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1047
1040화. 승직 (4)
백희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곧 백희는 두 발을 들어 검은 단추 같은 두 눈을 비빈 후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을 살피니 이곳은 부도보탑 안이었다.
남쪽과 서쪽에 각각 금신법상이 있고, 동쪽 차 탁자 옆에는 흰 수염의 노승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백희는 비틀거리며 탑령 노승을 향해 걸어갔다.
“우리 이모는요?”
탑령 노승은 백희를 자세히 보며 온화하게 말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백희는 꼭 숙취에 찌들어버린 사람처럼 휘청휘청했다. 오늘따라 백희의 앳된 목소리가 참 모순적이게 느껴졌다.
“어젯밤 꿈에서 바다를 떠돌고 있었는데 배가 흔들리고 또 흔들렸어요. 깨고 싶은데 깰 수가 없어 정신이 혼미했지요. 이모가 울며 외치는 소리도 들었어요. 누군가한테 맞은 것 같았는데…….”
백희는 모남치가 뭔가에 계속 부딪히는 듯, 누군가에게 맞는 꿈까지 꿨다. 너무 화가 나 바로 복수해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해도 깨어날 수 없었다.
백희의 얘기를 조용히 다 듣고, 탑령 노승이 이야기했다.
“너는 이곳에 보내졌지만 허 시주와 모 시주는 들어오지 않았단다.”
말하는 동시에 그는 약사 법상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법상 손에 받친 옥병에 넘치는 자질구레한 빛이 백희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새끼 여우는 편안히 바닥에 뒹굴더니 부드러운 뱃가죽을 드러냈다. 그렇게 천천히 몸을 일으킨 후 매우 기뻐했다.
“정말 편안해요! 머리가 어지럽지 않아요. 감사합니다, 대사님!”
탑령 노승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합장한 채 고개를 떨궜다.
여우는 바로 노승 옆에 있는 부들방석에 뛰어올라 몸을 웅크린 채 모남치의 소환을 기다렸다. 하지만 다시 기다림은 길어지고, 백희는 또 잠들었다.
* * *
이튿날, 묘시(*卯時: 오전 5~7시).
오문 밖에 횃불이 활활 타올랐다.
본디 여명 전 하늘빛이 가장 어둡기에, 아직은 빛이 필요했다.
지금 오문 밖에는 문무백관이 조회를 기다리며 조용히 집결해 있었다.
* * *
같은 시각, 역참.
희원은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방에서 걸어 나왔다.
허원상과 허원괴는 이미 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밖에도 협상단에는 항렬과 학식이 아주 높은 노인이 4명 더 있었다. 다들 혈기왕성하고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현재는 숨을 죽이고 있지만 당장이라도 금란전으로 날아가 대봉 황제를 억누르고 운주의 위풍을 떨치지 못하는 게 한스러운 듯했다.
곧이어 간단한 아침 식사 후, 희원은 6명과 함께 문을 나섰다.
* * *
역참 뜰을 걷던 중, 희원은 은라 차림을 한 청년이 자신을 냉랭하게 주시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목구비도 준수하고 활달한 분위기의 청년이었다.
희원은 먼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대인,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송정풍이오.”
그 은라의 어조는 표정만큼이나 쌀쌀맞았다.
“이름이 좋군요.”
희원은 무심히 한마디 한 후, 계속 미소를 띤 채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소생이 어느 부분에서 송 대인의 미움을 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제부터 송 대인께서 본 공자를 보는 눈빛이 아주 좋지 않더군요.”
송정풍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찌 대단하신 철천지원수에게 좋은 얼굴을 할 수 있겠소.”
희원이 혀를 찼다.
“쯧쯧, 이따 금란전에서 그대들 대봉의 황제를 만나거든 야경꾼 은라 송정풍이 저를 철천지원수로 보고 본 공자를 암살하려 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송 대인께선 그대들 황제가 이를 어찌 처리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송정풍의 안색이 변했다.
