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1022
1019화. 초대의 이름
한참 뒤에 구미천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해외로 나가 동족을 찾는 데 꼬박 석 달이 걸렸지만, 동족을 찾지 못했을뿐더러 신마 후예조차 찾지 못했네. 구주 대륙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그걸 만났을 뿐이지.”
갑자기 공기가 잠잠해졌다.
‘……제기랄.’
허칠안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한 가지 떠오른 가능성은 신마 후예의 대부분이 백제 아니, 그 대황에게 잡아먹혔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구미천호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 역시 자세히 생각할수록 무시무시한 이 가능성을 떠올린 게 분명했다.
“그럼 왜 나를 잡아먹지 않았을까?”
그녀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허칠안은 깊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후, 차분히 분석에 들어갔다.
“아마 후유증이 있을 겁니다. 아마 근래에 그가 뭔가 큰일을 해야 해서 다른 문제를 파생시키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고요.”
그 즉시 허칠안은 허평봉과 백제 사이에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연이어 청주의 전쟁터가 떠올랐다.
구미천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마주쳤을 때, 반드시 조심해야 하네.”
물론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자신은 본디 강했고, 곁에 신수의 나머지 사지도 있으니 감히 대황이 와도 승부가 어떻게 날지는 알 수가 없었다.
* * *
구미천호와 작별 후, 허칠안은 항해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안선이 눈에 들어왔다.
해안선을 본 동시에 허칠안은 바람을 몰고 오는 검은 형체도 보았다. 누군가가 머리에는 모자를, 몸에는 주술사의 긴 장포를 두르고 있었다.
이 영혜사는 멀지 않은 곳에 멈췄다.
그런데 도착한 건 진짜 몸이 아닌 사람 형태를 한 텅 빈 장포였다.
이내 두봉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허칠안!”
“자네였군, 이이포!”
진북왕을 죽일 때 관계를 맺었었기에 허칠안은 그 목소리를 알아보았다.
연이어 두봉에서 물건이 흘러나와선 뱃머리에 내리쳤다.
콰당!
연한 검은색 광석으로, 표면에는 벌집같이 구멍이 숭숭 나 있고 주변의 바닷바람을 뚫고 옅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허칠안은 고개를 숙여 확인했다. 진짜 명금석이었다.
“무신교 자네들, 무슨 뜻인가?”
“허, 자네가 직접 대주술사께 물으러 가도 되네.”
이이포가 하찮은 듯 말했다. 진짜 몸이 없어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칠안은 추측에 나섰다.
“무신교가 불문이 중원을 차지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그리되면 부처가 이익을 얻고 무신을 억누르기 때문인가?”
이이포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묵인한 셈이었다.
허칠안은 계속 인내심을 갖고 간곡하게 권했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무신교는 왜 출병하지 않는 거지? 차라리 대봉과의 동맹 체결을 관두고 우리 함께 불문을 치자고.”
이이포는 냉소를 지으며 입장을 표명했다.
“허, 개와 개가 서로 물어뜯고 싸우면 털만 뽑힐 뿐이지.”
“그럼 나도 자네들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겠군.”
허칠안은 그제야 허리를 굽혀 명금석을 거두다가 질문을 덧붙였다. 그 사이에 이이포가 바로 도망칠 수도 있으니 틈을 주면 안 됐다.
“참, 자네 깨달음을 얻은 지 얼마나 됐는가?”
이이포가 담담하게 말했다.
“본 영혜사는 대주 시기에 이미 깨달음을 얻었네.”
‘몇 백 년이 됐는데 아직도 2품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고? 폐물이네.’
허칠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자네는 틀림없이 초대 감정을 알겠군.”
어렵사리 무신교 고위층 인물을 만났는데, 초대 감정에 대해 알아보지 않는 건 너무 낭비였다.
순간 이이포의 말투가 차가워졌다.
“자네가 그건 왜 묻는가? 반역자일 뿐인데. 우리 종족이 아니고서야 그들 마음은 분명히 우리와 다르겠지. 그 반역자는 중원 사람인데 동북을 떠돌 때 무신교에 들어왔고 나중에야 대주술사께서 제자로 거뒀네.”
허칠안은 깜짝 놀랐다.
