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1049
1042화. 일패도지(一敗塗地)
희원은 날카롭게 맞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선황제 원경은 아둔하고 무능한 데다 인종 도사의 미색에 빠져 20년이나 도만 닦으며 정무를 아랑곳하지 않아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이에 저희 운주 혈통은 선조의 가업이 혼군의 손에 망가지는 걸 참을 수 없어 거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 또한 하늘의 이치는 명백하고 민심에 순응하지요.”
“터무니없는 말을 늘어놓는구나! 폐하, 이 자를 당장 참수하십시오!”
여러 친왕과 군왕이 격노했다.
만약 제공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이는 주저할 필요도 없이 응했을 조건이었다. 실질적인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어서였다.
조정이 혈통을 인정하면 운주 반역자 무리는 일단 명분이 섰다. 백성들이 귀순할지는 그다음 문제였다.
대봉 조정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건 향신 지주나 지방 관원들이 떳떳하게 변절하는 것인데, 운주가 중원의 정통이 된다면 엄연히 배반은 아니었다. 본디 충렬지사가 되어 죽는 것보다 굴복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지 않은가.
사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현재 대봉은 승산이 없었다. 관원들의 배반도 시간문제라고 봐야했다.
그래서 제공들은 이에 대해 큰 위화감이 없었지만, 황실은 운주를 중원 정통으로 인정하는 것이 백은 50만 냥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는 선조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의논하지!”
영흥제가 굳은 얼굴로 분위기를 정리했다.
어쨌든 이 논의는 주 기조를 정하는 것이고, 세세한 것은 단기간 내 결과를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황제는 우선 이 일은 이쯤에서 일단락 짓고 후일로 미루고자 했다.
그러나 어찌 알았을까. 희원이 극도로 강하게 나올 줄은.
“떠나기 전 아바마마께서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이 조건에 응하지 않으신다면 평화 협정은 계속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요.”
희원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나왔다. 영흥제가 이 조건을 승낙하지 않으면 이대로 평화 협상을 중지하겠다고 했다.
운주는 이 일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허황된 망상이군! 본 왕도 조정이 절대 용납지 않으리라 장담하겠다만?”
예왕도 나섰다.
희원은 천천히 뒷짐을 지고 탄식을 뱉었다.
“본관은 이미 공물 방면에서 크게 양보해 조정의 체면을 충분히 세워드렸는데 이런 보답을 받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만. 당신들은 정녕 우리 운주의 10만 정예 기병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까!”
희원이 결국 얼굴을 굳히며 분노로 일갈했다.
먼저 구실을 삼도록 선수를 치고 힘을 쓴다. 그다음 허리를 꼿꼿이 펴고 친왕과 군왕이 은혜도 모르고 생떼를 쓰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작전이었다.
“그럼 먼저 너를 죽여 제기(祭旗)로 삼겠다!”
한 군왕이 소리쳤다.
희원은 냉소를 지었다.
“본관이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경성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번 협상에서 운주의 진정한 목적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대봉이 영토를 할양하고 화의를 청하도록 압박하여 본거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획득한 본거지가 많을수록, 국사 허평봉이 단련하는 기운이 많을수록 천명사와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희원이 이 두 번째 조건을 잡고 늘어지는 건 언뜻 보면 경중을 뒤바꾼 것이지만 사실은 영흥제가 응하리란 걸 확신한 것이었다.
실익과 생사존망을 나란히 놓았을 때, 어느 누가 가문의 명성을 택할까.
제공들 역시 핵심이익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니 반대 정서가 높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는 그냥 남의 집안싸움 아니던가. 몇몇 황족이 아무리 아우성친다 한들 그저 무능한 격분에 지나지 않았다.
조용히 희원을 주시하던 영흥제가 힘주어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좋다, 승낙하지.”
금란전 내 황족들은 안색이 급변했다.
“폐하!”
영흥제는 손을 들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친왕과 군왕을 압박했다.
“짐의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예왕을 비롯한 모든 황족은 영흥제의 눈빛을 보곤 실망감에 휩싸였다.
영흥제는 다시 고개를 돌려 희원을 쳐다보았다.
“세 번째 조건은 무엇이오?”
