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1041
1034화. 화신의 영온 (1)
황궁, 어서방.
영흥제는 운주 사절단이 이미 역참에 묵고 있다는 환관의 보고를 들었다. 그는 비로소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했다.
황제는 더 이상 아무렇게나 거닐지 않고 순금 의자에 착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조현진이 뛰어 들어와 큰 소리로 말했다.
“폐하! 허 은라와 임안공주마마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영흥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자가 뭐 하러 온 거지……?’
“들라 해라!”
조현진이 물러나고 몇 분 뒤, 청의를 입은 허칠안과 붉은 치마를 입은 임안이 함께 문턱을 넘어 어서방으로 들어왔다.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영흥제는 임안 얼굴에 핀 옅은 웃음을 보니 무거운 마음도 조금 풀리는 듯했다. 뒤이어 황제가 허칠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허 은라가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군. 어서 자리를 내고 차를 대접하라!”
허칠안은 바로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폐하, 정말로 평화 협정을 맺으실 것입니까? 운주 반란군의 기세가 드높은데 왜 굳이 이 순간에 평화 협정을 택했을까요? 그건 기회를 틈타 조정을 쥐어짜서 마지막 숨통을 조이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로 평화 협정을 맺는다면, 이제 더는 승산이 없어집니다.”
점차 영흥제 얼굴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허 은라는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자네를 옹주 총병(總兵)으로 봉하고 운주 반란군과 결사전을 펼쳐? 그럼 이길 자신 있는가? 짐은 허 은라가 뛰어난 수련 경지의 3품 무사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감정조차 그들의 손에 죽었는데 자네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허칠안이 말했다.
“폐하께서 믿어주신다면, 직접 전장에 나가 운주군과 함께 죽겠습니다.”
영흥제는 더 이상 인내심을 잃은 듯 언성이 높아졌다.
“짐이 원하지 않네! 평화 협정은 유일한 희망이야. 엄동설한을 견뎌내고 춘제가 오기만 기다리면 대봉은 자연스레 호전될 것이야. 그런데 굳이 이 시기에 운주 반란군과 함께 죽을 필요가 있겠는가.”
허칠안은 더는 말하지 않고 뒤돌아 떠났다. 영흥제는 지금 화의를 청해 전쟁을 멈추려는 마음뿐이었기에 설득은 근본적으로 소용이 없었다.
“개자식…….”
임안은 허칠안을 몇 걸음 쫓아가다가 돌연 멈춰서 성큼 뒤돌아섰다.
“오라버니, 왜 저 사람을 믿어볼 시도도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영흥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비웃었다.
“믿는다? 허칠안을 믿으면 대봉이 구제될 수 있느냐? 감정도 상대할 수 없는 적인데 허칠안 하나만으로 위급한 정세를 되돌릴 수 있다고?”
임안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오라버니께선 그냥 겁이 많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뿐입니다.”
“너……!”
영흥제는 충혈 된 눈으로 급기야 손까지 쳐들었다.
임안 역시 눈시울을 붉히며 그를 노려보았다.
영흥제는 결국 손으로 입구를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꺼져! 썩 꺼져라!”
* * *
회경이 오늘 운주 사절단이 경성에 들어온 경과를 상세히 얘기해주었다.
[사: 영흥제의 임계점을 떠보고 있군요. 에휴, 아직 만나기도 전에 임계점을 제대로 파악 당하다니요. 이렇게 화급하게 성으로 들이다니, 이건 평화 협정하고 싶다는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거 아닙니까?]초원진은 생각이 날카로워 운주 사절단의 동기를 단번에 추측했다.
[이: 이 개 같은 황제, 원경만도 못하다니! 대오를 이끄는 자는 누굽니까?]이묘진은 너무 화가 나 치가 떨렸다. 운주 사절단에도 화가 났고, 무기력하고 겁에 질린 영흥제한테도 화가 났다.
[일: 잠룡성주의 아홉째 아들 희원이라고 하네. 지금 내성 역참에 머물고 있고, 안팎으로 대군이 보호하고 있네. 금라 둘이 더 있고.] [이: 허칠안이 사람을 죽이러 갈까 겁내는 건가요? 허칠안은 아마 경성으로 돌아갔을 텐데.] [일: 지금 나와 함께 있네.]‘죽여버려, 진짜…….’
이묘진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 * *
황성, 회경부.
널찍하고 고상한 내청에 매화색 옷을 입은 장공주가 지서 파편을 내려놓고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그녀가 곧 맞은편 사내를 보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상황은 기부를 호소할 때와는 다르네. 자네가 설령 영흥 목에 칼을 들이대도, 그는 아마 굴복하지 않을 걸세. 제공들도 그렇겠지. 지금 경성 관리 사회에서 7할 이상의 경관이 평화 협정에 동의하네. 이게 대세야.”
