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842
842화. 부탁
붉은 치마는 그를 보더니 어여쁘고 다정한 도화안에 즉시 눈물이 고였다. 달걀형 얼굴에는 그리움과 원망이 새겨져 있었다.
흰 치마는 예전과 다름없이 교만하고 도도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인사한 셈이었다.
하지만 흰 치마는 허칠안을 보는 순간 표정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회경과 임안을 제외하면, 널찍한 다실 안에는 초원진, 항원, 이묘진 그리고 종리가 있었다.
“두 분 마마를 뵙습니다. 종 사저, 사저가 무탈한 걸 보니 저 마음이 놓입니다.”
허칠안은 웃으며 그녀들에게 안부를 건넸다.
“개자식!”
임안은 습관적으로 ‘애칭’을 부르며 탁자를 타악 치고 일어나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말을 하려다가 문득 멈추더니 도화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 수련 경지가 적잖이 회복됐구먼.”
종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 대인은 여러 날 밖을 거닐면서 용기는 얼마나 수집했는가?”
회경이 물었다.
‘모두가 현장에 있는 상황에서 그녀들은 도리어 자제하는 편이구나…….’
허칠안은 탁자 옆으로 걸어가 앉더니 자신이 떠돈 이래로 겪은 일들을 얘기하였다.
여우는 두 손으로 볼을 괴고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회경은 찻잔을 쥔 채 이따금 한 모금 홀짝이며 내용을 자세히 들었다.
종리는 앉은 자세가 가장 얌전했다. 그녀는 모든 과정 내내 불필요한 동작은 하지 않았다.
저채미 역시 그의 옆에 앉아 수육을 먹으며 들었다.
허칠안은 자리에 있는 소저들의 성격을 제 손금 보듯 훤히 꿰뚫었다. 그는 떠도는 도중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은 임안에게 들려주었으며, 맛있는 음식과 관련된 일은 저채미에게 들려주었다. 또한 그는 용기를 수집하는 과정은 회경에게 들려주었다.
옹주에서 뇌주, 뇌주에서 옹주, 경성으로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
그는 일주향의 시간에 이야기를 마쳤다.
허칠안도 넘어가야 할 얘기는 당연히 넘어갔다. 예컨대 모남치와 함께 지내며 있었던 소소한 일들 같은.
“정말 재미있어. 우리도 앞으로 강호를 거닐러 갈래!”
임안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수중에 있는 일을 처리하고 수련 경지를 회복하면 마마를 데리고 중원을 거닐지요.”
허칠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실현 불가능한 약속이 아니길 바라야지…….’
그는 속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불문 역시 용기 수집에 가담하였다는 건 중원을 넘보려는 의도와 야심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네. 서역과 운주 반란군의 결탁에 대비해야 해.”
회경의 후각은 여전히 예리했다.
“상주 시가가 수호하는 그 고분은 어디에 있는가? 지도가 있는가?”
종리는 고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에휴, 나는 고분이랑 지하 궁전에 PTSD가 생겼는데…….’
허칠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도 반쪽은 고족한테 있습니다. 고분을 탐색하려거든 지도를 빌리는 일을 리나에게 도와달라고 해도 됩니다.”
허칠안은 그녀들의 질문에 대답한 뒤 물었다.
“두 분 마마께서 이 시각에 사천감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만약 그저 임안만 왔다면 허칠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회경이 그를 한 번 보기 위해 올 리는 전혀 없었다. 야간 통행 금지를 뚫고 궁을 나온 건 황장녀의 품행에 맞지 않았다.
회경은 마치 얼음이 부딪치는 듯한 듣기 좋은 목소리로 감칠맛 나게 말했다.
“용기는 조정의 흥망성쇠에 관련되니 본 공주가 당연히 마음에 두고 있지. 또한, 근래 조정에 사건이 좀 있는데 허 대인이 도와주어야 하네. 본 공주는 자네가 급히 왔다가 급히 갈까 봐, 심지어 내일 밤에 경성을 떠날까 걱정되어서 말이야. 그리하여 일부러 왔네.”
“무슨 사건이요?”
허칠안은 요점을 잡았다.
임안이 앞다투어 대답했다.