“초대 감정이 중원 사람이라고?”
이이포가 답했다.
“응, 중원 이름이 아마도……. 시신각(柴新覺)이었던 것 같네.”
이이포는 말을 마치고 뱃머리에 있는 허칠안을 보았다. 그는 마치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눈동자에 초점이 없고 표정도 굳어있었다.
시선을 거둔 이이포는 차분히 떠날 준비를 했다.
“별일 없으면 본 영혜사는 먼저 가보겠네.”
“잠깐!”
이이포를 불러 세운 허칠안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초대 감정의 본적이 상주에 있는가?”
허칠안은 겉으론 평온했으나 속으론 바짝 긴장을 곤두세웠다.
이이포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어찌 아는가? 설령 알아도 무슨 연유로 자네에게 알려줘야하지?”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허칠안을 한번 갈군 후, 바로 떠나버렸다.
다소 후끈한 햇살 아래, 허칠안은 말없이 뱃머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배 반대편에 있던 모남치가 물었다.
“왜 그러는가?”
이제는 서로를 잘 알기에 모남치도 허칠안의 상태가 다소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위연을 되살릴 연기(煉器) 재료를 얻었으니 분명 기뻐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허칠안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그저 멍하니 있었다.
차츰 숨을 고르며 허칠안도 점점 정신을 가다듬었다.
“시가 무덤 지도의 일을 기억하시나요?”
모남치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 시가 선조는 묘를 지키는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무덤 지도로 인해 일가가 전멸 당했지. 유일한 건, 음, 아이들이 남강에 노예로 팔렸는데 나중에 상주로 돌아와 지금의 시가를 설립했었나?”
그녀는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느라 말도 조금 더듬거렸다.
허칠안이 또 물었다.
“그럼 마마 생각에 그 무덤은 누구의 무덤인 것 같습니까?”
모남치가 벌컥 소리를 높였다.
“내가 어찌 아는가!”
백희도 앳된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내말이!”
‘에휴…….’
허칠안은 반은 탄식하듯, 반은 숨을 내뱉듯 말했다.
“그럼 초대 감정이 시신각이라고 말씀드린다면요?”
모남치와 백희는 동시에 왼쪽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망연하고도 순진한 표정이었다. 머리를 바로잡지 않는 것이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허칠안은 지금 그녀들이 초대 감정이란 인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그 말속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건지 헷갈렸다.
물론 초대 감정의 정보가 천기에 차단돼 있긴 하나, 단순한 역사의 단절감으로 철저히 잊힐 존재는 아니었다.
결국 허칠안이 직접 수수께끼의 답을 까발렸다.
“무덤의 주인이 바로 초대 감정이래요.”
모남치와 백희는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시행이 초대 감정의 후손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성이 시씨인 사람은 아주 흔하니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모남치는 아무래도 허칠안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연의 일치네요!”
백희도 맞장구쳤다.
허칠안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이 시씨인 사람은 많지요. 하지만 허평봉이 직접 집으로 찾아갈 만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공교로운 일은 없어요. 게다가 초대 감정은 500년 전 무종 반란에 휘말려 죽었습니다. 시간상, 시가에 500년의 역사가 있다는 걸 증명할 수는 없지만, 상충하는 점이 있지도 않습니다.”
시간을 미뤄보면, 시가는 본래 묘를 지키는 가문이었는데 나중에는 묘지기 신분을 버리고 상주에 정착했다. 그 후에 누군가 무덤 지도를 노리면서 시가 일가가 전멸했고, 유일한 아이는 남강에 노예로 팔렸다.
백여 년 전, 그 아이는 다시 상주로 돌아와 지금 시가의 선조가 되었다.
다시 말해 시가가 존재한 역사는 절대 200년 아래일 리가 없었다. 시간상 허점이 없다는 소리였다.
허칠안이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저는 전부터 줄곧 왜 허평봉이 작은 강호 세가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이상했습니다. 같은 2품 술사와 비교했을 때, 시가는 개미 같은 수준이잖아요. 시가가 신비스러운 무덤 지도를 보유하고 있다는 걸 안 뒤에 또 이상했습니다. 이 무덤이 왜 허평봉의 관심을 끌 수 있었을까요? 나중에 저는 허평봉이 시고부 우두머리와 접촉해 지도를 본 줄 알고, 이 실마리를 따라 시가를 찾았습니다.”