방금 황궁에서 나온 허칠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위 원장님께서 이 만회할 수 없는 국면을 되살리려면, 대봉의 돈과 식량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원장님께서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건 내가 허평봉, 운주 반란군과 죽기 살기로 덤비면 조정이 틀림없이 무조건 지지하며 방해하지 못할 거란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영흥이 허칠안을 방해하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 후, 회경이 말했다.
“그는 확실히 좀 나약하네.”
허칠안은 손사래를 쳤다.
“그자 얘기는 하지 마시지요. 저는 무슨 일로 찾으신 겁니까?”
조금 전, 허칠안이 막 황궁을 나서려는데 회경의 시위가 만남을 청했었다.
회경은 잠시 침음하다가 말했다.
“얼마 전에 자네가 현 대봉의 쇠퇴하여 가는 형세를 만회하려면 3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말한 적 있었지. 하나, 초범 강자의 수가 반드시 같아야 한다. 둘, 돈과 식량 문제를 해결한다. 셋, 위 공을 되살린다.”
허칠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경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위 공을 되살리는 일은 자네가 이미 하고 있으니 춘제 때 자연스레 명확해지겠지. 돈과 식량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지만, 자네가 방금도 말했듯이 정말로 필요한 건 자네와 함께 물러나지 않고 사투를 벌일 제왕과 기꺼이 국운에 목숨을 걸 조정이네.”
허칠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회경은 가을 호수 같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흥이 퇴위하도록 압박하는 거지!”
허칠안은 이미 예상한 답이라 그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조정의 멸망만 더 가속화시킬 뿐입니다. 저는 마마께서 염친왕이 황위에 오르도록 돕고 싶어 한단 걸 압니다. 하지만 그는 이력과 신분이 부족하고, 세력도 부족합니다. 태평성대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은 인심이 흉흉합니다. 제가 다시 독불장군처럼 군다면 외려 인심을 운주 쪽으로 밀어 배신하고 도망칠 길을 만들어 줄 겁니다.”
허칠안이 이 고비를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망상을 해본다면 확실히 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도 돌아서 운주에 빌붙을 가능성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운주의 그 혈통 역시 분명한 대봉의 황족이었다.
회경이 느긋하게 말했다.
“넷째 오라버니께선 이력도 없고 세력도 없지만, 나는 있네.”
허칠안이 멍한 얼굴로 맞은편의 아름다운 회경을 쳐다보았다.
회경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단단한 눈을 반짝였다.
“전 위당이 전부 내 사람이네. 그리고 나 자신도 조정 관원을 적잖이 농락했어. 그들을 조합한다면 조당의 제일 큰 당이 되겠지. 왕당이라면 본 공주도 허 은라의 도움이 필요하네.”
허칠안은 그녀를 한참 응시하다가 탄식을 했다.
“마마, 저는 마마께서 비범한 인물이란 걸 진즉 눈치챘습니다. 하지만 마마께서 어느새 벌써 그런 규모의 세력을 키워냈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군요. 더 있습니까?”
기왕 말을 꺼낸 이상, 회경도 숨기지 않았다.
“금군5영, 경성 12위가 모두 내 사람이네.”
‘어쩐지 회경이 고수를 파견해 유랑민을 모았었지. 수중의 세력이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공포스러운데…….’
허칠안은 잠시 침음하다가 물었다.
“마마께 비장의 패가 더 있는 겁니까?”
회경은 찻잔을 받치고 입을 오므렸다.
“허 대인이 중요한 용기 5개를 수집했지. 운주 반란군 수중에도 1개가 있고. 남은 용기 3개는 다 나에게 있네.”
“뭐라고요? 어떻게요?”
허칠안은 듣고도 믿기지 않아 귀를 후볐다.
회경은 거리낌 없이 말했다.
“위 공의 첩자가 전부 내 손에 있네. 그가 그날 출정하기 전에 야경꾼 첩자 조직을 직접 내게 넘겼네.”
허칠안은 순간 눈을 감고 탄식했다. 물음표로 동여맨 답이 드디어 풀렸다.
‘어쩐지, 어쩐지! 좌도어사 류홍이 위 공이 남긴 첩자를 인수하지 않아 모른다고 했지. 야경꾼 관아 안독고에 첩자에 관한 정보도 일찍이 사라졌었고. 위 공께서 회경에게 넘겨준 거구나. 역시 난 친아들이 아니었어. 아니, 역시 난 주워온 아들이야. 여전히 첫사랑의 딸을 이길 수 없다니.’
