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836
836화. 기부
소조회는 영흥제의 추태와 격노로 사전에 끝났다.
왕 재상은 관모를 바로잡고 두 손을 소매 속에 모은 채 위연의 후임, 어사대 우도어사, 야경꾼 우두머리 류홍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청석판이 깔린 널찍한 도로 위를 걸었다.
전방은 바로 오문이었다.
먼 곳에서는 시위가 보초를 섰으며 금군이 순찰을 했다. 왕 재상은 허탈하고 무료한 시선으로 금군을 쫓다가 잠시 뒤 눈길을 거두고 천천히 말했다.
“폐하께서 명성을 좋아하는 약점을 너무 명확하게 드러내시는데 어떻게 이 늙은 여우들과 싸우겠나? 폐하께서는 아직 너무 젊으시네.”
“강국은 착실하게 일한다는 마음을 갖고 계시니 어찌할 도리 없이 수준이 좀 떨어질 수밖에요.”
류홍은 자신의 경멸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왕 재상은 냉기를 한 모금 들이마시더니 코가 빨갛게 얼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수법이 미숙하고 꾀가 깊지 않으신데 이것들은 다 배울 수 있네. 사황자라고 해도 그보다 낫지는 않을게야.”
류홍은 밑도 끝도 없이 한 마디 내뱉었다.
“회경 마마께서 일개 여인인 점이 애석합니다.”
왕 재상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신년더러 상소문을 올려, 조정에서 상인들에게 기부를 호소하라는 제안을 한 게 바로 회경 공주마마가 아닌가. 자네는 내가 모를 줄 알았는가?”
류홍이 거리낌 없이 말했다.
“재상 대인께서는 식견이 예리하십니다. 마마께는 통찰력이 있습니다. 상인들이 단독으로 기부하게끔 하지 않고, 폐하를 시켜 군신들이 먼저 기부하는 모범을 보이도록 하다니요.”
왕 재상은 콧방귀를 뀌더니 표정이 싸늘해졌다.
“자네 회경 마마에게 앞으로는 자신의 방법을 쓰려거든 장차 내 사위를 공격 무기로 쓰지 말라고 알리게. 폐하께서는 이 일로 체면을 구기게 될 것임이 자명하네. 그때 가면 신년에게 화풀이하지 않을 수 없겠지.”
류홍은 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한동안 걸었다. 왕 재상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담담하게 말했다.
“조정의 국고가 텅 비어 호부를 이어가기 어렵네. 폐하께서 그 지세를 움직이지 않는 건 운주의 반란군이 방비하기 위함이지.”
류홍이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만일 임의로 재해 상황을 확대시키면 유랑민의 수가 나날이 증가하여 각지에서 변란이 일어날 겁니다. 이 역시 반란군이 보고 싶은 그림이지요. 군수 물자를 변통하면 반란군의 취향을 저격하고, 변통하지 않아도 반란군은 여전히 그 안에서 만족하겠지요. 제가 비록 그 허평봉과 왕래한 적은 없지만, 이 자의 수법이 뛰어나 두피를 저리게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전쟁에서 군인의 급료 및 지급품을 조달하지 못하면 군대는 군사 정변을 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재해 상황을 관리하지 않고, 유랑민의 증가 속도를 저지하지 않으면, 정세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부주의로 인해 초래된 결과는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할 터였다.
“회경 마마께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류홍이 탄식하였다.
“본래는 선황께서 가신 뒤에 조정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줄 알았지요.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왕 재상은 감정에 동요가 있는 듯 멀리 내다보았다.
한참 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 계획이 만약 가능하다면, 확실히 초미지급을 해결할 수 있네. 하지만 그녀가 중요한 점을 간과했어. 이 늙은 여우들과 각 계층의 관원이 기꺼이 지갑을 열도록 하려면 상황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네. 감정 한 명, 선황 한 명, 반쪽짜리인 나와 위연을 합해서 겨우 한 명,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허칠안 한 명 이렇게 총 넷인 셈이지. 감정은 국정에 관여하지 않고, 선황과 위연은 이미 고인이며, 허칠안은 강호를 떠돌고 있지. 내가 얼마 전에 신년에게 물으니 지금까지도 그에게 소식이 없다더군.”
