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15
913화. 서막 (1)
그날 밤, 무림맹은 저녁 연회를 개최했다.
축하 목적은 두 가지였다. 관문을 나온 옛 선조를 축하하고, 정의롭게 구원의 손길을 뻗은 허 은라에게 감사하는 것.
이 시간 대당 내에는 허칠안, 초원진, 천종 성자와 성녀, 항원 대사, 모남치, 묘재방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또 조청양 등의 무림맹 간부와 9개 예속 패거리 문주, 방주도 일렬로 앉았다.
가운데 주인 자리는 백발의 노인 구양주였다.
현재 주봉이 무너졌고, 일도 많이 밀려있었다. 하여, 저녁 연회는 대규모로 열리지 않았다. 흥을 돋우는 가희와 무희도 없고, 술과 안주도 간단했다.
하지만 이것이 연회의 무미건조함을 뜻하지는 않았다.
그처럼 틀에 박힌 흥취가 없어도 분위기는 아주 뜨거웠다.
무림맹에 가장 부족한 것이 삼교구류(*三敎九流: 유교·도교·불교와 아홉 학파) 사람이라지만, 이 강호를 누비는 자들에게도 기예는 당연한 벗이었다.
학문을 논하고, 노래와 이야기가 흐르고, 공연이 오르고, 거기다 만화루 여인들의 기예와 가무가 이어지니, 그야말로 흥겨운 분위기가 끊이질 않았다.
한 문파의 주인인 소월노까지 직접 등판해 악기를 타고 노래 한 단락을 선사했다. 허칠안의 반수 시 ‘일약천금중’이었다.
천상의 소리 같은 그 수려한 음률에 주변의 갈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대단해. 칠현금 솜씨가 부향 못지않네.’
허칠안도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미소 띤 얼굴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때, 내내 술만 마시던 부정문이 취기가 오른 듯 탁자를 치며 말했다.
“이건 허 은라의 구절 아니오. 소 루주께서 허 은라를 그토록 흠모했다니. 옛 선조께서 직접 허 은라와 소 루주를 이어주셔야 하는 거 아니오?”
사방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소월노는 검주의 귀중한 보배로서 흠모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누구도 지금 부정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감히 그 어떤 사내가 소월노의 옆자리를 꿈꿀 수 있겠는가.
그들이 생각해도 이 천하에 그녀와 어울릴 수 있는 건 허칠안이 유일했다. 허칠안만이 소월노를 더 높은 곳으로 올려줄 수 있는 사내였다.
이내 구양주가 소월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재능이 출중하구나.”
여기서 허칠안만 소월노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앞으로의 일은 순풍에 돛단 듯 흘러갈 것이었다.
단숨에 사람들의 시선이 허칠안에게 집중되었다.
소월노 역시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온유한 눈으로 허칠안을 보았다.
‘거절하면 낭자 체면이 말이 아니고, 거절하지 않으면 모남치가 또 토라져서 사이가 틀어질 텐데…….’
허칠안이 망설이던 찰나, 곁에서 모남치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소 루주께서는 타고나게 아름다워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허칠안과도 잘 어울리는군요. 싫지 않으시다면 첩실이 되어도 괜찮겠습니다.”
말투, 표정, 태도, 그 모든 것이 본부인이 첩실을 대하는 것만 같았다.
소월노는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가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이 아주머니는…….”
‘아주머니?!’
모남치의 눈썹이 곤두섰다. 그녀는 왼손으로 오른 손목 위의 보리 팔찌를 주무르며 막 주권을 선서할 준비를 했다.
그렇게 저 강호 여인의 위세를 억누르려던 찰나, 모남치는 곁눈으로 자신을 보며 웃는 이묘진을 발견했다.
분명 모남치는 오늘 낮, 허칠안과 결연하게 선을 그었었다.
‘천종 저 잡것이 내가 웃음거리가 되기만 기다리고 있겠구나…….’
깊이 숨을 들이쉰 모남치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뗐다.
“저는 칠안의 어미입니다.”
뒤이어 그녀가 아주 자애로운 얼굴로 허칠안을 쳐다보았다.
“아들? 착하지. 소 루주께서 우리 허씨 집안에 들어와 첩실이 되면 참 좋겠구나. 어미 말이 맞지?”
자리에 있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허 은라가 바깥에 다닐 때 어머니와 동행할 줄이야, 뜻밖인데?’
하지만 모남치의 어머니 선언에도 누구 하나 의심의 눈길을 보내진 않았다. 실제로 모남치의 외양은 충분히 허칠안 어머니뻘로 보였다.
“…….”
허칠안의 입꼬리에 거센 경련이 일었다.
곁에서 초원진과 이영소는 웃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때, 소월노가 냉담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허 은라께서는 숙모님, 숙부님 손에 자랐을 텐데요.”
사람들은 그제야 허칠안에 관한 정보가 떠올랐다. 그는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숙모의 손에 컸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허칠안의 어머니라 주장하는 저 여인은…….
부정문 등이 멍하게 모남치와 허칠안을 번갈아 보았다.
