의 빛이 걷히며 소박하고 수수하게 변했다.
허평봉은 그해 운주 백제묘에서 얻은 이 비늘을 잘 거둔 뒤, 옆으로 고개를 돌려 척광백을 보며 웃었다.
“때가 됐습니다!”
척광백도 웃었다. 놀라워하거나 의외란 기색도 없었다. 모든 걸 장악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 * *
허칠안은 조각배를 몰아 넓은 바다를 항해 중이었다.
뱃머리엔 모남치의 치맛자락이 꽃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이내 그녀가 양손으로 볼을 괸 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좀 무료하네.”
물고기를 낚는 것도 계속 낚을 수는 없었다. 질리기 마련이었다.
“그럼 백희와 바둑을 두시지요.”
허칠안은 한창 지서 파편으로 이묘진과 도발하며 모남치를 달랬다.
“자네 좀 서두를 순 없나? 분명히 날 수 있으면서 왜 날지 않는 거지?”
벌컥 화를 내는 소리에 허칠안은 모남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배에 새싹이 몇 가닥 자라나 있었다.
“무료해서 싹을 틔우셨네요?”
화신은 불쾌해하며 눈을 희번덕였다.
허칠안은 그녀가 분명 화를 내고는 있지만 그것도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보다도 더욱 눈길이 갔다.
“어지러운 속세가 어렵사리 잠잠해졌으니, 장차 우리가 경성에 살지 아니면 무릉도원을 찾아 검소한 생활을 보낼지 제대로 생각해보려고요.”
모남치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으나 계속해서 화난 척 인상을 썼다.
“뭐, 누가 자네와 검소한 생활을 보낸대?”
그때, 허칠안이 갑자기 일어나 앉았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모남치는 덩달아 깜짝 놀랐다.
“뭐, 뭐야?”
허칠안은 손사래를 쳤다.
“잠깐만요.”
이후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글을 썼다.
[삼: 묘진, 정말 내가 말한 그 도안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오?]허칠안이 말하는 건 시가의 그 지도였다.
[이: 내가 왜 알아볼 수 있어야 하지? 영문을 모르겠군. 자네 어디에 있는가? 왜 아직도 경성에 돌아와 임안공주와 혼사를 치르지 않는 거지?]허칠안은 바로 손바닥을 뒤집어 1:1 채팅을 끊었다.
뒤이어 허칠안은 이영소에게 사적인 대화를 걸었다.
이영소는 좀 우물쭈물했으나 한 대 맞을까봐 어쩔 수 없이 연결했다.
[칠: 무슨 일인데요!]성자는 시작부터 다짜고짜 불쾌해했다.
[삼: 자네 지맥을 아는가?] [칠: 약간 알지요. 천종에 지맥에 대해 기록한 관련 고서가 있어요. 하지만 지맥에 관해 얘기하자면 그래도 지종이 가장 잘 알지요.]이영소의 학식은 이묘진보다 좀 뛰어났다. 당시 허칠안이 용맥을 수집했을 때 성자가 아주 의아해했는데 그도 용맥이 뭔지 알고 있어서였다.
[삼: 금련 이 고양이 새끼가 이렇게 오랫동안 폐관하여 기척이 없으니 자네를 찾을 수밖에…….]허칠안은 시가의 지도 모양을 이영소에게 자세히 묘사해주었다. 심지어 지서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아주 열심이었다.
[칠: 이게 산천 지맥이라고요……? 허 형이 설명하지 않았으면 본 성자도 이해하지 못했겠는데요.]허칠안은 말없이 사적인 대화를 마쳤다.
‘천종의 와룡과 봉황 새끼도 알아보지 못하는데 시고부 전임 우두머리는 이 단서들이 상징하는 게 산천 지맥이란 건 어떻게 추측해낸 거지…….’
허칠안은 미간을 문질렀다.
허평봉은 고족에 갔었고, 시고부에 있던 반쪽짜리 지도를 본 적이 있었다.
허칠안은 즉시 진상을 짐작해냈다. 천고 노인과 허평봉의 친분을 근거로 추단해낸 것이었다.
그와 천고 노인의 친분이 있는데, 시고부 전임 우두머리가 지도를 빌려 보겠다는 요구를 거절하겠는가?
그렇다면 시간의 흐름으로 추산했을 때, 허평봉이 가장 먼저 시고부의 지도를 봤고 그제야 시가에 그 지도 반쪽을 찾으러 갔을 터였다.
‘쒯!’
이 반쪽짜리 지도의 가치가 없어졌다.
* * *
허칠안은 실망을 감추기 어려웠다.