류홍은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왕 재상은 진작에 이 계책을 꿰뚫어 보고 철저하게 파악했다. 그런 뒤에 눈치챈 이가 없을 때 그는 이미 남몰래 알아보고 헤아리던 중이었다.
* * *
영흥제는 대련(大攆)을 타고 도착하여 환관들에게 둘러싸인 채 경수궁으로 들어갔다.
그는 정원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영흥제는 미간을 문질러 표정이 그렇게 진지하고 무거워 보이지 않게 했다.
그가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띠고 정원을 지나 문턱을 넘자 오랫동안 기다린 어머니와 여동생이 보였다.
궁녀에게 음식을 여러 차례 데우라고 분부했던 진 귀비가 가벼운 목소리로 꾸짖었다.
“비록 폐하께서는 한창 혈기왕성하시지만, 용체에 신경 쓰셔야 합니다.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마세요.”
“어마마마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보관에 몸을 보양하는 영험한 단약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임안은 꽃처럼 아름다운 웃는 얼굴로 손짓하였다.
“황제 오라버니, 어서 와서 식사해요.”
영흥제는 웃음을 머금고, 조당의 울분을 없애더니 궁녀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하였다.
그는 몇 입 먹더니 어머니, 여동생과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에 대해 한담을 나누었다.
“며칠 전, 치아(稚兒)가 하는 말을 들으니 상서방(尙書房)에 낭자가 하나 왔는데 왕 재상 댁에서 올라왔다더군요. 장강(長康)이 실수로 상대를 도발했다가 결국에는 얻어맞았대요. 치아가 사촌 동생 대신에 복수했다가 역시나 피 터지도록 얻어맞았답니다.”
‘치아’는 영흥제의 셋째 아들로 올해 열 살이었다.
장강은 임안의 여섯째 오라버니의 차남이었다.
진 귀비는 손자가 얻어맞았다는 걸 듣자마자 안색이 크게 변해서는 버들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이 일을 저는 어째서 모르는 겁니까?”
“짐이 덮었습니다.”
“왜요?”
진 귀비는 아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의심했다.
영흥제는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그 아이는 허칠안의 어린 여동생입니다. 다행히 그날 궁 밖으로 보내져 공부도 못 했대요.”
진 귀비는 바로 침묵했다.
그녀는 태부가 화를 면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진 귀비는 한참을 먹은 뒤 시종일관 울적해하는 영흥제를 보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조정에 어려운 일이 있는 거지요?”
영흥제는 잠시 주저하더니 힘없이 탄식했다.
“국고에 은자가 떨어졌고, 또 막 전쟁이 끝나 각지의 곡창에 식량이 부족하여 이재민을 구휼할 힘이 없습니다. 이에 따라 유랑민이 사방에서 일어나 도적이 되었어요. 짐의 강산이 온통 어질러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부하라고 호소했다가 좌절당한 일도 말했다.
영흥제는 미간을 문지르더니 덧붙였다.
“이 위치에 앉으니 비로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겠습니다. 조당 위아래로 모두가 적입니다.”
비록 그는 제위에 오른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미 거듭된 방해 공작으로 무엇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무력감을 체감했다.
이는 예전에 태자였을 때는 피부로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탁자 위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었다.
영흥제는 서둘러 말했다.
“이런 짜증 나는 일들은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어머니, 소자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영흥제는 술을 다 마신 뒤, 가벼운 화제들을 골라서 진 귀비를 웃게 하여 집안 잔치를 좀 더 편하게 하고자 했다.
임안은 오라버니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면서 좀 괴로웠다.
예전에 그녀는 태자 오라버니가 늘 황위 계승을 바란다고 생각했다. 또한 많은 생각과 관념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상황은 변하는 법이라, 그녀 역시 그렇게 많은 일을 겪은 뒤 많이 성숙해졌다.
황위를 향한 태자 오라버니의 집념이 그렇게 깊은 건, 자신이 황위를 갈망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원인은 그녀 모녀한테서 비롯되었다.
어머니는 황후에게 눌려 고개를 들지 못했으며 그녀 역시 시시때때로 회경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또한 사황자에게는 조정에 뒷받침해주는 위연이 있었다.
태자 오라버니는 그저 한을 풀고 싶었으리라. 어머니가 황후 앞에서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펼 수 있도록, 그녀가 회경 앞에서 온 힘을 다해 거들먹거릴 수 있도록 말이다.
