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1030
1027화. 여파
‘감정이 사라졌다니…….’
모남치가 허칠안 앞에 웅크려 앉아 망연자실한 눈빛을 했다.
“무, 무슨 뜻인가?”
그녀는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분명 큰일이 난 것을 알았다. 허칠안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그는 여태껏 이런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아마 허칠안이 거울을 볼 수 있었다면 엄청난 액화를 목전에 둔 자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화신전세는 이 사내의 도도한 자존심을 알았다. 설령 죽음이 찾아든다 한들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막다른 골목에 처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모남치는 그 감정에 전염된 것처럼 이유도 모른 채 당혹스러웠다.
“엄청난 재난이 닥쳤습니다…….”
허칠안은 간단히 설명한 후, 지서 파편에서 전음 소라를 꺼내 전음했다.
“손 사형, 감정한테 일이 생겼나요?”
기운이 나라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는 감정에게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았지만, 이 어둠 속에서 하는 감지는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
소라는 잠잠했다. 허칠안은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생각을 거듭했다. 청주 쪽에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의 형세로는 그 가능성뿐이었다.
‘허평봉과 가나수 실력으론 기껏해야 감정을 꼼짝 못 하게 붙드는 것뿐이다. 청주 근거지에선 감정을 위협할 수가 없어. 근데 감정은 지금 십중팔구 절망적인 상황이야……. 그들 쪽에 조력자가 있던 게 틀림없어.
구주의 세력들……. 먼저 무신교는 배제다. 확실히 무신교는 중원을 관망하고 있었어. 심지어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생각까지 있지. 하지만 지금 시점에 대봉이 이렇게 빨리 패하길 바라진 않을 거야. 내분이 일어나 더 철저히 싸우고 죽이길 바라겠지. 그러니 대주술사 살륜아고가 개입할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고족은 대봉과 적이 될 리가 없어. 더더군다나 심연을 지키는 데 정력을 쏟고 있으니 남 일을 생각할 틈도 없지.
아란타 쪽은 남요가 주시 중이야. 감히 중원에 들어와 허평봉을 돕는다면 구미천호가 웅왕과 신수를 데려와 아란타를 평정하고 신수 머리의 봉인을 해제하겠지. 물론 백희를 통해 소통했을 때 그런 생각은 없어보였지만.
북방 요족, 오랑캐는 이미 망가졌어. 3품 대요 촉구 하나로는 부족해.
세력들이 아니라면 초범……. 초범 중, 천종은 무조건 배제야. 지종의 흑련과 천지회는 죽지 않고선 멈추지 않을 거야. 그리고 분명 내가 맞춤형 표적이겠지. 천지회에서 내가 제일 멋지잖아?
백제는 대황이지. 대황은 문지기를 도모하려 허평봉과 손잡았지만, 몸소 나서서 감정을 상대하는 건 꺼릴지 몰라. 직접 이익 충돌이 없으니 허평봉도 그를 움직일만한 승부수가 없을 거야. 그 짐승은 그냥 물음표로 두자. 그러니 흑련 혼자 패거리에 끼어들었다고 감정을 위협하긴 불가능해. 허평봉한테 분명 다른 비장의 무기가 있는 거야…….’
한 차례 분석을 마치고 나니, 허칠안은 벌써 상응하는 추측이 잡혔다.
초대 감정!
초대 감정의 성이 시씨고, 시가가 지키는 무덤이 바로 초대 감정이 남긴 것이다. 그리고 허평봉은 이미 지도를 수집해 그 무덤을 장악했다.
만약 세상에 천명사를 위협할 수 있는 무언가가 더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천명사밖에 없을 터였다.
이때, 전음 소라에서 드디어 원호법의 목소리가 울렸다.
“허 은라, 저 원호법입니다.”
흠칫한 허칠안은 다소 허둥지둥 소라를 잡아 귓가에 댔다.
“말하게!”
몇 초간 침묵 후, 원호법이 말했다.
“빌어먹을, 감정 스승님께서 죽을 리가 없네……. 이 몸이 운주 그 잡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거야, 감정 스승님께선 죽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 젠장…….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감정 스승님께선 어떠한 당부도 없으셨는데……. 스승님께서 정말 살해당한 건가……? 젠장! 젠장! 이 몸이 운주 그 잡놈들을 섬멸해 버릴 것이야!”
원호법의 목소리엔 물기가 묻어나지 않았으나, 허칠안은 왠지 울부짖는 손현기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원호법은 손현기의 가장 진실된 속마음을 전했다.
‘감정……, 정말로 죽었나요? 손 사형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허칠안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고, 조금씩 초점을 잃어갔다.
곧 허칠안은 조용히 소라를 내려놓았다.
