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09
907화. 뒤늦게 깨달은 500년
‘약조라…….’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경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에게는 늘 무기력한 분위기가 풍겼다. 무기력이 결코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기호에는 맞지 않았다.
어쨌든 노인을 보고 있으면 딱 한 마디 말이 떠오르곤 했다.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가 됨. 변화가 극심한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 노인에게는 덧없는 이 세월이란 정의가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대주 말기에 태어난 노인은 이 나라와 같은 나이로, 두 황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완전히 교체되는 걸 지켜본 장본인이었다.
난세에 봉기해 의병들을 이끌고 폭정을 뒤집은 노인. 너무 많은 일을 겪고 너무 많은 사람을 지켜봐 온 그가 무기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무기력함은 어느덧 자연스레 그의 뼛속까지 스며든 듯했다.
하지만 허칠안이 이상하게 여기는 건 감정, 도정 나한 심지어 두 금강 등, 그 초범 고수에게서도 이 같은 무기력한 기운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줄곧 번잡한 속세에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저속한 무사라서?’
한참 뒤,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종 황제가 반란을 일으켜 황위를 찬탈했을 때, 나는 아직 독거 수행하지 않았었지. 당시 대봉 황제는 간신과 가깝게 지내며 조정과 재야 위아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었다. 물론, 한순간 정치를 혼탁하게 하는 게 별건 아니지. 황조 말기의 혼란한 상태와 비교하면 언급할 가치도 없고.
무종은 고조의 손자야. 그 천부적인 자질은 조부에 버금가고, 성격도 똑같았어. 둘 다 지혜와 책략에 뛰어난 인물이네. 그는 당시 혼군과 간신에 대한 조정과 재야 위아래의 불만을 이용해 청군측이라는 이름으로 군사력을 증강해 반란을 일으켰다네. 아주 똑똑했지. 만약 그가 직접 반란을 일으켰다면, 민심도 얻지 못했을 거고 식견 있는 자들의 도움도 얻지 못했을 거야.
당시 그는 3품 무사에 불과했네. 초대 감정의 코앞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지. 그래서 그는 아주 총명하게 조력자 셋을 불러들였네. 유가, 불문, 당대 감정.”
이때, 허칠안이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제가 듣기로 500년 전 무종 황제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가는 시종일관 수수방관했다고 들었습니다.”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수수방관이 가장 큰 도움이지. 안 그럼 당시 유가의 내부 상황 그리고 초대 감정까지 더한다고 무종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부처님께서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에는 불가능한 일이지. 유가는 진작부터 당시 황제에게 불만이 있었네. 초대 감정이 상호 제어하며 유가를 어쩔 수 없게 했을 뿐이지.”
잠시 기다려주던 노인은 허칠안이 조용히 있자 계속해서 말했다.
“무종 황제가 거사한 초기에는 휘하에 군사가 많지 않아 대봉 전체에 맞서기에는 부족했네. 그래서 무림맹으로 생각을 돌렸지. 하여 나더러 출병하라고 책임지고 유세하던 이가 바로 지금의 감정이네.
처음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어. 이 일이 성사된다고 내가 무슨 이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무종이 검주를 내게 분할해 줄 리는 없었네. 실패하면, 내가 100년 넘게 고심하며 운영한 무림맹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었지. 자네가 한번 맞혀봐도 무방하네. 감정 그가 나를 어떻게 설득시켰을까.”
허칠안은 생각이 번뜩였다.
“이 약조와 관련 있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뒤이어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거래였네. 검주로 돌아가 무림맹을 세운 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난 이미 3품 전봉으로 승직하였는데 좀처럼 합도할 수는 없었지.
세상 가장 무서운 것은 고난과 좌절이 아니라 희망을 볼 수 없는 것이야. 애당초 희씨의 수련 경지는 나와 엇비슷했어. 하지만 황위에 오른 뒤 몸에 기운이 더해져 수련 경지가 나날이 진보하더니 결국은 1품 무사 항렬에 발을 들여놓았지. 나는 속으로 잘 수긍이 되지 않아 줄곧 그에게 합도경의 경험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는 걸 부끄럽게 여겼네.”