만약 허평봉이 이미 여러 해 전에 시고부의 이 반쪽짜리 지도를 보았다면, 소위 고분은 일찌감치 허평봉이 찾아가 보살폈을 터였다.
‘고분 주인이 누구든, 무엇을 숨겨놓았든 이미 의미가 사라졌어……. 아니야, 아닌데. 시행이 분명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는데.’
그는 즉각 부도보탑을 꺼낸 뒤 탑령을 통해 시행에게 전음했다.
“시행, 고분을 열려면 시가 후손의 피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 있었지요.”
몇 초 뒤, 시행의 전음이 전해졌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양이 필요한지요?”
허칠안이 물었다.
“그건……. 모릅니다.”
시행이 전음으로 대답했다.
‘그럼 딱히 꼬치꼬치 캐물을 것도 없네. 시가 사람의 피를 좀 얻는 건 사람 구실 못하는 자한테 전혀 어려운 것도 아니니…….’
허칠안이 말했다.
“조만간 그대를 이영소에게 보낼 겁니다. 그가 그대를 돌봐줄 거예요.”
시행의 역할이 줄어버리니 허칠안은 그녀를 가두고 있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전에 그녀가 저지른 죄악이라면, 이영소에게 맡겨 처리하면 되었다.
이영소는 만약 시행이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면, 천종으로 데리고 돌아가 평생 벗어날 수 없도록 할 것이라 했었다.
끝으로 허칠안은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침 성자가 요즘 말을 안 들으니까 알아서 좀 성가시게 해줘.’
잠시 멍해졌던 시행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허 은라께서 죽이지 않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와 이랑을 인정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니야, 감사할 거 없어. 네 남은 인생은 자유롭지 않을 거거든…….’
허칠안은 지서 파편을 거뒀다.
이윽고 허칠안은 하늘을 빙빙 돌던 갈매기를 통해 아주 먼 곳에 섬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줄곧 심고의 능력을 이용해 근처 갈매기를 조종하며 길을 탐색하고 항로를 유지했다.
거기다 바다 속 물고기도 조종해서 모남치의 미끼도 물게 하고 백희도 괜스레 톡톡 건드렸다.
그렇게 모남치는 득의양양하게 허리춤에 손을 얹고 낚시의 고수인양 우쭐해했다. 백희는 물고기가 하도 시비를 거는 통에, 물고기가 낚싯바늘을 물어도 바다로 내려가 물고기를 잡아 올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는 단순한 허칠안의 악취미였다.
‘기사’ 놀이에 재미 들린 것이었다.
이 순간, 모남치는 뱃전에 엎드려 손수건을 깨끗하게 씻고 있었다.
허칠안은 지서 파편에서 혼천신경을 꺼냈다.
청동 거울 위에 경령(鏡靈)의 색조 눈이 떠올랐다.
“좋아. 너는 내 말을 염두에 두고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지 않았군.”
‘아니, 그냥 너무 바빴을 뿐인데…….’
허칠안은 통 크게 사회성을 발휘했다.
“그대는 법보로 지위가 보통이 아니니 당연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바로 혼천신경이 신나서 말했다.
“인간이 됐군. 무슨 일이지?”
말하는 사이, 거울 면에서 물결 같은 무늬가 일더니 화면을 비췄다. 마치 심연의 계곡처럼 가볍게 흔들리는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허칠안은 뱃머리에서 허리를 굽히고 손수건을 씻는 모남치를 힐끗 본 후, 다시 혼천신경을 주시했다.
언젠가 칠판에서 눈을 떼지 않던 훌륭한 학생으로 돌아간 듯했다.
“무슨 의미입니까?”
혼천신경이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가 좋아할 거라 생각했네. 안타깝게도 여긴 사내가 없어. 아니면 자네가 더 만족했을 텐데. 이건 자네의 양호한 태도에 대한 본좌의 보답이네.”
‘너야말로 정말 인간이 됐구나. 그리고 몇 번이나 설명해야 해. 나는 남자 안 좋아한다니까?’
허칠안은 다소 날카로운 시선으로 거울 면을 보며 말했다.
“능력을 이용해 졸렬한 짓을 하는 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닙니다. 음,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시지요.”
혼천신경이 언짢아했다.
“무슨 일 있으면 말하지. 별일 없으면 나를 돌려보내든가. 본 나리의 향유를 방해하지 말라고.”
“특별히 급한 것도 아니에요. 말하지 마세요. 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요. 음, 조금만요. 참, 앞으로 또 이런 짓을 하면 바로 비판할 겁니다.”
허칠안은 거울 면을 죽일 듯 노려보며 두 눈을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