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08
906화. 약조
한참 뒤, 머리가 희끗희끗한 예왕이 장고(長考) 끝에 입을 뗐다.
“알고 보니 허칠안 손에 있었군……. 보아하니 감정이 진국검을 가져가서 허칠안에게 하사했구먼. 불문, 무신교, 운주의 역당이 견융산에 집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한 친왕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이게 선조의 위패가 깨지고 고조 황제의 조각상이 훼손된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요?”
역왕이 지팡이를 짚은 채 일어나서 나지막이 말했다.
“어떻든 용기를 지킨 건 잘됐네. 즉시 검주 포정사에게 이 일을 알리고 불문, 무신교, 운주의 잔당이 고수를 얼마나 출동시켰는지, 전투 경과 등등을 남김없이 상세하게 제대로 조사해야 하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해야 고조 황제의 조각상이 파괴된 이유도 알 수 있을 걸세. 감정이 진국검을 경성 밖으로 내보내도록 핍박한 것은 이 전투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뜻이니 필시 하나도 빠지지 않고 조사해야 할 것이야.”
말을 마친 그가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임안을 바라보았다.
“얘야,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안 것이냐?”
임안은 아래턱을 살짝 치켜올렸다.
“당연히 제게는 허칠안과 연락할 방법이 있습니다.”
역왕은 눈살을 찌푸렸고, 영흥제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이에 영흥제는 큰 탁자에 높이 앉아 미소를 그렸다.
“숙공께서는 신심을 닦고 교양을 쌓으시느라 거의 외출하지 않으셔서 모르실 겁니다. 그 허칠안이 아직 굴기하지 않았을 때, 임안이 그를 각 방면으로 보살펴 주어 두 사람의 정이 깊습니다. 임안에게는 이 천자의 체면도 허칠안 10분의 1, 2도 되지 못하지요. 둘이 사적으로 연락하는 방법이 있는 게 이상한 건 아닙니다.”
‘정이 깊다라…….’
임안을 보는 역왕의 눈빛이 반짝였다.
영흥제는 잠시 멈칫했다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역왕을 쳐다보았고, 다시 모든 친왕, 군왕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럼 짐이 죄기소를 써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역왕은 손사래를 쳤다.
뒤이어 예왕이 말했다.
“지금 해야 할 건 이 일을 속히 밝히는 겁니다. 허 은라가 세운 공이 클수록 폐하께 유리합니다. 만약 누군가 조묘의 이상한 움직임으로 폐하를 공격한다면 폐하께서도 여세를 몰아 진상을 공표하시면 됩니다. 이는 폐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로울 것입니다.”
영흥제는 입가에 웃음이 번졌고, 경쾌하게 사황자를 쳐다보았다.
후자는 고개를 숙인 채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 * *
공무 논의가 끝난 후, 회경은 궁녀를 데리고 덕향원으로 돌아갔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회경.”
사황자는 그녀와 방향이 같았다. 그는 친동생이 앞에 있는 걸 보고 곧장 걸음을 재촉해 쫓아왔다.
회경은 걸음걸이를 늦춰 오라버니를 기다려주었다. 동시에 곁에 있는 두 궁녀를 보며 자리를 비켜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사황자는 보조를 맞추며 동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이내 그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가증스럽다! 본래 이는 천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하는 기회인데!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위엄과 명망을 전부 잃게 할 수 있었는데! 너는 보지 못했지? 허칠안과 임안의 정이 깊다고 말할 때 그의 표정이 얼마나 득의양양했는지. 분명히 우리더러 들으라고 한 말일 거다. 임안을 대하는 역왕의 태도도 바로 변하더구나…….”
문득 말을 줄인 사황자가 위아래로 동생을 훑어내렸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허칠안은 본래 네 사람이었잖느냐. 그날 네가 그를 황성에 데려와 연회에 참석시켰고, 그가 시 한 수를 지었었지? 그런데 지금은 임안이 먼저 발 빠르게 목적을 달성했구나.”
무표정하던 회경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약간 화가 난 듯 고개를 돌려 사황자를 쳐다봤지만 말투는 여전히 담담하고 차분했다.
“오라버니께서는 지금 이 국면에 황위에 오르면 영흥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사황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당연히 그보다 더 잘할 것이다.”
회경이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
“오십보백보지요. 지금 대봉의 형세는 한 사람의 힘으로 만회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누가 그 자리에 앉는다고 해도 차이는 크지 않을 겁니다. 현실이 이럴진대 오라버니께서는 왜 그리 조급해하시는 겁니까.”
