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1024
1021화. 변천 (2)
이윽고 허평봉 뒤에서 백의 형체가 뽑혀 나왔다.
그의 원신이었다.
백제의 원신은 흐릿한 검은 그림자로 막 몸뚱이를 벗어나려다가 강제로 다시 돌아갔다.
유일하게 가나수 보살은 타신편의 특성에 면역이 됐다. 불동명왕의 결인은 산악처럼 안정적이었다.
감정은 더는 백제와 가나수 보살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손목을 털어 허평봉의 원신을 후려쳤다.
육신을 벗어난 원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나약했다. 주술사와 도문 외에 그 어떤 체계의 수사라도 원신은 상대적으로 더 약했다.
채찍은 잔영이 되어 허평봉의 원신을 향해 휘둘러졌다. 이제 이 채찍으로 허평봉의 삼혼이 흩어질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허황된 백의 술사의 몸에서 진흙처럼 촘촘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이 액체는 사악한 기운으로, 빠르게 허평봉의 원신을 뒤덮어 감싸며 그를 보호했다.
탁!
채찍이 진흙 같은 액체를 후려쳤다. 이에 허평봉과 진흙 액체가 한바탕 흔들려 하마터면 흩어질 뻔했다.
그리고 감정은 가만히 고개를 숙여 손에 든 채찍을 바라보았다.
채찍은 끈적끈적한 검은 액체가 물들어 영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때, 허평봉의 몸을 뒤덮은 검은 액체가 이탈하더니 비틀리고 꿈틀거리면서 인간 형태로 변했다.
그는 인간 모습과 이목구비를 지녔지만 온몸에는 걸쭉하면서 혼탁한 액체가 흘렀다. 오직 눈만이 진실한 인간의 눈이었다.
지종 도사 흑련!
오늘날 대봉을 이 지경까지 타락시킨 두 원흉이 전부 모인 것이었다.
원신이 제자리로 돌아온 허평봉은 뒷짐을 진 채 환하게 미소 지었다.
“타락한 기운은 전문적으로 신병 법보를 억제하지요. 설령 진국검이라고 해도 면역이 되지 않습니다. 천기반으로 바꿔 시도해보시는 편은 어떠신지요? 아, 천기반이 감정 스승님의 비장의 패임을 잊었습니다! 예사로우면 쓰지 않으실 테지요.”
감정이 손을 풀자 양몰이 채찍은 빛이 되어 흩어져 사라졌다.
뒤이어 그가 오른손을 뒤집자 손바닥에 기물 2개가 늘어났다. 하나는 예스럽고 소박한 양식의 유관, 하나는 수수하고 질박한 조각칼이었다.
감정은 천천히 유관을 쓰고 조각칼을 쥔 뒤 적 넷을 향해 가볍게 웃었다.
“내가 만약 유성을 모신다면 자네들은 오늘 살아 돌아갈 길이 있겠나?”
백제는 쪽빛 눈으로 감정을 자세히 살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품을 모셔오면 반드시 천도의 배반을 받을 것이네. 설령 자네가 1품의 몸이라 해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겠지. 내 장담하건대 자네는 감히…….”
슉……!
말을 채 마치기도 전, 백제와 세 사람은 감정의 손에 어느새 종이 한 장이 더해진 것을 보았다. 곧 종이는 빠르게 타들어 가 재가 되었다.
‘이렇게 결단력 있다니……!’
허평봉의 눈동자가 살짝 수축했다. 그는 전송 진법으로 급히 물러나며 법기를 부려 스스로를 보호했다.
반면, 가나수 보살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불동명왕법상의 결인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가장 강력한 방어였다.
2품경 흑련은 허평봉보다 더 단호하게 후퇴했다.
끝으로 백제는 몸을 굽히고 머리를 앞발에 붙인 뒤 낮게 포효했다. 머리 위 뿔 하나는 천둥과 번개가 맺혀 있었고, 하나는 검은빛을 품고 있었다.
감정은 적들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자네들을 놀린 것이네!”
세 사람과 짐승 한 마리가 경악한 기색을 드러냈다.
동시에 그들이 약간 느슨해진 사이, 감정이 또 갑자기 유관의 먼지를 털며 목소리를 높였다.
“유가 성인을 청하니!”
그 순간, 운해 위 하늘 아래 냉담하고 무정한 두 눈이 서서히 떠올랐다.
냉담하고 무정한 눈이 현화(顯化)한 뒤, 청기가 몸의 윤곽을 그려냈다. 동시에 갑자기 광풍이 휘몰아치며 옷자락을 거세게 흔들었다.