모남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웅크려 앉았다. 그녀 품에 있는 백희도 몸을 움츠리고 까만 눈으로 허칠안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한참 뒤, 허칠안이 다시 소라를 들었다.
“청주 정세는 어떠한가?”
원호법은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손 사형의 마음이 텅 비었습니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실제 손현기는 머릿속은 엉망진창으로 아예 넋을 놓고 있었다.
이후, 원호법이 자신의 판단을 덧붙였다.
“하지만 청주는 아마도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예측하기론 상주까지 철수할 것 같습니다.”
“……이해했네.”
허칠안은 전음을 끝냈다.
* * *
고족, 극연 가장자리.
천고 할머니는 한창 초범 우두머리를 이끌고 선두에서 걷고 있었다. 함께 극연에 진입해 고수와 고충을 깨끗이 청소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고 할머니가 걸음을 멈추고 북쪽을 바라보았다.
곁에 있는 고족 우두머리, 4품 고수도 잇따라 걸음을 멈췄다.
제일 먼저 얌전히 걷던 란옥이 물었다.
“할머님, 왜 그러세요?”
천고 할머니는 한참을 침음하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감정이 사라졌네…….”
천고는 이따금 미래의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방금 그 순간, 천고 할머니가 본 건 대봉 관성루의 팔괘대, 텅 빈 팔괘대였다.
2품 천고사인 그녀는 언제나 미래의 일각에 진중했다. 그렇게 자세한 해독 후에야 그 미래 일각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후 대봉에 더는 감정이 없었다.
‘감정이 사라졌다니……!’
고족 초범 우두머리 모두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감정이 사라졌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감정이 어찌 사라질 수 있는가! 이제 대봉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예전이라면 이 소식에 다들 날듯이 기뻐했을 터였다. 대봉이 수호신을 잃은 건 매우 경축할 만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이들이 대봉과 한 줄에 묶여있다곤 할 수 없어도 제법 출혈이 컸다. 더욱이 역, 심, 시, 암 우두머리는 갑자기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심고사 순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할머님, 무슨 뜻이에요?”
천고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노인네는 감정이 사라졌다는 것만 보았네. 어쩌면 죽었거나 봉인되었을지도. 더 상세한 상황은 모르겠네.”
한순간 우두머리들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다들 천고를 잘 알았다. 할머니가 이 소식을 내뱉었다면, 이는 이미 발생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천기를 누설한 것이 아니었다.
란옥도 모처럼 진중한 얼굴로 정교한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감정이 사라졌으니 이제 대봉이 운주와 불문을 어찌 막아내겠는가. 그, 그 자식은 내게 석 달 치 몸 상환도 빚졌는데.”
‘막상…….’
용도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았다.
* * *
정산성.
살륜아고는 황폐한 산꼭대기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을 시해하는 건 술사의 숙명이지. 자네가 스승을 시해하여 일어섰고, 또 제자가 스승을 시해하여 끝장을 냈네. 인과의 순환이지.”
뒤이어 그가 먼 곳의 제단을 보자, 무신 조각상이 개탄하며 말했다.
“문지기가 사라졌으니 자네 초품들도 한숨 돌릴 수 있겠군. 다만 대황을 다시 구주에 끌어들였으니 복인지 화인지 모르겠네만.”
대주술사가 탄식했다.
“자네는 이미 졌으니 우리 사이의 판돈은 계산에 넣지 않겠네.”
그가 남쪽을 향해 손을 들며 소리를 높였다.
“자!”
곧이어 청주와 운주 군영 안에서 유광 한 줄기가 충돌해 겹겹이 얽매이더니 동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 * *
아란타.
광현 보살은 보리수 아래 가부좌를 틀고 금 사발에서 투사된 가나수 보살의 형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나수의 말을 조용히 다 듣더니 양손을 합장했다.
“아미타불, 바친 모든 것이 가치 있었군.”
잠시 멈칫하던 그가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명심하게. 대봉을 전복시키기 전에 반드시 허평봉이 아란타에 다녀오도록 해야 할 걸세. 불문은 500년 전의 전철을 다시 밟아서는 안 돼. 그리고 그 신마 후예는 경계할 필요가 있겠군. 우리는 지금까지도 그가 무슨 계획을 꾸미는지 모르지 않는가.”
가나수 보살은 머리가 없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도 표정을 지을 수도 없었다. 그저 간단하게 대답만 했다.
“응.”
광현 보살이 또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안배할 텐가?”
“허평봉이 청주 기운을 연화하고, 본좌가 유성 조각칼의 힘을 제거하여 상처를 잘 치료하면 다시 북상하여 정벌할 걸세.”
가나수의 목소리는 우렁찼지만, 어조는 무미건조했다.