희원이 눈빛을 번쩍이며 우렁차게 외쳤다.
“대봉은 옹주, 우주, 장주를 저희에게 할양하십시오.”
순간, 금란전에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듯했다.
그러나 짧은 침묵 후에 바로 떠들썩한 소리가 일었다. 황제와 제공들 모두 운주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는 짐작했지만 욕심이 이렇게까지 클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무려 영토 할양까지 요구하다니!
양측은 이렇게 오랫동안 죽기 살기로 싸웠고 대봉은 청주를 잃었다. 그런데 이제 와 평화 협정으로 피 한 방울 없이 땅 3주(州)나 가져가고 싶다고?
재상 전청서가 대열을 나와 차가운 눈빛으로 희원 등을 훑으며 말했다.
“비록 청주가 함락됐지만, 대봉은 여전히 11주(州)의 영토가 있고, 군사력도 강하다. 대봉이 정말 비좁은 너희 운주 땅을 두려워하는 줄 아는가! 폐하께서 너희와 평화 협정을 원하는 건 백성들이 더는 전쟁의 불길로 해를 입지 않길 바라시는 마음이다. 절대 너희 운주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니라!”
희원이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니라면, 추수 전 위연이 10만 정예병을 이끌고 무신교를 토벌하다가 하마터면 전군이 전멸할 뻔했습니다. 그리고 겨울에 들어선 뒤, 조정은 다시 9만 대군을 집결해 우리 운주 장병과 청주에서 격전했으나 절반 이상을 잃었지요.
서북 3주의 병력은 서역 연합군의 교란을 막는 데 쓰느라 남쪽 전쟁을 지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군사력이 강하다고요? 참 대단한 군사력이십니다! 감히 전 재상께 여쭙겠습니다. 지금 조정에 운주와 전쟁을 치를 병력이 더 있습니까?”
희원의 한 마디로, 제공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절대 인정하기 싫지만 이미 그들은 정곡을 찔렸다.
서쪽 뇌주의 전쟁은 전혀 심각하지 않고, 서역 각국 연합국이 교란의 주범이었다. 작은 전투가 끊이질 않지만, 어쨌든 큰 전쟁은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불문을 견제하는 남강 요족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만일에 대비했을 때, 확실히 대규모 병력 배치는 불가능했다.
전청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가 콧방귀를 뀌며 옷소매를 터는 것을 보고 제공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재상마저도 망신을 당했는데, 여기서 뭘 어떻게 반박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호부시랑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잘못 기억한 게 아니라면, 원경 30년에 운주에 등록된 백성은 83만 호인데 감히 희 사절에게 묻겠소. 운주는 10호마다 군사를 키우는 것이오, 20호마다 군사를 키우는 것이오? 10만 정예 기병은 대체 어떻게 생긴 거지?
뭐, 운주에 정예 기병이 얼마나 있는지는 그리 된 까닭이 있을 수 있겠지. 말라 죽은 낙타는 말보다 큰 법 아닌가. 대봉이 아무리 쇠약해졌다 해도 그 운주 정예병쯤 모조리 해치우는 건 아무 문제도 아니오.”
호부시랑은 전량, 호적, 인구 등의 수치에 가장 민감했다.
뒤이어 좌도어사 류홍이 즉시 대열에서 나와 맞장구쳤다.
“마지막 결말은 그저 쌍방이 손해를 입는 것에 지나지 않소. 그리고 무신교가 옆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불문의 맹우도 정말 자네들 운주에 간이라도 꺼내줄 듯 구는 게 아닐 것이오.”
좌중이 한바탕 큰 소리로 웃었다.
웃음소리에 잠시 말이 끊겼으나 희원은 다시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류 대인, 3살짜리 아이를 속이고 싶은 겁니까? 본관 앞에서 세치 혀를 놀려 개념만 슬쩍 바꾸는 게 너무 가소롭다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다음으로 희원이 호부시랑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또 어떠하단 말입니까? 지금 청주는 이미 저희가 지배했고, 유랑민들은 모두 병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운주 정예병과 죽기 살기로 싸우고 싶으면 얼마든 와서 시도해보시지요. 또한 감정은 이미 저희 국사가 청주에서 베었습니다. 이 수호신이 없으면 어디서 난 저력으로 우리 운주 정예병을 박살 낼 거라고 말하는 겁니까?”
