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899
897화. 아버지, 아직 아들 죽지 않음에 허리띠를 뽑아 드시네 (2)
허평봉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가 손가락으로 공중에서 빠르게 그림을 그리니 천지 법칙을 머금은 진문이 하나씩 떠올랐다.
진문은 질서 있게 어풍주 곳곳에 떨어져 갑판, 돛대, 뱃전 각지에 붙었다.
눈 깜짝할 사이, 어풍주 전체가 진문으로 뒤덮였다.
허원상은 눈을 크게 뜨고 알아볼 수 없는 그 부문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서투른 글씨 같은 이 부문은 술사에게 가장 큰 보물이었다.
이윽고 허평봉이 포진을 완성하자 허원상이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버지, 이게 무슨 진법이에요?”
허평봉이 직접 손을 써서 그림을 새겨야 하는 진법이라니.
술사는 4품으로 승직하기 전, ‘진법을 기억’하는 기나긴 과정을 거쳤다.
소위 ‘진법 기억’은 통제할 수 있는 모든 진법을 마음속에 새기는 것으로 4품으로 승직한 뒤에는 기억에 각인된 그 진법들이 본능으로 변했다.
시전할 때, 생각을 움직이면 진법이 저절로 완성되곤 했다.
사천감에는 ‘천강(天罡)’과 ‘지살(地煞)’이라는 진법대전이 있었다.
총 108개의 대진(大陳)으로, 모든 대진은 십여 개 혹은 수십 개의 소진(小陳)으로 나뉘었다.
허원상은 17살 나이에 대진 2개를 기억하고 있지만, 대단함과는 별개로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하마터면 탈모가 올 뻔했었다.
그녀도 아버지 같은 품계의 술사는 일찍이 ‘천강’과 ‘지살’에 빠삭하다는 걸 알았다. 그 같은 경우는 진법을 시전할 때 자기 뜻대로 하곤 했다. 그러니 그가 직접 그림을 새기는 진법이라면 분명 극히 심오한 종류일 터였다.
허평봉이 딸을 바라보며 웃었다.
“무슨 진법이냐고? 이게 바로 네 아비가 그해 대봉 국운을 빼앗은 진법이다. 물론 세상을 놀라게 하는 그 대진에 비하면 이는 그야말로 간소화에 더 간소화된 진법이지. 역할은 딱 하나다. 기운을 한곳에 모으는 거란다.”
* * *
노인이 변신한 ‘도’가 황금종 표면에 부딪히자 하늘가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일 먼저는 싸움터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허칠안이 영향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청력을 잃어버린 그는 때때로 귀가 먹먹하였다.
* * *
남쪽 봉우리 꼭대기의 사람들 역시 이명에 시달려 곤욕을 겪었다. 다들 고통스러워하며 귀를 감싸고 있었다. 이들은 앞으로 이어질 전투 방향이라든지 정세 변화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 * *
철컥!
십여 초간의 대치 끝에, 황금종 표면이 갈라지면서 균열이 생겼다.
이와 동시에 노인의 ‘단칼의 힘’이 바닥났다.
위엄을 떨치며 우뚝 솟은 금신은 그에게 두 번째 칼을 쓸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바로 황금 신검을 쥔 그 팔을 흔들어 그대로 내리쳤다.
하지만 무사의 위기 감지 능력으로, 노인은 잔영이 되어 옆으로 피했다.
와르르!
산이 무너지고, 신검은 널찍한 낙석을 베어 떨어뜨렸다. 이 검은 기기 파동이 없었지만, 견융산 주봉은 마치 모래 더미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손쉽게 뒤집을 기회가 왔다.
수라 금강은 즉각 금강법상의 어깨 위로 물러났다. 지금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금신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검을 거두기도 전에 다시 또 황금 몽둥이가 노인의 머리를 내리쳤다.
쿵!
수많은 자갈이 폭발하고, 견융산 주봉 꼭대기가 철저하게 폭파돼 무려 한 토막이 낮아졌다.
쿵! 쿵! 쿵!
노인은 무사의 위기 예감 덕에 좌우에서 번쩍번쩍 움직였다.
마치 굉장히 민첩한 바퀴벌레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금강법상의 24개 팔은 끊임없이 활, 칼, 검, 곤봉을 내리쳤다.
자잘한 돌이 마구 튀었다. 견융산 주봉에 연신 균열이 일며 수만 톤의 흙과 암석이 무너져내렸다.
쿵!
황금 몽둥이 공격에 노인의 형체가 산산이 부서졌다.
이내 거대한 나무처럼 굵은 몽둥이 위에 노인의 진짜 형체가 나타났다.