모두의 앞에 소매가 펄럭이는 유학자 형상이 나타났다.
세상에 다시 강림한 유가 성인의 영혼은 엄청나게 맹렬하고 무시무시한 기세를 떨쳤다. 태산을 무너뜨리고, 천지와 바다까지 뒤흔들 듯한 기세였다.
거리도 너무 가까워, 현재 세 사람과 짐승 한 마리는 유성의 주시를 직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제는 걷잡을 수 없이 사지를 떨었다. 꼭 완전한 짐승으로 퇴화한 것처럼 등을 구부리고, 입을 일그러뜨려 이빨을 드러내며 시위하듯 낮게 포효했다.
허평봉과 흑련은 물러나고 또 물러났다. 2품경인 그들도 이 순간에는 감히 위세를 부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단, 가나수는 1품경 중 가장 맷집 좋은 존재로서 초석처럼 파도의 충격에 저항했다. 물론 금강법상의 횡포와 불동명왕법상의 방어에 기대긴 했지만.
유성 영혼이 형태를 갖추니, 감정의 미간에 상처가 갈라지며 피가 흘렀다. 동시에 육신은 붕괴의 구렁텅이를 향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이건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였다.
곧이어 감정은 한 걸음 넘어 손에 있는 조각칼을 내밀었다.
먼저 찌른 건 가나수 보살이었다.
뒤에 있던 유성의 영혼도 같은 동작을 취했다.
지금 이 순간, 유성의 영혼은 감정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 같았다.
가나수 보살은 우뚝 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시에 가사가 마구 흩날리고 온몸의 근육이 팽창하며 피부 아래에서는 굵은 핏줄이 두드러졌다.
또한 가나수는 움직이지 않아도, 뒤에 있는 금강법상은 앞으로 나아가 가나수 보살의 앞을 막았다.
조각칼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적이 도망치는 것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금강법상은 팔 12쌍을 앞으로 모으고, 24개의 손을 합장해 감정과 조각칼을 손바닥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불동명왕법상은 결인하고 가부좌를 틀어 금강법상 뒤에 원형 공기벽을 응집해 가나수 보살을 그 속에 두었다.
갑자기 금강법상의 팔 12쌍이 떨기 시작했다. 조각칼의 돌진을 아예 막을 수 없는 듯했다.
쿵!
그러자 금강법상 머리 뒤쪽 불의 고리가 팽창하더니 눈을 자극하는 화염이 튀었다. 떨리던 팔 12쌍은 다시금 안정되었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먼저 24개의 거대한 손바닥에 균열이 생기고 연이어 팔, 몸뚱이까지, 방어와 전력으로 이름난 금강법상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법상이 붕괴하면서 넘친 기운은 사방팔방으로 기승을 부렸다. 아래쪽 운해마저 흩트려 저 아래 황망한 대지가 드러났다.
감정은 조각칼을 쥔 채 여전히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불동명왕법상이 일으킨 보호벽을 찔렀다.
웅!
옅은 금빛 공기 벽이 조각칼과 맞닿은 곳에서 뒤틀리고, 혼란스러운 역량이 뿜어져 나왔다.
그때, 흰빛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 감정의 뒤를 습격했다.
백제의 쪽빛 눈엔 야수 같은 광기만 남았을 뿐, 영성은 조금도 없었다.
광기 어린 신마 후예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법이었다.
영성이 제압당해 더는 법술을 쓸 수 없어도, 백제의 전력을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신마 후예의 신체와 영혼은 무사보다 강하고 결코 약하지 않기에 근접전으로 때려죽이는 능력은 여전히 어마어마했다.
탁!
감정이 왼손을 들어 유관을 튕긴 후, 느릿하게 말했다.
“500리 물러나게.”
입을 쩍 벌리고 덤벼들던 백제는 감정과 접촉하려는 찰나, 갑자기 사라졌다. 마치 여태껏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는 당연히 감정이 유가의 언출법수를 익힌 게 아니라 유관의 힘으로 유가 법술을 시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같은 체계의 고품 수사가 지배하지 않기에 유관이 발휘할 수 있는 위력은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백제는 품계가 매우 높아, 감정이 유관의 힘을 빌려 직접적인 공격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백제를 위협할 수 없게끔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가의 특색 있는 본능은 공격이 아닌 ‘그럴싸하다’라는 데 있었다.