모남치는 오랜 시간을 들여서야 그의 말을 소화했다.
“설마 아니라고?”
“그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허평봉은 500년 전 그 혈통으로부터 무덤의 정보를 알게 됐고 시가가 초대 감정의 묘를 지키는 집안임을 알았을 겁니다. 다만 몇 가지 세부 사항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지요.”
허칠안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어느 세부 사항이요?”
백희가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허칠안은 대답이 없었다.
첫째, 허평봉은 초대의 무덤을 뭐 하러 찾은 것인가? 초대는 이미 죽었는데 그의 무덤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둘째, 초대 감정은 그해 무종의 반란에 죽었다. 그의 시체가 보존되었는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그 무덤에 묻힌 게 정말 초대의 시체는 맞는가?
* * *
정산성.
삼베 장포를 걸친 살륜아고가 돌계단을 따라 제단에 올랐다.
광활한 제단 위, 두 조각상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하나는 넓은 소매에 널찍한 장포를 걸치고, 젊은 얼굴 위에는 가시나무 왕관을 쓰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고대 유포 차림에 머리에는 유관을 쓰고,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한 손은 아랫배에 두고 있었다.
살륜아고는 무신 조각상 앞으로 걸어가 살짝 몸을 굽히고 예를 갖춘 후 주문을 외웠다. 어렴풋이 들린 몇 마디는 이러했다.
“백제……. 문지기……. 초대 감정……. 문제가 있다…….”
말을 마친 살륜아고는 고개를 떨구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몇 초 뒤, 살륜아고가 고개를 들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혼잣말을 했다.
“대황, 한 사람뿐이다…….”
* * *
서역, 아란타.
소년 승려 형상의 광현 보살이 보리수 아래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리고 폭포처럼 검은 머리칼, 눈처럼 하얀 맨발에 백의를 입은 유리 보살도 함께였다. 그녀는 손에 옥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옥주전자의 밧줄은 자세히 보면 미세한 검은 뱀이었다. 뱀 꼬리는 주전자 손잡이에 걸려 있었고 뱀의 머리는 유리 보살이 손으로 비틀고 있었다.
“문지기가 확실히 감정인가?”
듣기 좋은 유리 보살의 목소리엔 아무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광현 보살은 미소를 머금고 양손을 합장했다.
“가나수가 그리 얘기했네만. 본좌가 보기에는 십중팔구 그러하네.”
두 보살 역시 최근에야 문지기의 개념을 알게 되었다. 가나수 보살이 청주에서 전해온 소식이었다.
유리 보살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네.”
이내 그녀가 옥주전자를 광현 보살에게 건넸다.
“조심하게. 호교신룡(護敎神龍)을 다치게 해서는 안 돼.”
말하는 동시에 그녀는 검은 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광현 보살은 뱀을 비틀어 엄지와 검지로 뱀의 배를 누르고 위로 훑었다. 검은 뱀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듯 갑자기 경직되었고, 선홍색의 입을 벌려 비린 피 안개를 내뿜었다.
피 안개는 흩날리지 않고, 광현 보살 앞의 금사발로 하늘하늘 모였다.
광현 보살은 곧 뱀을 풀어줬고, 유리 보살은 뱀을 손에 받친 채 안쓰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보살폈다.
이윽고 광현 보살이 옥주전자를 기울여 옅은 금색 물방울 한 알을 천천히 떨어트리자, 금사발에서 금붉은 빛이 맴돌더니 원을 그리며 퍼져갔다.
광현 보살은 손가락을 꼬아 금사발을 가볍게 두드리곤 목소리를 낮췄다.
“올라라!”
금사발에서 금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빛이 흩날렸다. 빛은 개똥벌레처럼 혹은 얇디얇은 매듭처럼 아란타 깊을 곳을 향해 날아 흩어졌다.
이후 아란타에 강렬한 태양이 솟아올라 사방에 금빛이 찬란했다.
산기슭 아래 신도들은 잇따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합장한 채 땅에 이마를 대고 불문의 기적을 찬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