쿵! 쿵! 쿵…….
노인은 몽둥이를 따라 산봉우리보다 더 높고 큰 법상을 향해 질주했다.
속도는 달릴수록 더 빨라졌다. 꼭 거친 바람 소리를 내는 칼처럼 주위의 공기마저 뒤틀리는 듯했다.
그리고 칼끝은 즉각 금강법상의 미간을 가리켰다.
탁!
금강법상의 거대한 손바닥이 서로 맞닿았다. 흡사 눈앞에 날아다니는 파리를 잡듯 그대로 공중에서 노인을 쳤다.
곧 두 손바닥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시 닫히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몇 초 대치한 뒤, 묵직한 굉음 사이로 두 손바닥이 벌어졌다.
손바닥을 찢고 나온 노인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손발은 기이하게 뒤틀렸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2품 무사의 신체와 정신이 법상의 일격에 깨진 것이었다.
금강법상은 그에게 숨 돌릴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런 공격으론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초범 무사를 죽일 수 없음을 알기에 맹렬한 공격이 이어졌다.
* * *
키가 수백 장(丈)에 달하는 금신은 그 찬란한 불광으로 견융산 주변 수십 리를 금색으로 물들였다.
그 기운은 심연보다도 더 공포스러워서 불광이 두루 비추는 범위 내의 생명체들은 전전긍긍하며 땅에 엎드리기 바빴다.
“조, 조 맹주,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부정문이 땅에 무릎을 꿇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낮게 숙였다.
조청양의 이마에서도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역시도 전혀 고상하지 않은 자세로 땅에 엎드려 절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반보 초범의 수련 경지에 오른 자였다. 이렇게 쓸모없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몸에 중상을 입었고, 대전을 치른 뒤라 상태가 극히 엉망이었다. 이 순간에는 부정문 등보다도 그리 나을 게 없었다.
“전, 전설 속의 나한입니까? 보살?”
검주상회 회장 교옹이 두툼한 입술을 열어 띄엄띄엄 추측을 이어 나갔다.
금강은 3품이고, 3품은 2품 무사를 제압할 수 없다.
옛 선조는 이미 2품 무사가 됐기에 저 법상쯤은 제압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조차 감당해낼 수 없는 법상이라면 분명 어느 나한이나 보살임이 틀림없었다.
이는 아주 간단한 추리였다.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그런대로 정신 승리라도 할 수 있지만, 교옹이 던진 한마디 말에 무림맹 사람들 모두의 마음에 공포가 일었다.
나한이나 보살이 왜 이곳에 나타난 걸까?
왜 불문이 무림맹을 상대하면서 이렇게까지 큰 희생을 하는 걸까?
허 은라는 중상을 입어 더는 싸울 수 없고, 옛 선조 혼자서는 큰일을 감당하기 힘들 텐데,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다들 하나 둘 떠올린 의문 속에, 긴장되고 불안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조청양은 굳은 얼굴로 말없이 침묵했다. 하지만 눈빛에 묻어나는 초조함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두 금강이 등장할 때부터 그는 손현기가 자신에게 숨긴 것이 있고, 적의 정보를 모호하게 얘기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허 은라는 일대 다수로 무신교 우사를 물리쳐 막강한 전투력을 보여 주었다. 그 후에도 옛 선조가 관문을 부수고 2품으로 승직해 국면을 완벽하게 다스렸다.
이런 결과에, 조청양도 손현기의 함구를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냥 자신의 자격이 부족하여 손현기도 달리 상세히 알려 주지 않은 것인 셈 쳤다.
그러나 지금 이 공포스러운 법상이 강림한 걸 보자 조청양은 저도 모르게 의심이 들었다. 손현기가 말하지 않은 건, 조청양을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라 감정 이제자 역시 승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본디 진실한 정보의 토로는 부정적인 마음만 심어주기 마련이었다.
지금껏 이 공산전(攻山戰)을 치르며 쌍방의 비장의 패는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젠 모든 게 조청양이 상상할 수 있는 극한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아직도 적에게 더 강한 후수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가시질 않았다.
아,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조청양의 귓가에 불현듯 소월노의 비명이 들려왔다.
“저건 또 누구야!”
조청양 등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옛 선조는 여전히 법상과 엉켜 싸우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없었다.
1초 뒤에야 사람들의 반응이 왔다. 소월노가 가리킨 건 허칠안 쪽이었다.
* * *
허칠안은 백희에게서 불문의 정보를 얻고, 현존하는 1품 보살이 장악한 법상에 대해 손금 보듯 훤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렴풋하게 추측이 가는 것이 있었지만, 검증할 사람이 없어 감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때, 멀지 않은 뒤에서 온화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금강법상이지!”