‘대단한 불치하문(*不恥下問: 자기만 못한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음)납셨네. 할아버지, 견융산이 당신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요…….’
허칠안은 속으로만 조용히 비아냥거렸다.
“난 당시 기운을 얻은 자가 장생할 수 없다는 법칙을 전혀 알지 못했네. 그리고 몇십 년 후, 내가 미처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전에 희씨가 단명해 귀신이 됐어. 뜻밖에도 붕어하고 말았지…….”
노인은 잠시 말을 끊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식 웃었다.
“아마 초대의 그 여인들은 울었겠지, 하하. 난 줄곧 그가 단수(斷袖)일 거라 의심했네. 콜록콜록……. 어쨌든, 난 몇 년간 3품 전봉에서 그 이상 돌파할 수 없었고, 돌파할 희망도 보이지 않았지. 그런데 그날, 당대 감정이 나를 찾아왔네. 내가 출병해 무종을 도와 황위를 빼앗는 데 동참한다면, 내가 2품으로 승직하는 걸 도와주겠다고.”
허칠안이 시원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해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감정한테 속았군요. 감정이 그해에도 노련한 정객(政客)일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노인은 그를 쳐다보더니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얼굴을 했다.
“전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하지만 지금 난 확실히 2품으로 승직했지.”
이 말을 마친 후, 허칠안도 십여 초간은 계속 웃음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는 곧 뭔가가 떠올랐는지 조금씩 웃음기가 사라져갔다.
만약 이것이 영화 촬영 중이고 카메라가 전 과정을 찍고 있었다면 허칠안은 아마 기가 막힌 연기로 그해 시상식을 다 휩쓸지 않았을까.
“…….”
허칠안은 한참 굳은 눈으로 노인을 쳐다보다가 힘겹게 입을 뗐다.
“선배님 말씀은 구색 연뿌리 아니, 제 도움을 통해 감정이 초기 약조를 이행하였다는 뜻입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보다 더 좋은 설명이 떠오르지 않는군.”
쿵! 쿵! 쿵!
허칠안은 세 발짝 성큼 물러나 노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뒤틀린 그의 표정이 놀란 것인지, 공포로 인한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아니면 둘 다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외부인은 그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굳은 얼굴엔 아주 혼란스러운 감정이 뒤섞여 있었고, 눈빛엔 폭발하는 듯한 기색이 들끓고 있었다.
만약 정말 노인이 말한 것과 같다면, 그건 무얼 의미하는가?
“허평봉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천명사에게는 천기를 엿보는 능력이 있어 어느 정도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로 감정은 그가 예지한 일에 간섭할 수 없고, 암암리에 포석을 깔아 어느 한쪽에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요.
천기를 엿보는 건 이미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기에 천기를 누설하면 바로 천벌을 받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여전히 관건은 아닙니다. 관건은……. 500년 전, 감정은 천명사가 아니었는데 그가 어떻게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허칠안의 낯빛이 급격히 나빠졌다. 마치 삼관이 무너진 듯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 무언가 떠오른 듯하네만?”
허칠안은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이 정보에 따라 세 가지 추측과 의혹 하나를 떠올렸다.
첫 번째 추측은 애초 500년 후의 상황을 예측한 게 감정이 아닌 초대 감정이란 것이었다. 이게 사실이면 그에 연관된 비밀은 무시무시할 터였다.
두 번째는 당대 감정의 신분에 문제가 있다는 추측이었다. 그가 초대 감정일 가능성이 있고, 애당초 제자는 초대의 부계정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초대는 왜 심혈을 기울여 ‘자살’을 꾸몄을까? 목적이 무엇일까? 무엇보다 불문의 보살이 이 일에 개입했었다. 모든 보살은 천지를 빼앗아 창조하는 법력을 지녔기에 초대가 몰래 부계정을 팔 수 없었다.