희원은 조용히 냉소를 지었다.
“일개 은라인 자네도 나를 철천지원수로 여길 자격이 있을까?”
송정풍은 아무 내색 없이 냉담하게 말했다.
“여긴 운주가 아닌 경성이오. 귀하께서 고자질하려거든 얼마든 하시오. 만약 정말로 감히 그렇게 나온다면 이 몸도 당신이 인물임에 탄복하겠지. 그러지 못한다면 당신을 그저 약골에 겁쟁이로 알겠소만.”
그는 포악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으로는 칼을 눌렀다. 희원에게 조금도 기세가 눌리지 않았다.
‘모자란 사람인가……?’
허원상은 의아한 눈으로 송정풍을 자세히 살폈다. 지금 정세로 따지자면 대봉 황제, 제공들 모두 평화 협정해 휴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대봉 고위층 전체가 모두 감정이 ‘몰락’한 일로 겁에 질렸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감히 운주 사절단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떳떳하다는 건 좀 모자란 사람이거나 분명 뒷배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설령 조당 제공들이 뒷배가 되어준다고 해도 희원을 화나게 한다면 절대로 무사하지 못할 텐데…….
“방자하다!”
희원이 채 입을 떼기도 전에, 옆에 있던 운주 관원들이 격노했다.
“감히 구공자님께 그리 말하다니! 잘려도 되는 머리를 몇 개라도 가지고 다니는 것이냐! 대중 앞에서 평화 협정 사절을 모욕하는 그 죄만으로도 당장 너를 감옥에 쳐넣을 수 있거늘, 비열한 무사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탁!
희원이 부채를 펴고 송정풍을 자세히 살피며 웃었다.
“아, 보아하니 뒷배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말해보시지요, 친히 들어줄 터이니. 본 공자는 누가 대인더러 역참에 잠복하여 평화 협정을 깨고 반란을 꾀하라 지시했는지 알고 싶군요.”
그는 함부로 누명을 씌우겠다고 작정했다. 만약 송정풍의 뒷배가 평범하거나 아예 있지도 않다면 운주 사절단의 이 고발만으로도 당장 그를 하옥시켜 죄를 물을 수 있었다.
희원은 어제 들어올 때부터 송정풍을 주목했다. 역참을 지키는 모든 야경꾼 중, 오직 저 송정풍만 감히 거리낌 없이 적대감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희원 역시 일개 은라와 소동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자신의 바로 코앞에서 방자하게 구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허원상이 눈살을 찌푸리다가 하늘색을 살폈다.
“아홉째 오라버니, 가요. 시간 다 됐어요.”
그러자 희원 뒤에 비포를 입은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몇 마디 한다고 방해되지 않네. 게다가 이는 이유도 있는 일 아닌가? 대봉 조정이 물어보면 우리도 사실대로 말하면 되네.”
이는 은라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함이자, 일부러 늦게 도착하여 조당 제공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줄 수도 있었다.
가볍게 던진 말이 먹히지 않자, 허원상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때, 송정풍은 다시금 냉소를 짓고, 여전히 칼자루를 누른 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못된 말을 내뱉은 건 아니었으나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탁!
희원은 부채를 접고 송정풍을 쳐다보았다. 이 보잘것없는 인물한테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수중에 대봉 황제를 굴복시킬 승부수가 있기에 일개 은라는 상대하고 싶은 대로 상대하면 됐다.
역참을 나서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송정풍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퉤!”
옆에서는 당직을 서던 몇몇 동라가 다가왔다. 감복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장! 방금 정말 위풍당당했습니다.”
뒤이어 한 동라가 걱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대장, 이러면 문제를 일으키는 거 아닙니까?”
야경꾼의 소식통은 워낙 빠르기에, 다들 황제와 제공들 태도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청주는 함락되고, 국고는 텅 비었으며, 감정이라는 신선 인물조차 청주에서 전사했다.
