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1019
1016화. 가장 못생긴 아주머니
운주 군영.
궤짝을 수송하는 짐수레가 군영을 드나들고, 하층 병사들은 당직과 순찰 업무를 반복하며 출정에 항시 대기 중이었다.
3개 전선에서 전투하는 운주군에 비해, 3만 중군(中軍)은 제일 온전했다. 정예병은 줄곧 휴식을 취하며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군영은 지난 한 달간 출병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제 겨울도 끝자락이 되니, 중·고위층 군관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층 병사들은 견문에 한계가 있어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나 중·고위층 군관들은 봄이 가까워지며 자신들과 대봉이 점차 역전되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점차 군영을 나가 전투하자는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었다.
오늘 십여 명의 고위층 군관들은 지휘관 막사 밖에 엎드려 척광백을 출병하라며 ‘위협’하였다. 그중엔 좌군교위(左軍校尉)에서 돌격대 부위(副尉)로 강등된 탁호연도 있었다.
“대장군,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이 겨울에 청주를 함락하지 않으면 춘제 이후에 경성을 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겁니다. 죽음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대장군, 제가 전장에서 죽게 해주십시오! 대장군, 출병해주십시오!”
탁호연의 회백색 왼눈은 더는 앞을 볼 수 없었지만, 포효는 엄청났다.
주위 장수들도 잇따라 맞장구쳤다. 물론 그들은 탁호연이란 패군 장수를 얕잡아보고 있지만, 이 순간 그들의 입장은 같았다.
장수들이 무응답에 체념할 때쯤, 군막이 젖혔다.
군장을 꾸린 척광백이 한 손에 검 자루를 쥐고 있었다. 그는 차분하고도 무심한 얼굴로 모든 장수를 훑었다. 그리곤 갑자기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으니, 그래도 참을성이 있는 편이군.”
외눈박이 탁호연이 경악했다.
“대장군?”
척광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탁호연, 자네가 송산현에서 6천 정예병을 잃었으니 본래는 군법으로 처리해야 한다. 허나 본 장군은 인재를 아끼니 자네 목숨을 살려두지. 지금 다시 한번 묻겠다. 공을 세워 속죄하고 싶은가?”
탁호연이 큰 소리로 말했다.
“만약 치욕을 씻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척광백은 사인(*師印: 장수의 관인)이 찍힌 명령서 한 통을 내던졌다.
“좌군 정예병 8천을 이끌고 송산현에 가서 용상(龍象), 백서(白犀), 파진(破陳) 3군을 지원하라.”
탁호연은 미친 듯 기뻐했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척광백은 바로 돌아서서 우측의 한 장수에게 말했다.
“문선, 화포대 6백 포병, 함락대 3천 보병을 이끌고 동릉의 흑갑(黑甲), 녹망(綠蟒) 양군을 지원하라. 본 장군의 친필 서신도 희현에게 가져다주고.”
이내 척광백은 그 장수에게도 사인이 찍힌 명령서 한 통을 내던졌다.
“조병(趙秉), 자네는 경기병 3천을 이끌고 송산현의 보급로를 끊게. 반드시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해야 하네.”
족족 명령을 하달한 끝에, 얼마 지나지 않아 막사 밖 장수들 절반이 떠났다. 척광백은 곧 남은 이들을 훑더니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했다.
“이동한다. 본 지휘관을 따라 완현을 삼킨다.”
* * *
송산현.
성벽 위 옹성 안에서 분노한 묘재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생은 바둑처럼 한번 둔 것에 후회가 없어야 해! 막상, 내가 중원 지식인만이 익힐 수 있는 바둑을 전수해줬건만 내게 이리 보답한다고? 흥, 역시 오랑캐는 오랑캐군.”
막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게 바로 중원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놀이인가? 그다지 어렵지도 않구먼. 혹시 내가 전설에 나오는 지식 종자라도 되나?”
묘재방이 비웃었다.
“자네가 뭘 아는가. 이게 바로 대도지간(*大道至簡: 큰 도리는 지극히 단순한 법)이라고. 간단한 것일수록 학문은 깊어지지. 보게. 나는 이 바둑돌 5개를 가로로 둘 수도, 세로로 둘 수도, 비스듬히 둘 수도 있네. 먼저 양쪽에 두고 다시 중간에 둘 수도 있지. 놀이법은 변화무쌍하고, 순서가 헤아릴 수 없이 기이하다네.”