“칠안…… 각지에 재해 상황이 심각하고, 조정의 국고가 텅 비었어. 황제 오라버니는 기울어져 가는 추세를 만회하기 위해 조정 관원들이 기부하고, 관원이 향신에게 호소함으로써 최대한 은자를 조달하여 이재민을 구휼하고 싶어 하셔.”
그녀는 개자식이라고 부르는 게 습관이 됐는데 갑자기 ‘칠안’이라고 부르자니 약간 수줍었다.
“하지만 황제 오라버니는 제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젊어서 그 늙은 여우들을 이길 수가 없어.”
그녀는 입을 오므린 채 허칠안의 손을 잡고 작은 목소리로 애원하였다.
“네가 황제 오라버니를 좀 도울 수는 없을까?”
촛불이 그녀의 도화안을 비추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초조함과 애원이 번뜩였다.
“좋습니다!”
그가 이 말을 내뱉을 때, 초조함과 애원은 초롱초롱한 기쁨과 달콤함 그리고 안심으로 변했다.
‘이 계책은 아마 신년이 생각해낸 걸 테지. 하지만 영흥제가 승낙하지 않은 거 아닌가? 보아하니 각지의 피해 상황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군…….’
허칠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기부금에만 의지하는 건 달걀로 바위 치기입니다.”
물론 그는 그럼에도 영흥제를 도와 이 일을 완수할 작정이었다. 이는 많은 가난한 백성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계책이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급한 불은 끌 수 있지.”
회경이 말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허칠안은 침음하며 물었다.
회경은 이 문제에 관해 진작 구상해 두었기에 말했다.
“자네가 나서서 위협하기만 하면 되네. 자네의 흉명으로는 충분해. 다른 건 허신년에게 맡기게.”
허칠안은 잠시 더 얘기를 나누다가 해시계를 보더니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영보관에 가서 국사와 쌍수해야 해. 생각해보니 그래도 아주 흥분되는군. 국사 같은 미인을 아내로 맞이해 집으로 데려가면 절대 7년 차에 권태기가 오지는 않을 거야…….’
그는 고생 속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속으로 농담하였다.
“두 분 마마, 그리고 여러분. 저 잠시 뒤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데!”
임안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말했다.
“본 공주는 오늘 밤에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천감에 묵을 거야. 어렵사리 돌아왔는데 본 공주랑 얘기를 좀 더 나누자고.”
허칠안은 그녀가 이 말을 내뱉으니 회경이 눈살을 찌푸리는 걸 똑똑히 보았다. 이묘진은 좀 실망한 표정을 지었으며, 종리의 머리는 그를 향해 작은 폭으로 기울었다.
‘얼른 가야지…….’
허칠안은 더는 오래 머물지 않고 황급히 나왔다. 그는 막 문을 열었다가 마치 세월 속에 풍화된 조각상처럼 그대로 그곳에 굳었다.
문 앞에는 갖가지 분위기를 지닌 미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정다운 표정을 지은 채 입가에는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낙옥형!
‘미친, 갔던 거 아니었어?!’
허칠안 몸속의 작은 영혼이 포효했다. 그러나 그는 성숙한 어장 주인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국사, 국사께서 어찌 오셨습니까.”
낙옥형은 그를 무시했다. 그녀가 문턱을 넘고 방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모처럼 여러분이 전부 계시네요. 차라리 여기서 제대로 말하는 게 낫겠어요. 앞으로 어느 소저가 저를 불쾌하게 할 때 옆 사람이 내게 미리 언질하지 않아 엄하게 처벌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죠. 그렇지, 허랑!”
방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하지만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울렸다. 또한 귓가에는 우렁찬 천둥이 쳤다.
저채미조차도 놀라 멍해졌다. 그녀는 수육이 바닥에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대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부를 때 통상적으로 성씨 뒤에 ‘랑’을 붙이곤 했다.
그녀가 허랑이라고 외쳤다는 건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힌 것과 다름없었다.
회경은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리처럼 차가웠다.
종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분이 가라앉고 즐겁지 않을 때만 하는 자세를 취했다.
“다, 당신들…….”
이묘진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그저 믿기 어렵다는 생각만 하며, 얼굴이 굳은 채로 그들을 한참 주시하였다. 이묘진은 놀라기도 하고 좀 화가 나기도 했다.