* * *
임안은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산책하며 소화한다는 명목으로 덕형원에 갔다.
그녀가 막 회경의 근거지에 들어오자 빼어나게 준수한 젊은 관원이 안에서 나왔다.
그는 별 같은 눈, 붉은 입술, 새하얀 이에 볼 윤곽이 훨씬 힘차져 더욱 남자다워 보였다.
“소신 마마를 뵙습니다.”
허신년은 발걸음을 멈추고 공수하며 읍했다.
“허 대인께서 어째 여기에 있습니까?”
임안은 다정하고 어여쁜 도화안을 굴리며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허신년이 말했다.
“신은 회경 마마와 학문을 탐구하고자 왔습니다.”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
“참, 제 형님이 최근에 마마께 서신을 보냈습니까?”
임안은 듣자마자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짙어졌다. 그녀는 애교스럽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허 대인 큰형이 누구지요? 본 공주는 모르니 길을 막지 마세요.”
그녀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허신년과 몸을 스쳐 지나갔다.
개자식이 경성을 떠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기별이 전혀 없었다. 그는 그녀를 마음에 두지 않은 게 분명했다.
* * *
그녀는 곧장 내원으로 직행했고, 궁녀의 안내를 받으며 내청에 이르렀다. 그러자 탁자 뒤에 앉아 차를 마시는 회경이 보였다.
“제가 방금 밖에서 허신년을 만났는데 그가 뭐 하러 여기에 왔어?”
임안이 물었다.
통상적으로 말하자면 공주가 저택에 들일 수 있는 건 관계가 보통이 아닌 자들이었다.
여인은 둘째 치고, 남자라면 대체로 심복이었다.
하지만 임안은 허신년이 왕가의 미래 사위이며, 왕 재상은 그녀의 황제 오라버니의 사람임을 알았다.
“학문을 토론하려고.”
회경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부연하더니 돌아서서 물었다.
“너는 또 뭐 하러 왔니?”
그녀는 임안을 그다지 환영하지 않았다. 이 여동생은 참새처럼 재잘거리다가 당신이 조심하지 않는 순간, 날아와서 당신의 얼굴을 쪼았다.
비록 그녀의 전력 자체는 예전처럼 쓰레기라 해도, 지금은 어쨌거나 영흥제가 재위하였다.
회경은 그녀를 어느 정도 좀 꺼렸다.
비록 임안이 싸움에서 져 굴복하지 않아도 지금껏 영흥제에게 고자질하지는 않았다.
임안은 탁자 옆으로 와 치맛자락을 들고 앉더니 말했다.
“회경 너는 꾀가 많으니 가르침을 청하려고.”
회경은 도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안은 기부금 일에 관해 한 차례 얘기하더니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 늙은 여우들이 스스로 지갑을 열게 할 무슨 방법이 있을까?”
회경은 담담하게 말했다.
“남이 네 가산을 빼앗으려는데 너는 줄 거니 안 줄 거니?”
임안은 생각하더니 말했다.
“누구인지를 봐야겠지. 개자식이 만약 나한테 은자를 달라고 하면 본 공주는 줄 거야.”
회경은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시더니 말했다.
“그러니 친밀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거야. 네 황제 오라버니가 손을 뻗어 돈을 달라고 했으니 당연히 받아낼 수가 없지.”
임안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더니 탐색해보았다.
“위협?”
회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자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다. 어리석다는 건 폐하께서 하실 수 없다는 거지. 조정과 재야 위아래로 욕설을 퍼부을 테니 분명히 엄청난 반발을 겪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할 수 있고, 군신들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임안의 눈이 반짝였다.
“누구?”
회경은 이 여동생의 지혜에 또 한 번 실망했다. 그녀와 심오한 말로 대화하는 건 정말 재미없었다.
“감정은 어떻다고 생각하지?”
“가능하겠지…….”
“만약 그해의 대봉 제일 무사 진북왕이라면?”
“가, 가능하겠지…….”
“그럼 지금 대봉 제일 무사는 누구지?”
임안은 드디어 이해했고, 모든 걸 깨달아 손으로 탁자를 쳤다.
“개자식을 말하는 거구나!”
그녀는 즉시 침울한 얼굴을 하고 실망하여 말했다.
“하지만 그는 경성에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