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28
28화. 존엄
칠층의 계단 어귀.
사제의 보고를 받은 송경은 짙은 남색포를 입은 중년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세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저채미는 감자를 뜯으면서, 무심코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윽고 세 사람이 칠층에 도착했다. 송경이 읍하면서 입을 열었다.
“위 공.”
“위 공, 스승님께서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과묵한 청년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미모의 청년은 이마를 찌푸렸다.
품위가 고상한 중년 남성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더니 송경과 다실(茶室)로 들어서면서 무심코 물음을 던졌다.
“계단을 올라올 때 재미있는 젊은이를 보았네. 사천감의 제자는 아닌 것 같던데.”
송경이 대답하려던 저채미를 막고 대꾸했다.
“평범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친구죠.”
야경꾼은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문무백관에게는 가장 흉악한 포식자였다. 그들이 사람을 벌하는 데는 아무런 이유도 필요하지 않았다.
송경은 혹시라도 허칠안이 눈앞에 서 있는 이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환관에게 밉보였을까 우려되어 저채미를 말렸다.
“재미있다고? 어떻게 재미있는가?”
고상한 기운을 풍기는 중년 남성이 미소를 머금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송경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천재입니다. 연금술 천재지요. 수련체계를 잘못 선택하지만 않았더라도! 사천감에 들어왔으면 역사에 그 이름 석 자는 길이 남길 친구입니다.”
송경은 사천감에서 그를 무척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
이에 미모의 청년이 피식했다.
고상한 품위를 지닌 중년 남성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 * *
허부, 내원.
숙모가 아환들과 나이든 하녀들을 이끌고 포백(布帛)을 자르고, 선을 그리며, 솜을 넣고 있었다. 겨울이 다 되어 가족들의 겨울옷을 만드는 중이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자 아들과 딸, 그리고 남편을 위해 겨울옷 몇 벌 더 장만하려는 것이었다.
녹아가 마지막 바느질을 마치고 이로 실을 끊었다. 자신이 정교하게 수놓은 연꽃을 보다가, 이내 두 소저가 입은 모습을 떠올렸는지 녹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부인, 어제 큰공자님을 찾으러 갔더니, 큰공자님도 겨울옷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여태 가을옷을 입고 다녀요.”
녹아가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숙모가 그런 녹아를 흘겨보더니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녹아가 머리를 떨어뜨리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큰공자님도 한 벌 지어줍시다.”
“생각도 하지 마라. 그놈 그거, 기회만 잡았다 싶으면 내 심기를 건드리는데, 나더러 그놈에게 옷까지 지어주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아환과 나이 많은 하녀들 모두 못 들은 척 일만 했다.
“살림에 보태기는커녕, 맨날 빈둥빈둥하며 와서 밥만 축내지.”
“큰공자님도 자신의 봉미(俸米)를 내놓잖아요.”
녹아가 중얼거렸다.
“그 봉미는 자기가 다 먹어.”
숙모가 아리따운 두 눈을 희번덕였다.
가족들을 구해준 걸 봐서라도 조카랑 잘 지내보려고 했지만, 기회만 봤다 하면 쏘아붙이는 그놈이랑은 잘 지낼 수가 없었다.
‘승냥이는 천 리를 걸어도 고기를 먹고, 개는 천 리를 걸어도 똥을 먹는다고, 옛말에 틀린 말 하나 없어.’
이때 총총걸음으로 다급하게 오던 집사가 내원 밖에서 발걸음을 멈추더니 소리쳤다.
“부인, 나리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정신없이 조카의 흉을 보던 숙모, 이여가 집사에게 더 큰 소리로 답했다.
“왔으면 왔지, 내가 나가서 맞이해야 하느냐?”
집사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했다.
“부인, 영음 소저 몸에 핏자국이 있습니다. 영월 소저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있고요. 나리와 둘째 공자님의 안색도 안 좋습니다. 그리고 큰공자님이 함께 돌아오시지 않았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방 안에서 물건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아환과 나이든 하녀들의 걱정스런 소리가 들렸다.
