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1020
1017화. 대련
허신년이 진실한 얼굴로 말했다.
“막상 형님과 리나는 더없이 순수한 사람입니다. 식량은 백성의 근간이란 말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온 천하 사람들이 형님 남매와 같다면 구주는 이미 자연의 순리대로 다스려질 것이고, 이렇게 많은 전란도 없을 테지요.”
막상은 자신과 동생이 허신년이란 양방(兩榜) 진사에게 이런 추앙을 받으리란 생각은 못 했던 건지 아주 크게 기뻐했다.
“하하하! 허 대인, 과찬이십니다. 저는 미련하여 감당할 수 없습니다. 물론 리나는 어릴 적부터 저희 아버지께서 총명했다고 자주 칭찬하셨지요.”
‘?’
허신년은 갑자기 총명이란 단어에 혼돈이 왔지만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책을 봤다.
묘재방은 허신년의 말에 확실히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그런 직감만 들었을 뿐이었다.
때 아니게 동생이 언급되자, 막상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커진 듯했다.
“요 며칠 전투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네요. 여러분 모두 중원에서 살고 있으니 중원 강호에서 붙은 제 동생 리나의 별명을 아십니까?”
‘식충이?’
허신년은 저도 모르게 생각이 튀어나왔다. 행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게 참 다행이었다.
묘재방이 잠잠한 건 리나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랬으면 어떤 신선한 욕으로 막상의 속을 긁었을지 알 수도 없었다. 앞서 모남치더러 ‘가장 못생긴 형수’라 내뱉은 전적도 있지 않은가.
“무슨 별명인데요?”
묘재방은 이내 막상이 허신년을 쳐다보는 틈을 타, 화경의 능력으로 바둑돌을 몰래 바꿔치기 했다.
막상은 가슴을 펴고 혀끝을 모아 불문이 진언을 내뱉는 것처럼 말했다.
“비연여협객!”
“뭐라고요?!”
허신년은 경악하며 고개를 들었다.
묘재방은 할 말을 잃고 막상만 멍하게 쳐다보았다.
막상은 아연실색한 둘의 표정이 흡족했는지 더욱 당당히 가슴을 폈다.
“리나가 반년간 강호에서 지내며 중원 인사들의 추대를 받아 비연여협객이라 불린다더군요.”
허신년은 역시 지식인답게 표정 관리에 능했다.
“누가 알려준 겁니까?”
막상이 답했다.
“리나가 직접 한 말입니다.”
묘재방은 막 나서서 폭로하려다, 허신년의 눈빛을 받고 전음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허신년은 아직 은밀히 전음하는 기술을 장악하지 못해서 고개만 저었다.
‘이해했다. 신년은 막상이 제멋대로 떠벌리길 기다렸다가 웃음거리가 되는 걸 보려는 거군. 아직은 결정적인 순간이 되지 않았다. 충분히 떠들썩하지 않으니…….’
과연 묘재방은 허신년과 헛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으론 성자의 모습도 스쳐 지났다.
그리고 허신년은 속으로 생각했다.
‘전쟁을 다 치른 뒤에 알려야지. 아니면 막상의 투지와 사기에 영향을 미칠지도 몰라…….’
그때, 돌연 검은 비늘 비수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바람 소리가 크게 일었다.
옹성 안에 있던 세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비수군이 성벽 위에 착지한 것이었다.
잠시 기다리니 멀리서부터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곧이어 등나무 갑옷을 입은 심고수가 뛰쳐 들어와 막상에게 중얼중얼 말했다.
허신년과 묘재방은 막상을 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내 막상이 튕기듯 일어나 점점 더 유창해지는 중원 표준어로 말했다.
“10리 밖 반란군이 지원병과 합류해 이쪽으로 오고 있답니다.”
* * *
곽현.
동릉성에 주둔하던 청주군은 운주 반란군과 장장 보름간 야전을 펼쳤고, 장병 6할을 잃은 뒤 결국은 더 버티지 못하고 동릉 경계로 물러났다.
그 이후, 청주군은 인접한 곽현에서 주둔하며 정비하고 있었다.
이제 적은 희현이 이끄는 ‘흑갑’, ‘녹망’ 두 정예 대군에 3천 잡군이 더해졌다. 흑갑군은 중기병 600명과 경기병 2,300명으로 구성돼 있고, 녹망은 정예 보졸 4,000명에 화포 80대, 상노 30대, 화통과 활 2,000개를 갖추었다.