결국 이 화제까지 언급되었다. 황제와 제공들이 겁에 질린 건 바로 감정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는 잠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 무시무시한 초범 강자가 당장이라도 꿈에서 머리를 떼 갈까 공포에 떨던 날들이었다.
이내 형부 손 상서가 반박하고 나섰다.
“감정은 죽었으나 대봉에 초범 강자가 없는 건 아니오. 사천감의 손현기, 국사 낙옥형, 운록서원 원장 조위. 그리고……. 허칠안이 있소!”
“맞습니다! 저희에게는 허 은라도 있지요.”
누군가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것처럼 맞장구쳤다.
희원은 그저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뒤에 비포 입은 관원이 비웃으며 말했다.
“감정조차 우리 국사의 손에 죽었는데 고작 3품인 허칠안이 교전할 자격이나 됩니까? 보아하니 우리 구공자께서 지나치게 겸손하여 여러분이 우리 운주가 대봉을 두려워하는 줄 아는군요.
평화 협상하고 싶으면 당장 저희의 조건에 응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자연스레 우리 운주의 강자가 경성에 진격해 여러분을 죽일 겁니다. 그 후에는 운주 대군이 성 밑까지 쳐들어와 중원의 통치자가 되겠지요. 지금 여러분에게 다른 선택이 있습니까?”
결국 속셈이 드러났다. 체면을 구기는 건 담판에서 필수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늘 그랬듯 강한 쪽이 승부수를 쥐고 압박을 가해왔다. 이제 영토는 반드시 할양해야 하는 것이고, 얼마나 할양할지가 세칙이 될 것이었다.
희원이 은색 살 부채를 가볍게 흔들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폐하와 제공들께서는 아마 그날 감정이 어찌 죽어갔는지 세세한 건 잘 모르시겠지요. 감정은 확실히 더할 나위 없이 강대하더군요. 만약 국사께서 운주 전설 속 신수인 백제와 지종 도수 흑련 도사를 모셔오지 않았다면, 감정을 죽이고 싶어도 하늘의 별 따기였을 겁니다.”
그는 태연자약하게 그날 모든 강자가 감정을 포위하여 죽인 과정을 이야기했다. 물론, 전부 날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핵심은 운주 배후의 초범 강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를 알리는 것이었다.
금란전 내의 황족이고, 문신, 무장 할 것 없이 모두 다 낯빛이 굳었다. 주먹을 꽉 쥐는 자도 있었지만 결국은 다 낙담한 안색이었다.
영흥제 역시 굴욕감을 참지 못하고 미간을 살짝 문질렀다.
“3개 주(州)는 결단코 불가능하오. 이 일은 나중에 다시 논하지. 네 번째 조건은 무엇이오?”
영토 할양은 승낙했으나 수량 방면으론 더 상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희원은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그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현재로선 이 담판은 큰 우여곡절 없이 모든 게 순조로웠다.
“폐하, 안심하십시오. 네 번째 조건도 별 것 아닙니다. 덤일 뿐이지요.”
영흥제가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도 무방하오.”
탁!
희원이 은색 살 부채를 오므렸다.
“본관은 폐하께 감정의 법기 제련 친필 서한을 요구합니다.”
앞선 세 조건과 비교하자면 확실히 덤이 맞았다. 물론 1품 술사의 법기 제련 친필 서한은 더할 나위 없이 진귀한 것이었지만, 아무리 수준이 높은 물품이라 한들 실익을 가져다줄 만큼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일패도지(*一敗塗地: 여지없이 패함)!
조정과 운주 사절단의 첫 번째 교전은 대봉의 처참한 패배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불평등한 협상이었다. 그러나 대봉은 평화 협정을 하고 싶으니 뼈를 깎는 고통을 참는 건 불가피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문제였다. 협상 시 영흥제와 제공들이 보인 무력감이 중하위층 경관들에게 크나큰 실망감을 안겼다.
특히 지식인들이 보기에 4가지 조건은 정말이지 주권을 잃은 치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