잠시 백제를 전장에서 걷어찬 뒤에, 감정은 조각칼을 들고 다시 엄청난 걸음을 내디뎠다.
다음 순간, 불동명왕법상이 받치고 있는 공기벽이 과장되게 찌그러졌다.
이는 불동명왕이 강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가나수 보살은 지금까지 유성 영혼의 가세를 받으며 고수할 수 있었다. 과연 초품 밑에서 방어가 가장 강하다는 그 명성은 명실상부했다.
먼 곳에 있는 허평봉은 비단 주머니를 열고 거대한 화포를 한 대 잡았다. 무려 높이는 장장 9척(尺)에 포관은 1장(丈) 길이였다. 또한 몸체는 현철(玄鐵)로 주조되었으며 표면에는 빽빽한 진문이 새져겨 있었다.
2품 허평봉은 근거리에서 유성의 위압을 직면할 순 없었다. 다만, 다행히 술사가 가장 좋아하는 건 바로 원거리 공격이었다.
진문이 연이어 빛나면서 그곳에 새겨진 진법이 주변의 영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거무칙칙한 포구에, 끊임없이 안으로 무너지는 주먹 크기만 한 백색 빛덩이가 응집되었다.
진법으로 천지의 힘을 움직이는 것, 술사의 가장 뛰어난 특기였다.
쿵!
결국 폭발이 터져 나왔다. 포구에서는 이글거리는 흰빛 기둥이 분사되었다. 그 빛기둥이 바로 감정을 쏘아 맞히려는데, 청광이 감도는 진법이 갑자기 탄도 앞을 가로막았다.
3품 무사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는 포격이 진법에 부딪쳤다.
포격은 그대로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1초 후, 허평봉 뒤쪽 허공에 하얗게 이글거리는 빛기둥이 그를 삼켰다.
감정은 전송 진법으로 포격을 고스란히 그에게 돌려주었다.
웅!
다시 감정 옆의 허공이 흔들리더니, 빛기둥이 또 한 번 격하게 발사됐다.
이번엔 감정의 얼굴을 치려 했다.
허평봉은 뒤를 습격한 빛기둥에게 먹히지 않았다. 그는 감정의 수법을 다시 새겨 감정의 방식으로 되갚았다.
이렇듯 흰 기둥은 사제 간에 끊임없이 사라지고 나타나길 반복했다.
이는 감정이 먼 곳의 흑련 도사를 습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무사의 위기 예감이 없던 흑련은 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흑련은 어쩔 수 없이 도문의 불멸양신(不滅陽神)을 드러내 포격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때, 불동명왕법상이 결국 무너졌다. 유성 조각칼은 공기 벽을 찔러 법상을 완전히 파괴했다.
와해된 불동명왕법상의 기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사이, 조각칼은 다시 또 가나수 보살의 이마를 찔렀다.
청광이 반짝였다.
푹!
순식간에 가나수 보살의 머리가 터지면서 뼛조각과 피가 튀었다. 무려 8척에 달하는 몸이 늘어져 힘없이 고개를 젖히고 쓰러졌다.
가나수는 그대로 황망한 대지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이와 동시에 감정의 가슴에서 피 안개가 터져 나왔다. 유가 성인의 힘이 그의 육신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그러나 감정은 본인 몸 상태도 고려치 않고 돌아서 조각칼을 찔렀다.
허평봉과 흑련을 노린 게 아니었다.
흰 형체와 감정이 엇갈려 지나쳤다.
흰 형체는 백제로, 발로 걷어차인 들개처럼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그 과정에 핏물이 흩어져 떨어졌다.
허평봉은 즉각 손을 들어 받쳤다.
원형 진법은 빠르게 백제를 밀어 올려 충격을 없앴다.
“윽, 으윽…….”
백제의 쪽빛 눈에 광기 어린 기색이 충만했다. 복부는 쪼개져 깊은 상처가 생겼다. 거의 가슴과 배가 다 갈려 대장이 밑으로 축 늘어졌다.
하지만 입에 심장을 물고 있었다.
감정의 심장이었다.
백제는 머리를 살짝 젖힌 채 씹지도 않고 심장을 삼켰다.
몇 초 뒤, 백제의 눈에 난폭한 광기가 사라졌다.
영성이 자라면서 이성을 회복한 것이었다.
백제의 표정은 확실히 멍했다. 자신도 이성을 회복할 거라고 예상치 못한 듯했다.
잠시 침음한 백제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감정을 바라보는 눈빛은 금세 탐욕으로 가득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