이렇게 뛰어난 장비를 지닌 용맹한 군을 청주군이 어찌 맞서랴.
손현기가 청주로 급히 가기 전, 대량의 화기와 장비를 가져왔다 해도 사실상 청주 위소의 군대 전투력은 운주 정예군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청주군은 대봉 군대의 가장 강한 패는 아니었다. 그렇게 반란군 정예 부대 중 하나와 맞닥뜨리게 되니, 중층 전투력이 정예 부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만 다시금 확인하게 됐다.
동릉 수비군은 여전히 희현이 인솔하는 정예 부대에 미치지 못했다.
유일하게 국면을 만회할 수 있는 건 3품 술사 손현기뿐이었다.
확실히 술사의 개인 전력은 같은 품계의 무사에 훨씬 못 미쳐도, 파괴력을 논하자면 3품이라는 경지에선 술사가 제2인자로 불렸다. 감히 제1인자를 칭할 자는 없으니, 최강이라 봐도 무방했다.
“만요국이 재건되었네!”
흰 털의 원호법은 성벽 위를 걷다가 사람만 마주치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동릉군도 이미 이 요족 맹우를 잘 알고 있었다. 다들 그를 아끼기도, 꺼리기도 했는데, 4품경인 용맹한 전투력은 확실히 큰 신뢰감을 주었다.
다만 이 전우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상대의 마음을 죄다 쑤시고 다닌다는 것이 문제였다. 사람 마음을 꿰뚫어보는 신통력이라는 건……. 차라리 따귀나 한 대 얻어맞는 게 낫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 새벽녘, 청주에 남요가 복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호법은 미친 듯 기뻐하며 성벽 위에서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었다.
그 후에는 이렇게 사람만 마주치면 이 소식을 언급하고 다녔다.
“축하하네, 축하해. 만요국은 우리 대봉의 좋은 맹우일세.”
한 백부장이 맞은편에 다가오는 원호법을 보고 친절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원호법은 그를 보며 기분 나쁜 얼굴을 했다.
“자네 마음이 내게 말하는군. 이 죽일 원숭이가 끝이 없다고 말이야.”
“…….”
백부장은 얼굴이 빨개졌다. 변명해야 할지, 못 들은 척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자리를 뜨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원호법은 그를 괴롭히지 않고 눈치껏 멀리 걸어가버렸다. 그리곤 알고 지내는 다른 수비군에게 다시 또 좋은 소식을 알렸다.
“에휴!”
백부장은 원호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과연 곽현을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지킬 수 있을지 쉬이 예측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야전 중에 죽어간 형제들의 시체조차 입관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 하늘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고공에 붉은빛이 폭발했다.
적이 습격한다는 신호였다.
신호를 보낸 것은 바로 곽현 상공에 떠 있는 화포로, 소유자는 망기술로 적을 경계하는 손현기였다.
* * *
완군.
자세히 세어 보니 완군은 이미 한 달이나 포위되어 있었다.
그 사이, 반란군은 수십 차례 성을 공격했다. 청주 포정사사는 병력을 이동 배치해 여러 차례 지원했으나 운주군에게 말끔히 먹혀버렸다.
심고부의 비수군이 달려와, 그제야 무너지던 형세를 역전했다.
하지만 완군에 주둔한 수비군은 피로가 뼛속까지 파고든 상태였다. 가장 호전적인 사람도 궁지에 몰린 듯한 이 싸움을 조속히 끝내길 갈망했다.
무엇보다 이십여 년간 은둔한 병법대가 장진이 고작 1차전에 이렇게 궁지에 몰렸다는 건 정말 크나큰 수치였다. 물론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지금껏 완군을 지키며 명성을 저버리지 않았지만, 수치는 수치였다.
장진은 성벽 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성벽에는 화포가 폭발한 구덩이, 그을린 자국과 균열로 가득했다. 심지어 어떤 곳은 폭발로 틈이 벌어져 성가퀴가 전부 무너져 있기도 했다. 마치 이가 깨진 사람 같았다.
수비군에는 사상자가 절반 이상이었다. 민병을 강제로 징집한 결과, 지금 민병 역시도 사상자가 절반 이상이었다.