광현 보살은 잠시 침음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것이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겠군.”
* * *
운록서원.
조위는 아성 유관과 유성 조각칼을 다시 아성전으로 모셨다.
그는 가볍게 탄식한 후, 대전에서 나와 사천감 방향으로 읍하였다.
* * *
황궁.
영흥제는 황금 비단이 깔린 탁자 뒤에 앉아 오른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가볍게 미간을 문질렀다. 그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이따금 고개를 들어 어서방 대문을 쳐다보며 초조함을 내비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 태감 조현진이 문턱을 넘어 빠르게 걸어왔다.
영흥제는 즉시 일어나 양손으로 탁자를 받친 채 조현진을 쳐다보았다.
“어떠한가? 감정을 만났는가?”
조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비, 송경을 만나 폐하의 뜻을 전했습니다. 송경이 팔괘대에 올라 말하길 감정이 사천감에 없다고 했습니다.”
영흥제 눈 속의 빛이 점점 꺼졌다. 낙담한 그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송경이 감정이 어디에 있는지 말했는가?”
조현진은 고개를 저었고 말을 하려다 멈췄다.
이에 영흥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할 말 있으면 하게.”
조현진이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당시 송경의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약간 허둥지둥 대며 말을 가리지 않고 했사옵니다. 노비가 물었으나 송경도 연유를 말하지 못했고, 그저 큰일이 났을 거라고만 했습니다…….”
‘아마 큰일이 났다라…….’
영흥제는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솟구쳤다.
이때, 밖에서 당직을 서던 시위가 어서방 문밖에 이르러 허리를 굽혔다.
“폐하! 친왕, 군왕들께서 뵙길 청하옵니다.”
순간 영흥제는 멍해졌다. 불길한 예감이 더욱 진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 * *
청주, 포정사사.
하급 관리들이 들락날락하며 포정사 양공 탁자 옆에 전보를 쌓았다.
“완군이 함락되고 수비군 전군이 전멸했습니다. 대유 장진은 행적을 감추어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척광백은 반란군, 유민이 성을 멋대로 약탈하고, 학살하게 종용했습니다. 완군은 하룻밤에 폐허가 됐습니다…….”
“동릉에 인접한 곽현이 함락됐고, 수비군 대장 조광(趙廣)이 잔존 병력 2천을 데리고 철수했습니다. 손현기는 진영을 떠나 종적을 모릅니다…….”
“송산현이 함락됐고 비수군 절반 이상을 잃었습니다. 수비군 대장 죽균(竹鈞)이 부하를 인솔해 적군에 필사적으로 맞섰으나 죽었습니다. 허신년이 고족 잔존 병력 8백과 수비군 3백을 거느리고 철수하다가 도중에 추격해온 적장 탁호연을 맞닥뜨렸습니다. 허신년은 칼을 맞아 생사가 묘연합니다…….”
하룻밤 사이 청주의 두 번째 방어선이 전면적으로 무너지면서 청주군의 손해가 막심했다. 이로써 청주 고위층은 국면 장악력을 잃었고, 충격의 여파로 소란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양공은 깊이 숨을 들이쉰 후, 대당 내 모든 관원, 막료를 천천히 훑었다.
“여러분, 청주를 지키지 못하게 됐습니다. 본관은 옹주로 물러나 수비하기로 결정했소이다. 철수에 필요한 일을 준비하러 가십시다.”
철수에 필요한 일이라 함은 곡창, 군수품, 은냥을 비우고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도 포함이었다. 다만 그 백성이 단순한 하층 백성은 아니었다.
전례에 따르면 이주하는 백성은 향신과 사족(士族) 계층뿐이었다. 백성을 추구(*芻狗: 짚으로 만든 개)로 여겨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철저한, 손익을 따른 계산이었다.
전란 시기에 하층 백성은 특별한 가치가 없었다. 향신 귀족 계층은 돈이 있고 식량이 있고 사람이 있기에 그들을 구슬리면 조정은 상응하는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하층 백성은 아무것도 없었다.
냉정하게 포기해야 할 건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조정이 먹히고 끌려 다니다가 무너질 판이었다.
전 관원이 양공에게 예를 갖추고 대당을 떠나 각자 바삐 움직였다.
거대한 대당이 한순간 소리 없이 적막해졌다.
고요한 공간에, 격자 창 밖으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태양은 대당에 우두커니 앉은 포정사 대인을 비췄지만, 끝내 그의 그늘만은 덜지 못했다.
양공은 이 짧은 찰나, 10년은 훌쩍 나이가 들어버린 듯했다.
* * *
영흥 1년, 겨울. 청주는 함락되었다.
포정사 양공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옹주로 물러나 운주군과 대치했다.
시린 겨울, 온 천하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