이제 가벼운 갑옷을 입은 막상이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자네 말에 아주 일리가 있네만 그래도 나는 너무 간단하다는 생각이 드네. 나는 역시나 지식 종자였어. 전쟁이 끝난 뒤 중원에 남아 장원이 되어 돌아가면 아버지가 아주 기뻐하시겠군.”
“무슨 얘기하고 계십니까?”
성 수비군 군비 점검을 마친 허신년이 막 옹석 문턱에 발을 들였다. 그의 입엔 찐빵이 물려 있었다.
묘재방은 이 틈에 몰래 바둑돌을 바꾸는 막상을 경계하며 말했다.
“우리 바둑을 두고 있네. 바둑은 군자의 도리지.”
허신년이 묘재방을 살짝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이 저속한 무사도 바둑을 둘 줄 안다고?’
눈여겨보니 흑백 바둑돌이 줄을 이루고 있는데 가장 긴 것이 4개였다. 흑돌이든, 백돌이든 4개만 연이어지면 다른 돌에 막혀 있었다.
“이, 이걸 바둑이라고 부른다고요?”
허신년이 이상한 눈으로 묘재방을 쳐다보았다.
묘재방은 득의양양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닌가? 그래, 바둑 두는 것이 자네 지식인들만의 특권이라 생각지 말게. 사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네. 내 총명함과 지혜로 비결을 금세 모색해냈네. 전에 바둑을 둘 줄 몰랐던 건 순전히 자네 지식인 무리에게 속아서네.”
막상이 옆에서 맞장구쳤다.
“저도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허 대인, 제가 허 대인처럼 장원에 급제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 남강에선 아직 장원이 나온 적이 없습니다만.”
‘네 중원 말이 능수능란해진 것 같은데…….’
허신년이 찐빵을 씹으며 말했다.
“묘 형, 바둑 두는 법은 누가 가르쳐 준 겁니까?”
묘재방은 나는 듯이 바둑돌을 두며 대답했다.
“자네 형수.”
허신년이 어리둥절한 듯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어느 형수요?”
‘어느 형수?’
묘재방 역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자세히 생각한 후에 답했다.
“가장 못생긴 그분.”
허신년은 자세히 기억을 더듬었으나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이름을 얘기하세요.”
“모남치네.”
‘모남치는 또 누구야? 됐어, 앞으로 만날 기회가 있겠지. 나중에 묘재방이 못생겼다고 말했다고 꼭 알려줘야겠군.’
허신년은 재능 넘치는 두 전우에게 공수하곤 옆에 앉아 병서를 읽었다.
역시, 팔방미인 지식인은 처세술에도 아주 뛰어났다.
곁에서 묘재방과 막상이 전쟁만 끝나면 장원급제할 거라며 염병을 떨어도, 고고한 지식인 허신년은 홀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군량과 마초가 언제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송산현의 식량으로는 기껏해야 열흘 더 버틸 거야. 이것도 수비군은 굶주림을 견디고, 역고부 전사는 찐빵만 뜯어 먹는 상황인데…….’
역고부 전사와 심고부 비수군은 송산현을 아예 먹어 무너뜨릴 기세였다.
그래도 비수는 겉으로 보이는 체격이 있으니 왕성한 식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송산현 수비군들이 정말로 경악한 건 역고부 족인들이었다.
수비군들이 밥을 그릇에 먹을 때, 역고부 전사들은 밥통째로 먹었다.
평소 두 끼만 먹는 수비군도 전쟁 시엔 세끼를 먹지만, 역고부 전사는 평소에 이미 네 끼를 먹고 전쟁 시엔 다섯 끼를 퍼먹었다.
허신년도 원래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 동생 영음이와 리나의 식사량만으로 어머니는 두피가 다 저릴 정도였다. 그렇지만 지금 허가는 아주 부유했으니 두 낭자의 식사 정도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역고부 전사가 무려 400명이나 있었다.
결국 허신년은 역고부 전사의 식사량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영음이와 리나의 평소 식사량을 참고한 건 패착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맹꽁이 제자고, 사부고 맨날 히죽거리기만 하지, 하는 일이 없는데 어찌 칼날의 피를 핥는 전사와 비교했단 말인가.
