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1048
1041화. 운주의 조건
그래도 다행히 일각이 채 되지 않아 희원이 도착했다.
희원의 일행은 환관의 안내를 받으며 금란전에 발을 들였다.
제공들은 잇따라 고개를 돌려 막 안으로 들어온 청년을 주시했다.
희원은 옅은 남색의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구름무늬가 수놓인 옷에, 허리에는 서로 땡그랑 부딪치는 장신구가 있었다. 이목구비도 그에 못지않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미남이었다.
그의 뒤로 비슷한 용모의 소년 소녀가 뒤따랐다. 각각 냉담하고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이들이었다.
더 뒤로는 관포를 입은 여섯 노인이 있었는데 둘은 기러기가 수놓인 비포를, 넷은 흰 꿩과 백로가 수 놓인 청포를 입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관포는 의심할 여지없이 영흥제와 제공들의 민감한 심기를 건드렸다. 일개 운주 사절단이 정식 관포 차림이라니, 그게 무슨 의미인가?
“운주사 희원, 폐하를 뵙습니다.”
희원은 미소를 머금고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는 귀티가 나면서도 점잖은 기운이 묻어났다.
영흥제는 고개를 끄덕이곤 우렁차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희 대인이 운주를 대표하여 경성에 평화 협상하러 왔으니 짐이 가장 큰 예우로 대했는데 도착이 늦었구려. 이것이 운주 측의 성의요?”
황제는 진지한 얼굴로 금란전 아래의 희원을 내려다보았다.
희원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웃으며 읍하였다.
“정말 소생의 본의가 아닙니다. 출발하기 전, 역참 은라에게 괴롭힘 당하고 모욕을 당해 시간이 지체된 것입니다. 본관은 성의를 품고 왔으나 일개 은라가 감히 본관을 사나운 눈초리로 냉대하며 경멸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희원, 감히 뻔뻔하게 폐하께 여쭙겠습니다. 이게 바로 대봉의 평화 협상 성의입니까?”
허원상, 허원괴 남매는 옆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남매도 희원의 말솜씨를 아주 잘 꿰고 있었다. 아마 일각이 아니라 한 시진(*一時辰: 2시간)을 늦었다 해도 그는 아주 명백하게 규명할 수 있을 터였다.
희원은 지각도 본인이 하고, 상황도 알아서 타개했다. 황제의 기세를 단숨에 꺾은 데다, 자신에게 함부로 덤빈 송정풍에게 누명도 씌웠다.
만약 영흥제가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희원의 피해를 그냥 등한시하겠다는 것이며, 제대로 약점을 남기는 것이었다.
영흥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침음하다가 입을 뗐다.
“어떤 자가 희 사절을 괴롭히고 모욕했단 말이오?”
희원이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은라 송정풍입니다.”
영흥제는 머릿속으로 한 차례 훑었으나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그는 첫째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그 은라 배후에 누군가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평화 협정을 깨려고 나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당연히 은라를 처리하는데 주저할 필요는 없었기에, 황제는 바로 분부를 내리려 했다.
그때, 우도어사 류홍이 나섰다.
“폐하, 분명히 오해가 있을 것입니다.”
희원 뒤에 비포를 입은 관원이 바로 반박했다.
“대인의 말뜻은 저희 희 대인께서 함부로 모함한다는 것입니까?”
류홍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송 은라는 충성심이 강하고 의리가 있습니다. 운주에서 반란군 무리를 토벌할 때 허칠안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공로를 세운 자입니다. 허칠안이 은라로 있을 때 유능한 조수였었지요. 그런데 어찌 운주 사절단을 일부러 모욕하고 괴롭히겠습니까? 거기에 분명 까닭이 있을 테니 폐하께서는 부디 철저히 조사해주시길 바랍니다.”
영흥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류 경의 말이 옳네. 짐이 명명백백히 조사해 희 사절에게 설명하겠네.”
조사? 굳이 무슨 조사가 필요한가?
류홍은 송정풍이 허칠안의 사람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야말로 송정풍의 뒷배는 엄청났다. 그가 사람을 죽이거나 방화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기본적으로 늘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물론 영흥제도 이런 사소한 일로 허칠안과 사이를 틀 리는 없었다. 나중에 사람을 보내 송정풍에게 경고하고 야경꾼 관아로 돌려보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하던 희원은 비로소 진상을 깨달았다. 송정풍이 그처럼 내일 없이 방자했던 데엔 이유가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대봉 제일 무사를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럼 폐하께 감사드립니다.”