사황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말뜻은…….”
회경은 뒤돌아 떠나며 한 마디를 남겼다.
“넷째 오라버니께선 오랫동안 역사를 공부하지 않으셨지요. ‘주기(周紀)’ 제2권, 제13장이 정말 재미있습니다. 한가로울 때 한번 들춰보세요.”
* * *
검주.
허칠안은 부도보탑을 몰아 검주성에 둔 모남치, 암말, 백희, 시행을 견융산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시행은 검주에 남아 있는 동안 수련 경지가 봉인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닭 한 마리도 붙들 힘없는 이 화신의 상대가 된다는 건 아니었다.
음, 물론 닭 한 마리도 붙들어 맬 힘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해봐야 했다. 어쨌든 허칠안은 그녀에게 기회를 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백희가 있었다. 비록 이 호요 새끼가 전투력이 쓰레기라 해도 동반자를 잘 돋보이게 하는 핵심 역량은 되었다. 몸이 허약하고 수련 경지가 봉해진 시행을 상대하는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거기다 허칠안은 만전을 기하고자 시행에게 연근산까지 먹였었다.
“다 싸웠어요? 이겼어요, 졌어요? 불문의 손해는 어떤가요?”
백희는 허칠안에게 달라붙어 연신 재잘거리며 견융산의 전황을 알아보았다.
사실 이는 평소 해이한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허칠안은 바로 물었다.
“너 구미천호에게 몰래 소식을 전하려는 거야?”
순간 검은 단추 같은 백희의 눈이 멍해졌다. 몇 초간 어리둥절해 있던 그녀는 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저 몰래 소식을 전하지 않아요.”
‘네 표정이 이미 모든 걸 설명하고 있는데? 음, 어쨌든 영음이보다는 훨씬 똑똑해. 콩알이라면 지금쯤 무서워하면서 도망쳤겠지. 큰오빠가 이렇게 무섭다면서 잔뜩 겁먹어선…….’
허칠안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이겼지. 안 그럼 내가 여기 서 있을 수 있을까? 견융산 전투 후, 도난과 도범이 전사했다. 불문의 호법금강이 완벽하게 사라졌어.”
‘불문에 더는 호법금강이 없다고……?’
백희의 검은 눈이 다시 멍해졌다.
만약 옹주성 밖에서 손해 본 도정 나한을 더한다면, 불문은 고작 한 달 사이에 2품 나한 한 명과 3품 금강 둘을 잃은 것이었다.
이건 마마와 동족들도 몇백 년 동안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물론 마마가 진작 만요국 모든 요괴에게 구주라는 이 큰 연극 무대에서 물러나라고 명령한 것이지만.
‘마마께 얼른 이 좋은 소식을 알려서 마마를 기쁘게 해드려야겠어…….’
백희는 기쁘게 눈을 반짝이다가 문득 허칠안이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에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새까맣고 맑은 두 눈은 다시 순진무구하게 깜빡였다.
* * *
부도보탑을 몰아 견융산으로 돌아가니 저 멀리 끊어져 갈라진 벼랑 가에 뒷짐을 지고 선 노인이 보였다.
무명옷 차림의 그는 하얀 머리가 속박 없이 휘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망한 대지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 눈빛엔 무사의 예리함이 빛나고 있지만, 더 많게는 속세에서 겪은 덧없는 무상함이 진하게 고여 있었다.
허칠안은 부도보탑을 몰아 노인의 곁에 착지한 뒤 홀로 보탑을 나섰다.
“선배님!”
그는 공수하며 예를 갖췄다.
* * *
견융산 주봉은 거의 절반은 무너져 더는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산 내부 구조가 손상됐으니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완전히 안정될 때까지 간헐적으로 무너질 것이었다.
다행인 건 견융 산맥이 수백 리에 걸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독립적인 고산(孤山)이 아니었다.
무림맹은 산을 바꿔 다시 본부를 세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조청양은 군진 의사당 윗자리에 앉아 부맹주 온승필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온승필은 한창 사상자 상황을 설명했다.
주봉이 무너지며 미처 피신하지 못해 죽은 이들이 320명이었다. 이 무리는 당시 여러 이유로 떠나지 못했고, 산이 무너지면서 영원히 매장되었다.
군진 쪽은 전장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전투의 여파가 미치고 집이 무너져 사망자는 134명, 부상자는 500명에 달했다.