“부인…….”
“비켜!”
이여는 치맛자락을 잡더니, 초조한 얼굴로 쏜살같이 대청을 향해 뛰어갔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대청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녀는 어두운 안색의 남편이 정신을 잃어 의식이 없는 막내딸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자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아무 일 없소. 그냥 잠든 거요.”
허평지가 미리 한마디 던져 이여의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막내딸을 건네주었다.
“영음이를 방에 눕혀 재우도록 하지.”
이여는 막내딸을 꼭 안고는 큰딸을 살폈다. 그녀는 큰딸도 아무 일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바로 대청을 떠나지 않고 울먹거리면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한 번 나가더니만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요?”
허영월이 또 울음을 터뜨렸다.
한숨을 내쉬던 허평지가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을 아내에게 빠짐없이 말해주었다.
큰딸이 나쁜 놈한테 희롱당했다는 말을 들은 이여는 분노가 치밀었다. 거기에 작은 딸이 말발굽에 밟힐 뻔했다는 소리까지 듣자, 혹시 당장이라도 막내딸이 없어질까, 더욱 꽉 껴안았다.
허칠안이 두 딸을 구하려다 상처를 입었다는 소식에, 이여는 넋이 나갔다. 게다가 조카가 형부에까지 끌려갔다는 말에는 한사코 남편의 손을 잡더니 아연실색하면서 입을 열었다.
“칠안……. 칠안이가…….”
“괜찮소. 이미 풀려났소. 이 일은 잠시는 해결을 본 거 같소.”
허평지가 아내의 손을 톡톡 치면서 위로했다.
“오늘 칠안이 아니었으면 영월이도 영음이도 위험할 뻔했소. 황소고집이긴 하지만 우리 집사람들에게 잘못을 저지른 적은 없잖소. 다른 사람이었다면 우리 딸들을 위해 이렇게 목숨을 내걸 수 있겠소? 부인은 칠안일 눈엣가시로 여기지. 그 녀석, 무공을 익히느라 많은 은자를 쓴 건 사실이오. 또 부인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점도 확실히 있지.
그래도 한번이라도 그 녀석의 입장에서 생각해봤소? 얹혀산 세월이 이십 년인데, 그 녀석이라고 그게 쉬웠겠소? 그 마음에는 상처가 없었겠느냐고. 그래서 당신 생각이 짧다고 하는 거요. 좋은 말만 듣기 좋아하지, 정작 상대방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잖소. 그놈이 양심이 없었다면, 영월이가 희롱당했다고 상대방하고 목숨 걸고 싸울 수 있었겠소? 다행히 이번 위기는 넘겼지만, 칠안이가 정말 돌아오지 못했다면 부인 마음은 편하기만 했겠소?”
부친의 말을 듣던 허영월이 더 크게 흐느꼈다. 그녀는 한평생 오라버니한테 잘 보답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저…….”
콧물을 훌쩍이던 이여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흘렸다.
허신년은 그런 모친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항상 기세등등하셨는데, 오늘은 형님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군.’
종일 입에 “금을 삼키는 녀석”, “재수가 없는 놈”을 달고 살았지만, 그래도 형을 마음에 두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도 이십 년을 키운 정이 있지 아니한가.
허평지가 아들을 한 번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우리 신년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함께 붙잡혀 희롱당했겠지.”
허신년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쩍 벌렸다.
* * *
이여는 막내딸을 아환에게 맡기고, 큰딸을 토닥이며 위로하고는 무거운 마음으로 방에 돌아왔다.
그녀가 겨울옷을 짓는 아환들과 나이든 하녀들을 싹 훑더니 입을 열었다.
“녹아야, 나리와 둘째 공자님의 겨울옷을 절반으로 줄이고, 나중에 큰공자님이 돌아오면 큰공자님의 치수를 재어 오거라.”