임안은 한참을 어리둥절하다가 국사를 쳐다보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국사께서 농담하고 계신 건가요?”
낙옥형은 담담하게 말했다.
“본좌가 언제 농담하는 걸 좋아했지요? 허랑은 제 도려입니다. 저희는 이미 쌍수했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 허칠안의 옆얼굴을 응시하더니 정다운 얼굴로 말했다.
“허랑, 말 좀 해봐.”
‘무슨 말을 하라고? 아 나, 환장하겠네…….’
허칠안은 마음속에 세차게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겉으로는 경직된 미소를 유지하였다.
그가 말하지 않자 여인들은 이 일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임안은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묘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로 칼자루를 쥐었다. 그녀는 뜻밖에도 방탕한 허칠안을 베어 잘게 다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허칠안이 국사의 쌍수 도려라고? 나는 버젓한 인종의 도사인데 허칠안이 도려라고?!’
초원진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본능적으로 사건의 진실성을 의심하였다. 설령 그가 이미 직접 허칠안과 국사의 친밀한 행각을 목격했음에도 말이다.
‘맞다, 그는 몸에 기운이 더해져 있지. 그리고 국사의 쌍수는 기운이 필요하고…….’
초원진은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하게 허칠안을 쳐다보았다.
비록 그가 낙옥형에게 무슨 헛된 바람을 품은 건 아니었지만, 초원진은 명색이 검객으로서 내심 인종 도사에게 어느 정도 동경하고 흠모하는 마음을 품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이 일을 다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인종이 기명한 제자이니 낙옥형은 사문의 윗사람인 셈이었다. 하지만 허칠안은 그의 진실한 벗이자 동반자였다.
지금 윗사람이 진실한 벗의 쌍수 도려가 되었다.
항렬이 어지러워졌다.
낙옥형은 허칠안이 침묵으로 답하는 걸 보자 가볍게 그를 째려본 뒤 임안, 회경, 종리, 저채미 그리고 이묘진의 얼굴을 훑고 나서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여러분들 중에 허랑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그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품고 있는 이도 있고, 그에게 남몰래 마음을 품고 있는 이도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오늘 밤 이후, 본좌는 여러분이 가져서는 안 될 생각을 접길 바랍니다.”
설령 낙옥형은 이름을 똑똑히 지명하지는 않았지만, 자리에 있는 여러 미인은 모두 제 발 저렸다. 다들 그녀가 말하는 게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회경은 눈꼬리를 치켜올리더니 차갑게 말했다.
“국사께서 언제 그와 쌍수 도려가 됐는지 본 공주가 어째서 모르지요?”
이묘진이 바로 말을 이었다.
“국사께서는 명색이 인종 도사로 제 윗사람입니다. 우선 저는 허씨를 전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말은 차치하지요. 국사께서 방금 하신 말만 봤을 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해야 할 말인가요? 아랫사람에게 자신의 남자를 꼬시지 말라는 건가요?”
종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국사께서는 그저 그의 기운을 이용해 업화를 가라앉히는 것뿐입니다. 국사는 지금 천운이 맞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를 좋아하는 게 절대 아니에요.”
오 사저의 이 말은 나쁜 동기를 규탄했다.
‘찢었다……. 게다가 임안은 아직 반응하지도 않았어. 이런 일로 다투고 도발하는 건 그녀가 전문가인데……!’
허칠안은 가슴이 철렁하여 초원진에게 전음하였다.
“초 형, 한 가지 일을 부탁드립니다!”
초원진은 무뚝뚝한 어조로 전음으로 대답했다.
“나는 처리하지 못하네!”
허칠안이 황급히 전음으로 말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초 형께서 허부에 가서 제 여동생을 불러주십시오.”
‘?’
초원진의 마음속에 물음표가 하나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말했다.
‘이런 상황, 이런 형편에 허영월을 데리고 와서 뭐 하려고?’
그는 확인하려 전음으로 물었다.
“허영월?”
“속히 가십시오, 부탁합니다! 그간의 일을 그녀에게 알려주시는 걸 잊지 마십시오!”
“…….”
‘뭐하는 놈이야?’
회경은 찻잔을 쥔 채 이따금 한 모금 홀짝이며 내용을 자세히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