“사상자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맹주께서 사전에 노약자, 부녀자, 아이를 옮기셔서 다행입니다. 군진에도 영향을 받아 죽은 자들이 있으나 전부 부녀자, 아이, 노인입니다. 보병과 청장년은 대부분 건물 밖에 있었고요.
본부는 다시 세워야 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 겁니다. 하지만 무림맹의 은고를 미처 옮기지 못해 지금 이미 산밑에 매장되었습니다. 저희에게는 그렇게 많은 인력과 재력이 없습니다.”
소월노, 부정문, 양최설 등은 수심에 잠겼다.
이 전역을 겪은 무림맹은 그야말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인명 피해는 그리 크다고는 볼 수 없어 아직 감당할 수 있는 범위였지만, 몇백 년을 경영한 본부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는 건 막심한 손해였다. 가슴이 다 쓰릴 정도로 재물 손실이 극심했다.
조청양이 말했다.
“은자를 되찾는 건 문제가 아니네. 기껏해야 그때 가서 옛 선조께 도움을 청해 산을 파내고 산재한 돌을 옮겨달라고 청하면 그만이지. 5품 이상의 무사가 함께 돕도록 하지.”
검주상회의 회장 교옹이 말을 이어갔다.
“정말 안 되면, 여러분께 돈을 기부해달라고 청할 수밖에요.”
이 문주, 방주 등은 전부 우두머리로 문파에 재물이 적지 않았다.
부정문이 연신 눈살을 찌푸리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저희가 내놓을 수 있는 은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저희는 현지 이재민을 위로해야 합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관아 쪽 식량에 기대면 이재민의 배를 전혀 배불리 채울 수 없습니다.”
양최설이 말꼬리를 붙들었다.
“산에 다시 본부를 세우려면 그 비용이 엄청날 겁니다. 차라리 절충하여 군진을 핵심으로 본부를 확장하는 건 어떻습니까?”
부맹주 온승필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는 조제(*祖制: 선조 때부터 남겨 놓은 제도)에 맞지 않습니다. 본부를 산에 세우는 건 저희가 무림맹의 설립 취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저희는 언제나 단순한 강호 조직이 아니었지요. 의병입니다. 난세에 성을 공격하고 진지를 철수시키는 의병입니다.”
무림맹 본부는 천연 요새를 점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때, 조청양이 탁자를 두드려 사람들의 논쟁을 끊어냈다.
“승필, 자네가 옛 선조께 지시를 받으러 가게.”
* * *
“내 방금 검주에 가서 한 바퀴 돌았는데 대주 말기로 돌아간 듯했네. 재해 상황을 통제하지 않으면, 2년도 되지 않아 중원은 황조가 바뀔 거야.”
노인이 뒷짐을 진 채 탄식을 했다.
허칠안이 잠자코 있자, 노인은 뒤돌아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왜 그 두 용기가 무림맹을 선택했는지 아는가?”
허칠안이 거리낌 없이 말했다.
“무림맹이 검주에 수백 년을 지내며 검주 질서가 안정됐고, 풍년으로 백성들도 풍족하게 지냈습니다. 지금 대봉 황조의 기운이 쇠약해졌으니 용기도 당연히 주인을 택할 때 무림맹이 황조를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지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로 쇠약해지지 않는 황조는 없네. 그해 내가 군대를 그에게 넘기고 검주로 돌아왔을 때 일찍이 그와 약속했었지. 장차 대봉이 대주의 옛길을 걷는다면 내가 직접 끝내겠다고 말이야.”
그는 허칠안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 여인들이 술사 체계를 세울 거라고는 나도, 그자도 예측하지 못했어. 술사의 탄생으로 재야 필부가 반란을 일으키긴 점점 더 어려워졌지. 외부의 힘이 도울 수 있다 해도, 중원 백성들만으로는 황조를 바꾸긴 어렵네.”
허칠안은 잠시 생각하다 상대를 떠보았다.
“여인들?”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초대 감정이지! 여인보다도 예쁘게 생겼다네. 온종일 대봉의 고조 황제를 따라다녔지. 그 파렴치한 자식이 좋아하는 사람이 여인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면, 나는 그들이…….”
‘의형제를 맺은 좋은 형제인 줄로만 알았을 거야.’
허칠안이 속으로 그 대신 못다 한 말을 끝맺었다.
“선배님과 감정, 음, 당대 감정이 무슨 약속을 했습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역시, 무림맹은 줄곧 감정이 숨겨둔 바둑돌이었어…….’
허칠안이 황급히 물었다.
“무슨 약조입니까? 언제 한 약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