부인의 말에 녹아가 고개를 들어 재차 물었다.
“부인, 생각이 바뀐 건가요?”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야박한 숙모로 보이더냐?”
이여가 한마디 했다.
‘그렇게 야박한 숙모가 맞는데요…….’
방 안에 있던 모든 아환과 나이든 하녀들은 저마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 * *
허칠안은 관성루를 떠나 거리에서 마차 한 대를 세내어 한 시간이나 달리고 나서야 허부로 돌아왔다.
더운물로 목욕을 할 때 보니, 허리에 났던 상처는 거의 다 아물어 있었다.
스스로 금창약(金疮药)을 상처에 바르고, 방에 돌아와 벼루에 먹을 갈며 몇 백자에 달하는 화학지식을 적었다. 그러고는 습관에 따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 첫 번째 방법의 단점이라면, 고등학교 삼학년 때 느꼈던 공포를 다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에게 학자가 될 만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련체계를 바꾸기에 스물은 너무 늦은 나이지.’
두 번째 방법의 단점은 첩을 여럿 들일 수 있는 기회와 기루에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생활과 영영 작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희생이 너무 큰 것 같다.’
세 번째 방법의 단점이라면, 연기경 고수가 되어 봤자, 호부시랑과 맞서 싸울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뒷배가 되어 줄 만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없으면 무부체계에서도 빠르게 정진하기 어려웠다. 숙부를 봐도 연기경 전봉에 이른 지가 십 년이 돼 가는데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사천감과 운록서원과의 친분을 꼭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 ‘최선의 수’였다. 그 다음에 가서 다시 앞날을 계획하면 될 것이었다.
‘나의 예감이 말하기를 세은 사건의 풍파가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거다.’
* * *
허부, 대청.
황혼이 내리자 허칠안은 밥을 얻어먹으려고 담을 넘었다. 대청 앞뜰에서 허영음이 허리를 낮춘 자세로 흔들흔들하며 서 있었다. 작은 두 손은 주먹을 꼭 쥐고, 오른손 한 번, 왼손 한 번 앞을 향해 힘껏 내밀었다. 입으로는 ‘헤이헤이호호’하면서 배경음까지 깔았다.
허영음은 연꽃색의 옷으로 휘감고, 머리는 나계(*螺髻: 소라껍데기 모양으로 틀어 올린 상투)를 튼 채였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고 있느냐?”
허칠안이 발로 콩알이의 엉덩이를 가볍게 찼다.
그러자 콩알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공을 익히고 있는데.”
허영음이 바로 일어서더니, 두 손을 허리에 대고 볼록 튀어나온 아랫배를 내밀었다. 그녀는 큰오라버니의 기습에 불쾌한 듯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했다.
“큰오라버니, 지금 저한테 도발하는 겁니까?”
아마 아침에 겪은 일로 충격을 받은 콩알이가, 스스로 무공을 익혀야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래, 맞는데.”
허칠안이 말했다.
“아버지가 사람이라면 오기야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부도 마찬가지고. 이걸……. 존……. 존…….”
“존엄?”
“응!”
힘써 머리를 끄덕이던 허영음이 다시금 큰오라버니를 째려보았다.
“오라버니랑 싸울 겁니다.”
그러더니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허칠안은 한 손으로 콩알이의 머리를 눌렀다. 그러자 조급해진 콩알이가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어떻게 애를 써도 큰오라버니 몸에는 손이 닿지 않았다.
주먹만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귀찮아진 허칠안이 콩알이한테 말했다.
“닭다리를 줄 테니 네가 진 것으로 하자. 어떠냐?”
“좋아.”
그러자 콩알이가 휘두르던 손을 바로 멈추더니, 일그러졌던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네 존엄은 어디 갔어?”
“큰오라버니, 존엄이 뭔데?”
“……. 전도유망하다는 뜻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