한순간, 허칠안은 온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듯했다.
‘뒤돌아 끄집어내자, 전력으로 폭발하는 거야!’
하지만 그는 이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상대에게 적의와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유로 무사의 위기 경보도 잠잠한 상황이었다.
곧이어 허칠안은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한 백의의 형체가 허공을 밟고 뒷짐을 진 채 온화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이목구비는 숙부, 그리고 자신과도 약간 닮아있었다.
허평봉이었다.
허칠안은 ‘사람 구실 못하는 자’의 모습을 제대로 본 뒤에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비웃음을 흘렸다.
“일개 분신이 감히 내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대다니.”
‘당황하지 말자, 당황하지 말자. 저 사람 본체는 감정이 주시하고 있으니까 절대로 올 수 없어…….’
허칠안은 정신을 집중하며 한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바로 분신이기 때문에 방금 너에 대한 적의를 억누른 것이다. 너와 몇 마디 나누고 싶어 왔다.”
허평봉은 뒷짐을 진 채 여전히 온화하게 웃었다. 말투도 부드럽고 차분했다. 꼭 보통의 사이좋은 부자처럼, 다정한 느낌까지 풍겼다.
“저희 사이에 딱히 할 얘기는 없는 것 같은데요.”
현재 허칠안은 왼손에 태평도를, 오른손에는 진국검을 쥐고 있었다.
허평봉은 곧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점차 격퇴당하는 노인을 보며 웃었다.
“금강법상은 공격과 방어에 무쌍하지. 정혈 한 방울에는 가나수 보살의 힘과 금강법상에 대한 그의 깨달음이 내포돼 있다. 가나수가 불문에서 전투력 제일의 보살이 될 수 있었던 건 이 금강법상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신수가 왜 그렇게 강할까? 이 역시 금강법상 때문이다. 이건 막 2품에 들어선 노인네가 격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지금 신수가 보여준 법상이 바로 금강법상이란 걸 다른 형태로 알리고 있는 거야. 다만 변이가 좀 생겼을 뿐…….’
허칠안은 말없이 머리를 빠르게 굴리며 허평봉이 현신한 목적을 헤아렸다.
간단하게 한 마디 평한 허평봉은 전투에서 시선을 떼고 이야기했다.
“칠안, 우리 부자가 한 판 겨뤄보자꾸나. 내가 네게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다. 난 널 받아들이고 싶다. 날 따라 운주로 돌아가자. 과거의 애증은 없던 일로 하면 그만이다. 내가 네 봉마정을 풀어줄 방법을 찾겠다.
황족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황위에 오르지 않는다는 뜻을 맹세로 내세운다면 그들도 네 합류를 아주 기뻐할 것이다. 국운을 되찾는 건 꼭 취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너를 휘하에 끌어들이면 마찬가지로 잠룡성의 기운을 강화할 수 있거든.”
허칠안은 그를 몇 초간 주시하더니 웃었다.
“나를 끌어들여도 같은 효과가 있는데 그날 왜 나를 사지로 몰았습니까?”
허평봉이 깊은 탄식을 했다.
“네 성장은 너무 빨랐다. 네가 부상하기까지, 지금껏 고작 1년 좀 넘는 시간이었지. 널 끌어들이기엔 위험이 너무 컸어. 더욱이 네 성격상 죽어도 굴복하지 않을 거잖느냐. 네게 대봉을 배신하라 한다면, 네가 정녕 원했겠느냐?”
허칠안은 바보처럼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내가 원하게 됐다면?”
“대봉 사직은 매우 불안정하다. 백성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없는 건 너도 똑똑히 다 봤겠지. 내 오늘 너를 찾아온 것 역시 네 성격 때문이지.
난 조금 있으면 거사를 일으킬 것이다. 불문의 협조도 있을 테지. 감정 스승님이라는 큰 산도 더는 뒤흔들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잠룡성에 합류하여 함께 부패한 황조를 뒤집어야 백성들도 편안하게 살 수 있을 테지.
칠안, 이 역시 네가 보고 싶은 모습이고 네가 줄곧 노력한 목표 아니었느냐. 너는 대봉과 운명 공동체이니 잘 해결될 것이다. 낙옥형과 쌍수한 뒤 넌 이미 3품 중기가 됐으니 머지않아 3품 전봉이 되겠지. 그때 가서 네가 모남치의 영온을 다시 빼앗으면 2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날 경성에 있을 때 내가 네게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하느냐? 만약 네가 합도할 수 있다면, 국운을 뽑아냄으로써 죽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