회경은 허칠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말했다.
“용기를 수용하니 자연스레 복연이 깊고 두터워지더군. 내가 몸에 지닌 용기를 기반으로 하여, 조정 대신이든 군의 고수든 전부 적은 노력으로 많은 효과를 거두었지.”
허칠안은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마마께선 일찌감치 이 모든 걸 계획하셨군요. 원경이 죽은 뒤, 마마께선 희망을 본 겁니다. 그래서 암암리에 안배하며 신중히 도모하셨고요. 기회를 기다렸다가 영흥을 황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회경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네가 천지회 내부에 출신을 설명하고 운주 역당의 존재를 집어냈을 때부터, 또 선황이 몰락하고 용기가 뿔뿔이 흩어지면서 나는 영흥의 황위가 오래 가지 않을 거란 걸 알았네. 이처럼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에 내우외환이 겹쳤으니 황위를 안정시키고 혁신을 일으키려면 반드시 큰 패기가 있어야 하네. 하지만 영흥은 지나치게 평범해. 태평성대에서는 좋은 황제일지도 모르겠으나 난세에서는 나라와 백성에게 화만 미칠 것이야.”
‘너야말로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기회를 엿봤구나. 너랑 비교하면 나는 정말이지 너무 제멋대로였어…….’
허칠안도 회경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마마께선 염친왕이 영흥보다 더 잘할 거란 건 어찌 장담합니까?”
“당연히 방법이 있지.”
“좋습니다……. 마마의 상세한 계획을 말씀해보시지요.”
이후 해 질 무렵이 돼서야 허칠안은 회경부를 떠났다.
* * *
허칠안은 사천감으로 돌아와 부상을 치료하는 손현기를 병문안한 뒤, 4층 객실에 이르렀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봄처럼 따뜻한 방에 모남치가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있었다. 백희는 침상에 웅크려 단잠에 빠져 있었다.
모남치는 막 목욕한 듯 머리카락이 축축하고 몸에서 그윽한 향기가 났다.
허칠안은 식물성 기름종이로 감싼 간식을 화장대 옆에 두었다.
“복숭아꽃 과자를 좀 샀어요. 마마께서 이걸 좋아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디 갔다 왔지?”
모남치는 과자엔 눈길도 두지 않았다. 그녀가 슬그머니 냄새를 맡아보니, 허칠안에게서 쉬이 눈치채기 힘든 여인의 그윽한 향기가 났다.
뭐, 간식 하나면 다 될 줄 알았나?
허칠안은 침상 옆에 앉아 장화를 벗으며 말했다.
“오늘 운주의 평화 협상 사절단이 경성에 들어왔어요. 황궁에 가서 영흥제를 만났는데 권유를 듣지 않더군요. 그 후에 장공주마마와 공무를 논의했습니다. 일단 평화 협정이 이뤄지면 대봉은 정말 만회할 힘이 없을 거예요.”
그가 미간을 문지르며 탄식했다.
‘그리고 몸에 국운이 있는 너는 죽게 되겠지…….’
모남치는 다시 그 간식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사내는 이 어려운 시기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잊지 않고 사다주었다.
그 마음의 가치를 돈으로 매길 수 있을까. 아무리 달콤한 말로 사랑의 맹세를 한다고 한들, 천금을 뿌리며 웃음을 짓는다 한들, 이 사소한 정성보다 다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장화를 다 벗은 허칠안은 천천히 침상에 누워 두 팔로 뒷머리를 벴다.
만약 계획이 잘 풀리면 조위가 제시한 4대 요점 중 둘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위연 부활과 후방 안정화.
하지만 기사가 되는 건 제안이니 그 자체로 완성도는 없었다.
‘4황자가 황위에 올라 나를 지지해주기만 하면 운주와 죽기 살기로 싸우는 거야. 그럼 전량의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해도 대봉의 국력을 짜내서 가까스로 버텨나갈 수는 있을 거야.
지금 유일한 문제는 내 수련 경지가 너무 약하다는 건데……. 2품과 교전할 수는 있지만, 1품을 마주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무조건 죽어. 그리고 내 앞을 막는 건 봉마정이지.’
봉마정은 단순한 뚝심만으로 풀 수 없었다. 아소라처럼 봉인을 해제하는 구결과 비법을 알고 있지 않은 이상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못이 하나만 박혔어도 스스로 직접 제거할 수 있었을 텐데.
‘허평봉……. 진짜 온갖 수를 다 부리는구나…….’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 허칠안이 갑자기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홀연 코끝에 그윽한 향기가 훅 끼쳤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