크지 않은 이 성지에,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그때, 쪽빛 하늘가에서 거대한 짐승이 얇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왔다.
거대한 짐승은 활공해 성벽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이내 등 위에 타고 있는 심고사가 장진을 향해 말했다.
“남쪽 30리 밖에서 적군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장진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유창한 남강 어투로 말했다. 그는 비수군이 지원하러 온 이래로 며칠간 틈틈이 남강어를 배웠었다.
“본관, 알겠네. 나는 30리를 조망할 수 있네.”
곧이어 장진이 옆으로 돌아 남쪽을 멀리 바라보았다.
그가 한 말대로, 장진의 시력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주변 경물이 사라지고 시야가 한없이 멀어지더니 30리 밖까지 향했다.
장진의 시야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적군 대오가 천천히 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엔 ‘척(戚)’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장진은 시선을 거두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병사는 병사로 장수는 장수로 맞서는 법. 짐승 같은 놈이 드디어 왔군.”
* * *
동릉성.
백의를 입은 허평봉은 술병을 들고 단박에 하늘로 올라 운해에 이르렀다.
연이어 금빛이 바짝 뒤따라오더니 가나수 보살이 되어 허평봉 옆에 섰다.
두 사람의 맞은편에는 흰 머리, 흰옷, 흰 수염의 감정이 있었다. 이미 오래도록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듯했다.
허평봉은 쌍방 사이에 반쯤은 날고 반쯤은 뜬 채 운해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가 큰 소매를 휘두르자 앞에 바둑판과 바둑돌 두 상자가 더해졌다.
“감정 스승님. 스승님을 따라 기예를 배울 때, 사흘에 한 번씩 저희 사제 둘이 대련하곤 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저는 지금껏 이긴 적이 없지요. 경성을 떠난 지 20년. 스승님과 저는 만날 기약이 없어 꼬박 20년을 대련하지 않았더군요. 감정 스승님, 제자와 한 판 두실 수 있겠습니까?”
허평봉이 차분하고도 감개무량한 어조로 말했다.
감정은 고요한 눈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가 자네 소원을 완성시켜줬군.”
그 순간 그의 형체가 번쩍하며 사라지더니 다시 번쩍하고 나타났다.
감정은 이미 허평봉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백의와 백의가 정면으로 마주앉았다.
허평봉이 흑돌을 들며 말했다.
“일찍이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천지가 바둑이고 사람들이 바둑돌이다. 천하의 모든 이가 바둑돌이며 초품도 예외일 수는 없다고. 당시 전 스승님은 바둑돌이신지 여쭸는데, 스승님께선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탁!
바둑돌이 떨어졌고, 허평봉은 맞은편의 감정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해엔 이해하지 못했는데 여러 해가 지나 지난 일을 돌이켜보니 스승님의 깊은 뜻을 알겠더군요. 감정 스승님, 스승님이 문지기이시지요.”
멀지 않은 곳의 가나수 보살이 감정을 바라보았다.
감정이 백돌을 들곤, 연식은 있으되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여섯 제자 중 자네의 천부적 자질이 가장 좋네. 하지만 총명한 사람은 생각이 너무 많기 마련이지.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미련한 자만도 못하네. 자네 위격은 문지기의 차원과 너무 요원하네. 우선 1품 술사가 되고나서 다시 얘기하지.”
탁!
백돌이 떨어지며 바둑판의 흑돌이 터져 가루가 되었다.
허평봉은 문지기 일을 다시 얘기하고 싶었으나 더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당황하지 않고 흑돌을 집었다.
“스승님께서는 천명사이시니 미래를 꿰뚫어 보실 수 있지요. 그래서 그해 이미 대봉 국운이 유실될 것을 보셨다 해도 저지할 수는 없으셨습니다. 남요와 불문의 갈등, 대봉과 북방 요족, 오랑캐 그리고 무신교와의 갈등, 유성 조각상 복원에 대한 고족의 갈망……. 이것들 모두 스승님께선 바꿀 힘이 없으십니다. 이게 대세지요. 하물며 천기를 아는 자는 반드시 천기에 얽매일 것이고요.”
탁!
흑돌의 착점에 백돌이 가루가 되었다. 본디 1품 술사는 단 한 명만 있을 수 있듯, 바둑판에도 돌은 하나만 있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