식견이 있는 자들은 이렇게 싸우다간 조정이 반드시 끝장날 거라는 걸 알았다. 가능하다면 당연히 싸우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다. 이 시점에 평화 협정은 황제와 제공들에게 귀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송정풍은 이 중요한 시기에, 운주 사절단의 미움을 샀다. 누가 봐도 아주 비이성적인 태도였다.
이내 송정풍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전에 자네들에게 어찌 얘기했던가? 허칠안은 내가 직접 데리고 나온 사람이네. 지금 아무리 벼락출세했어도 만나면 아직도 날 송 형이라 부르는데 고작 이처럼 사소한 일에 내가 두려워할 필요 있겠는가? 사절단은 무슨 얼어 죽을 운주 사절단인가! 경성에 들어오자마자 거들먹거리며 과시하는 꼴하고는. 만약 그해 이 몸이 운주에 있을 때라면, 허칠안과 주광효 두 아우를 데리고 두말없이 단칼에 그를 직접 베었겠지.”
새로 들어온 몇몇 동라는 반신반의했다. 물론 송정풍이 줄곧 허칠안과 친분이 두텁다며 허풍을 떨어대서 사적으로 다른 선배를 찾아가 물어본 결과 당시 송정풍과 허칠안, 주광효가 가깝게 지냈다고 말하긴 했었다.
하지만 다들 송정풍이 워낙 허풍 떠는 걸 좋아하니 분명히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봤다. 예를 들자면 평소 송정풍이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허칠안은 취미가 있는데 하루라도 기루에 가지 않으면 매우 괴로워하네. 더더욱 당직 때 가는 걸 좋아하지. 나와 주광효처럼 단정한 사람은 순찰해야겠다고 가지 않겠다고 하는데, 결국 억지로 이끌려 가게 되네. 왜 굳이 당직 설 때 가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저녁에 허칠안은 교방사로 가 부향 낭자를 만나야 하니 다른 때엔 기루에 갈 시간이 없는 거지.”
웃기지 않은가? 허 은라가 교방사에서 기녀와 잠자리할 때 돈을 주지 않는다는 건 경성 사람이 다 알았다. 그런데 고작 기루가 그의 눈에 찰까.
그래서 은라들은 송정풍의 말을 딱 3할만 믿었다.
* * *
금란전.
공무 논의는 이미 끝났다. 영흥제는 초조한 마음을 억누른 채 겉으론 아무 내색 없이 장인 태감 조현진을 쳐다보았다.
조현진은 황제의 의중을 읽고, 목소리를 높였다.
“운주 사절단 알현을 선포한다!”
그러나 한참을 조용히 기다려도 금란전 밖은 아무 움직임 없이 조용했다.
“운주 사절단 알현을 선포한다!”
여전히 기척이 없었다.
조현진은 엄숙한 얼굴의 황제를 돌아봤다가 순간 이마에 약간 땀이 났다. 그는 황제를 향해 허리를 굽히곤 밖으로 빠르게 상황을 알아보러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현진이 종종걸음으로 되돌아왔다.
“폐하, 운주 사절단이 아직 입궁하지 않았습니다.”
영흥제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조현진은 다른 설명 없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이미 사람을 보내 청하러 갔습니다.”
영흥제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일각(*一刻: 15분) 더 기다리지.”
“네!”
금란전 내 제공들은 둘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무슨 상황인지는 짐작했다. 운주 사절단이 ‘어물쩍 늦게 와’ 시간을 지체했음이 틀림없었다.
제공들은 모두 질풍노도를 겪은 자들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조용히 평가가 치러지고 있었다.
운주 사절단의 지도자는 희원이란 청년으로 잠룡성 성주의 아홉째 아들이었다. 혈통으로 따지자면, 그 역시 대봉 황실에 속했다.
제공들도 이 구공자의 일 처리 풍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자신을 과시했으며 포악하고 격한 성미의 소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