‘그래도 군량과 마초만 보충되면 송산현을 계속 지킬 수 있다.’
심고부의 비수군은 고공에서 투척, 공격하고, 시고부의 공시인(控尸人)은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사를 조종하고, 암고부 사람들은 암살을 책임졌으며 역고부는 성벽 위를 기어 오르는 적군을 깨끗이 치우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대봉의 화포와 상노가 화력으로 뒤덮고, 거기에 허신년의 지휘력까지 곁들인다면 송산현은 확실히 난공불락이었다.
지금 성 밖의 반란군, 9천 정예병, 2만 잡군은 책략을 바꿨다. 성 공격에서 포위로 돌아서서 송산현을 제2의 완군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 잡군은 백성으로 조직된 민병으로, 유랑민과 강제 징집되어 대오에 들어온 청장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이끄는 자는 운주 반란군이 끌어들인 강호인이었다.
“지난번에 춘제만 넘기면 청주 상태가 호전될 거라고 했지요?”
묘재방은 지금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바둑을 두면서 수다를 떠는 자신은 역시나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신년은 책을 들고, 탁자에 둔 절반 남은 찐빵을 아껴 먹으며 말했다.
“중원 전체 상황이 호전될 겁니다. 한재가 주요 원인이고, 그다음이 식량 부족이기에 지금의 혼란스러운 국면이 초래된 거지요. 일단 봄이 오면 한재는 더는 백성을 위협하지 못합니다.
둘째, 경작은 백성의 본능이지요. 봄에 경작해야만 추수할 수 있습니다. 많은 유랑민이 다시 호미를 들 겁니다. 그때 가서 조정이 황폐한 그 토지들을 내놓고 다시 분배하기만 하면 유랑민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분명 향신 귀족들이 기회를 틈타 토지를 합쳐 백성의 살길을 남겨두지 않을 겁니다. 영흥제의 기백이 충분한가를 봐야겠지요.”
말을 마친 후, 허신년은 아름다운 눈썹을 찌푸렸다. 그 새로운 군주는 뭐든 좋은데 기백이 부족한 게 흠이었다. 큰일을 하는데 기대할 수 없었다.
만약 영흥제가 그의 계책대로 암암리에 향신 귀족과 횡포한 지주를 ‘희생’시킨다면 확실히 봄이 온 뒤에 토지를 합치는 놈들 수도 대폭 줄 것이었다.
“만약 춘제 이후에도 우리가 지키지 못했다면? 그대들은 송산현에서 전사할 텐가, 아니면 도망칠 텐가?”
묘재방은 습관적으로 언쟁하고 나섰다.
이에 막상은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었다.
“역고부 전사는 도망치지 않네. 만약 내가 중원에서 전사한다면, 내 시체를 남강으로 보내 우리 아버지께 전하는 걸 잊지 말게.”
묘재방은 다시 허신년을 쳐다보았다.
잠시간 침음 후, 허신년이 말했다.
“무릇 인간사는 천명을 따르는 법. 만약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저는 지식인으로서 당연히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묘 형은요?”
묘재방이 진중하게 말했다.
“내 어찌 전사하겠는가. 나는 장차 대협이 될 사람이네. 음, 만약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내 묘비에 ‘대협’ 두 글자를 꼭 새겨주게. 그 후 나를 대신해 허 은라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고. 참, 매년 여인 종이 인형도 몇 개 태워주게. 본 대협은 저승에 간다고 해도 여인과 잠자리는 할 것이거든.”
허신년은 계속 병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찐빵을 둔 자리로 손을 뻗었는데 아무것도 잡히질 않았다.
‘?’
허신년이 아예 옆으로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진짜로 탁자 위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막상이 잔뜩 부푼 볼로 묘재방과 진지하게 바둑을 두고 있었다. 막상의 턱이 두어 번 움직인 후에는 부풀어 오른 볼도 제자리를 찾았다. 그때까지 막상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매우 태연한 얼굴이었다.
‘이런 염병…….’
허신년은 속으로 욕을 내뱉고, 겉으론 일말의 동요 없이 말했다.
“막상 형님, 본 대인은 형님을 보면 늘 누이동생이 떠오릅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막상이 망연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는 허신년이 허 은라의 동생이란 것도 알고, 리나가 허가에서 반년 넘게 묵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