고로 마지막 추측은 위 두 가지가 모두 틀렸다는 것이었다. 당대 감정이 500년 후의 일을 예지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끝으로 드는 의혹은, 지금 술사 체계를 돌이켜보면 사실 제자가 사부 등 뒤에 칼을 꽂는 이 저주는 역설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당대 감정이 무시무시한 만큼 초대도 무시무시했다. 당대 감정은 미래를 예지할 수 있었는데, 그건 초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종 황제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 틀림없이 그를 완전히 제거할 방법을 생각할 수 있었다.
설령 천명사가 미래에 개입할 수 없다 해도, 허칠안은 무종 황제가 평생 군에서 구사일생하는 경우를 수없이 겪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럼 초대 감정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영향을 가하기만 하면 무종 황제는 무조건 끝장이었다.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초대 감정은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유사한 방법은 더더욱 많았다. 초대 감정은 아예 무종 황제가 반란을 일으킬 기회도 찾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 역설은 언뜻 보면 첫 번째, 두 번째 추측을 검증한 듯하지만, 실제론 마지막 세 번째 추측을 검증하는 것이었다. 당대 감정이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면, 그건 확실히 역설을 타파할 수 있었다.
‘다른 해설은 초대 감정이 당대가 등 뒤에 칼을 꽂을 거라는 걸 예견했지만 막지 않고 그와 대련을 택했다는 거야. 당대 감정이 허평봉에 대해 보이는 태도랑 같은 거지. 상대가 내 뒤에 칼을 꽂을 거라는 걸 알지만 나는 막지 않는다. 우리는 술사의 방식으로 생사를 걸고 마지막 승부를 겨뤄보자, 이런 거겠지.
허평봉 말에 따르면 이건 술사 체계의 저주라 피할 수 없어. 술사 체계가 그대로 끊어지길 바라는 게 아닌 이상, 계승하고 싶다면 반드시 제자를, 등에 칼을 꽂는 제자를 받아들여야 해. 속된 말로 암흑가의 규칙인 거지.’
이 외에 허칠안은 현실에 걸맞은 추리 하나를 더 떠올렸다.
이 추리는 그렇게 음모론이 많지 않았다. 진상은 바로 감정이 그해 확실히 노련한 정객이었기에 순수하게 노인을 낚았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하늘 아래 정객은 전부 사전에 알맞은 값을 제시하고 사후에 죄다 무임승차 하지 않던가.
어쨌건 그때 가면 감정도 순조롭게 1품에 승직했을 텐데 저속한 무사의 보복을 두려워하겠는가.
500년 후에 관해서라면 노인은 정말 구색 연뿌리에 의지해 2품으로 승직한 상태였다. 이는 아마 몇 년이 지난 시점에 감정도 자신이 구색 연뿌리를 빌려 약조를 실행할 수 있음을 알고 안배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본질적으로 사실 500년을 예지했다는 일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허심탄회하게 논하자면 허칠안은 이게 진상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500년 후의 일을 정확하게 예지하는 건, 1품 수사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설령 초품이라 해도 불가능했다.
지금 허칠안도 마냥 햇병아리는 아니었다. 무려 2품 정덕을 죽이고, 1품 법상을 격파한 사람이었다. 물론 초품과 접한 적은 없어도 어느 정도는 개념이 자리 잡힌 상태였다.
이쯤에서 계속된 생각을 끊고, 허칠안이 물었다.
“선배님께선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감정이 말하는 약조가 바로 접니까?”
노인이 탄식했다.
“당시 그 늙은이가 당부한 말이 있네. ‘잘 살게. 자네가 합도하는 날이 바로 중원 백성이 자네를 필요로 하는 때네.’
물론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르지. 술사는 언제나 제정신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승직에 성공한 이상, 그가 약조를 지킨 셈으로 쳐야지.”
“…….”
허칠안은 순간 두피가 다 저려왔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 산 꼭대기를 스치더니 먼 곳에 멈춰서 공수를 했다.
“옛 선조, 후배 온승필입니다.”
노인이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자, 허칠안이 소개를 도왔다.
“무림맹의 부맹주입니다.”
노인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