결국 희원은 더 물고 늘어지지 않고 적당한 시기를 봐서 물러났다.
이유는 분명했다. 황제가 이 소소한 일로 허칠안의 미움을 살 리가 없었다. 여기서 더 붙잡고 늘어져봤자 재미없어지는 건 희원 쪽이었다.
군주를 알현하러 뒤따라온 여섯 관원도 모두 경악하여 서로 눈을 마주쳤다. 어쩐지 일개 은라가 그리 멋대로 군 데엔 이유가 다 있었다.
다들 여전히 속으로 풀만을 품고 있었으나 지금은 평화 협정의 일이 더 중했다. 그 변변치 않은 사람과는 더 이상 승강이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한 차례 한담을 나누고 입씨름도 했으니 다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희원이 먼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겨울이 된 이래, 저희 운주는 대봉과 2달간 교전하느라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양측 장병 역시 사상자가 막심하지요. 본관은 명을 받들고 평화 협정하러 경성에 왔습니다. 폐하와 제공들의 대의에 입각하여 평화 협정에 동의하오니…….”
평화 협정의 구체적인 절차는 우선 주 기조를 정하고, 홍려사가 담판을 책임지고 지엽적인 문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만약 일이 매우 중대하다면 예부 역시 여기에 참여했다.
이 과정은 황제가 매일 담판 흐름을 볼 수 있게 제출해야 했다. 최종 결과 역시도 황제와 제공들이 상의한 뒤에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오늘 정하는 건 바로 ‘주 기조’로, 먼저 담판 골조를 세우는 것이었다.
일장연설이 끝난 후, 희원이 말했다.
“저희 운주 대군은 파죽지세로 이미 청주를 점령했고, 대봉 감정은 보름 전에 순국했습니다. 하지만 아바마마께서는 인자한 마음을 지니고 계시어 백성들이 더는 고통스러워하는 걸 지켜볼 수 없어 대봉과 평화 협정을 원하십니다. 따라서 대봉은 저희의 4가지 조건을 응해주셔야 합니다.”
‘아바마마……. 감정 몰락…….’
영흥제는 조용히 희원 뒤에 관포를 입은 운주 관원 몇몇을 훑었다.
잠룡성주는 이미 운주에서 황제라 칭해졌다.
깊이 숨을 들이쉰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희 사절, 말씀하시오.”
“첫째, 대봉은 매년 운주에 공물로 은 50만 냥, 견직물 60만 필을 바칩니다. 평화 협상을 마친 뒤 바로 효력이 발생하니 본관은 우선 올해 공물을 가지고 돌아가겠습니다.”
희원이 말을 마치자마자 호부상서가 뛰쳐나와 질책하였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두 눈 뜨고 허튼소리를 하는구나! 백은 50만 냥? 견직물 60만 필? 너도 참 뻔뻔하게 큰소리치는구나!”
호부상서가 발을 동동 구르는 데도 이유가 있었다.
지금이 태평성대라면 아무 상관없었다. 하지만 현재는 국고가 텅 빈 상태였다. 조정 운영, 군비 지출도 애써 버티는 상황에 이재민을 구휼할 전량도 없는데 한꺼번에 백은 50만 냥을 가져가려 하다니.
그럼 운주는 전쟁할 필요도 없이 조정이 무너지는 걸 편히 앉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이게 어디 평화 협상이란 말인가! 일부러 나쁜 마음을 먹고 대봉을 압박해 죽이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호부상서는 영흥제가 ‘경제’를 알지 못하고 무모하게 응할까 봐 우선 뛰쳐나와 내질러버렸다.
탁!
희원이 부채를 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원 토지는 풍요로운데 고작 50만 냥이 대수랍니까.”
그러다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설마 조정은 이미 백은 50만 냥조차 내놓을 수 없게 된 겁니까?”
가슴이 철렁한 호부 상서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대봉은 국력이 막강하다. 어찌 너 같은 애송이가 가늠할 수 있겠느냐.”
“아, 그렇다면 대봉은 평화 협상의 뜻이 전혀 없는 것이군요.”
희원은 대답을 강요했다.
‘저놈, 말에 가시가 돋쳤군…….’
제공들은 남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50만 냥. 조정의 1년 세수입과 비교하면 별 것 아닌 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이지 않은가.
조정 운영과 군비 지출에만 해도 엄청난 은냥이 필요했다. 이미 가난해진 조정은 다시 경작이 시작될 봄날만 기다리는 가련한 신세였다.
이때의 평화 협상이란 살기 위한 생존의 빛이었다. 그러나 운주는 이 협상을 통해 대봉을 죽음의 길로 내몰려 하고 있었다.
조정이 그 터무니없는 조건에 응할 수 없는 건 당연지사였다.
“짐은 운주와 평화 협상할 용의가 있소. 그러나 보아하니 운주는 조정과 평화 협상하길 원치 않는 듯하오만.”
영흥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희원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폐하, 지금 저를 곤란하게 하시는 겁니까? 아시다시피 저희 운주군은 기세가 드높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천하 백성을 염려하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이미 성 밑까지 진격하셨을 겁니다. 저희 운주는 이토록 평화 협상에 진심입니다. 조정의 눈에는 어찌 거지에게 적선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까?”
희원은 다시 운주의 우세를 언급하며 이것이 대등한 위치에서의 협상이 아님을 암시했다. 이에 영흥제와 제공들 모두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희원이 또 갑자기 탄식을 내뱉었다.
“됐습니다. 본관이 멋대로 주장했으니 한발 물러나지요. 올해 공물은 절반으로 깎아드리겠습니다. 단, 내년에는 꼭 메우셔야 합니다.”
영흥제는 조용히 한숨을 쉬곤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세칙 방면은 홍려사와 희 사절의 절충에 맡기겠소.”
소위 세칙이란 계속해서 흥정하고 입씨름하는 것이었다. 금란전에서는 그저 대략적인 것만 의논했을 뿐, 지엽적인 문제는 논하지 않았다.
허원상은 묵묵히 대화를 들으며 이제 희원의 방식을 거의 다 파악했다.
어젯밤 희원은 갈문선과 소라로 전음하면서 대봉 황제와 제공들의 생각과 대략적인 감당 능력까지 미리 논의하고 분석했었다. 결론은 백은 20만에서 25만 냥 사이가 한계였다. 거기서 견직물은 또 별도로 계산한 결과였다.
출발하는 길에 허원상은 아무래도 첫 번째 조건이 ‘악전’이겠으나 희원의 언변으로는 분명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거라고 봤다.
지금에야 허원상은 자신이 희원을 얕잡아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저렇게 정확하게 추산한 거지……?’
허원상은 순간 생각이 번뜩였다. 어제 그가 유난히 경성 밖에서 거드름피우던 그때, 이미 탐색을 다 끝낸 것 같았다.
첫째 조건을 대략 확정한 뒤, 희원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두 번째 조건, 아바마마께서는 폐하께서 포고문을 널리 붙여 우리 운주 혈통 역시 중원의 정통임을 인정할 수 있길 바라십니다.”
제공들은 침착한 편이었다. 굳이 뛰쳐나와 노발대발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 중원의 정통들은 달랐다.
“업신여겨도 유분수지! 너희 역적이 중원 정통이라 불릴 자격이 있단 말인가! 그저 왕 노릇을 하는 도적일 뿐이거늘!”
평상복을 입은 누군가 대열을 성큼 이탈해 언성을 높였다.
원경제의 아우, 건친왕(乾親王)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여러 군왕과 친왕도 잇따라 대열을 나와 맞장구쳤다.
확실히 제공들의 반응과는 달랐다. 황족의 태도는 아주 격했다. 중원 혈통이 중원의 정통이면, 자신들은 역적이란 말인가!
사실 굳이 깊게 따지고 들면 정말 그랬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 대봉 황실은 더더욱 이를 인정하고 양보하려하지 않았다.
이내 희원이 싸늘한 얼굴로 친왕, 군왕들을 담담히 훑어보았다.
“그해 무종 황제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는지 잘 모르시는 겁니까? 우리는 그저 우리의 신분과 지위, 인지상정인 이치를 되돌리려는 것뿐입니다.”
건친왕도 결코 굽히지 않았다.
“500년 전, 무도한 혼군이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하며 충성스러운 자를 잔인하게 해쳤다. 무종 황제는 선조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나선 것이고 그것이 민심에 순응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