이영소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 부인은 허 은라의 유모입니다. 허 은라가 어릴 적부터 유모에게서 떨어지질 못했기에 이번에도 경성을 떠나 강호를 누비는 동안 특별히 유모를 모시고 온 겁니다.”
초원진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셨다.
이묘진 역시 다른 곳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모남치만은 새빨개진 얼굴로 이영소를 죽어라 노려보고 있었다.
허칠안은 침묵했다.
이렇게 계속 말이 끊기자 더는 혼사를 언급하는 이가 없어졌다.
하지만 부정문, 교옹 등의 저속한 무사는 가끔 묘한 눈빛으로 허칠안과 모남치를 쳐다보곤 했다.
그들이 보기엔 유모라는 여인은 평범하긴 해도 왠지 모를 우아한 분위기와 매력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허 은라가 어릴 때 어머니를 잃어 모성애가 부족하여…….’
부정문은 계속 떠오르는 대담한 생각을 떨치려, 술잔을 높이 들었다.
“지금 무림맹에서는 다들 허 은라가 고조 황제의 환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저희도 고조 황제의 환생을 위해 한 잔 올리겠습니다.”
영웅은 개인의 도덕을 묻지 않는 법. 허칠안이 늘 유모와 함께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모두의 훌륭한 허 은라였다.
* * *
극진한 대접을 받고, 허칠안 일행은 사람들과 작별을 고하고 일어났다.
그렇게 잠시 묵는 거처로 돌아가는 길, 이영소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저 따로 처리할 일이 있으니 여러분들 먼저 가시지요.”
이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러 가는 거지?”
명색이 사매로서 사형의 사사로운 일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도리였다.
“나중에 얘기하자고.”
이영소는 무심히 답하곤, 즉각 소매에서 솟구친 비검을 타고 떠났다.
떠나는 이영소를 보며 이묘진이 콧방귀를 뀌었다.
“너무 수상해, 너무 이상하단 말이지. 저녁 연회에서도 평소와 달리 좀 조용했었지. 소월노와 만화루 낭자들에게 집적거리지도 않고.”
허칠안도 아래턱을 어루만지며 거들었다.
“우린 지금도 무림맹에 있는 이영소의 옛 정인이 누군지 모르오. 묘진, 그대는 아오? 이영소가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견융산은 천종 성산과 멀지 않아 당신들이 하산한 뒤 가장 먼저 유랑하는 곳이 바로 검주라고 했소.”
비연 협객은 인정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영소는 검주에는 홍안지기가 없을 것이네. 어쨌든 나도 잘 몰라. 그러나 내가 이영소와 짝을 이뤄 돌아다닐 때 사귄 홍안지기는 대체로 다 아네. 이영소가 내 앞에서 숨길 리가 없거든.”
순간 허칠안과 이묘진은 서로를 보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큰 문제가 있군!”
“어쩌면 정말 없을 수도 있을 텐데.”
초원진의 말에, 허칠안과 이묘진이 다시 약속이나 한 듯 코웃음을 쳤다.
“허!”
그런 뒤, 허칠안이 명목상 수행원에게 말했다.
“묘재방, 검주에 오기 전 자네가 그에게 만화루에 정인이 있는지 없는지 캐물었을 때 이영소가 어떻게 대답했더라?”
묘재방은 허칠안을 흉내 내며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당시 우물쭈물했었습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처럼요.”
여기까지 들으니 초원진도 흥미가 동한 듯했다.
“이 도우의 다른 두 홍안지기의 기풍으로 볼 때, 사랑하는 사내가 무림맹에 나타난 걸 보고 일찍이 도망쳐 나왔을지도? 지금껏 참기는 불가능하네.”
항원도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 여인에게 무슨 망설일 만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모두가 조용히 항원 대사를 쳐다보았다.
“아미타불!”
항원은 즉각 합장한 채 타인의 사생활을 염탐한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때, 백희를 안고 있던 모남치가 입을 열었다.
“이영소는 분명 정인을 만나러 간 거야. 자네 그 거울, 수천 리를 사이에 두고 감시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걸로 보면 되지 않는가.”
그녀는 조금 전 술자리에서 이영소가 했던 조롱을 잊지 않고 있었다.
순간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허칠안은 즉각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일단 돌아가서, 일단 돌아가서…….”
* * *
일행은 잠시 묵는 뜰로 돌아오자마자 짜 맞춘 듯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 다들 알아서 촛불을 켜고 탁자에 앉아 일제히 허칠안을 쳐다보았다.
허칠안은 지서 파편을 쏟아내 혼천신경을 꺼냈다.
그가 소리를 낮추고 신비로운 어조로 말했다.
“마법의 거울이여, 마법의 거울이여, 알려주오. 이영소의 위치를 아시오?”
혼천신경이 바로 항의했다.
“나는 혼천신경이야. 그리고 넌 왜 늘 사내 염탐을 즐기지? 분명 네게 미인 여럿을 표시해줬건만 지금껏 그 여인들을 보려고 한 적은 없잖아.”
‘뭐, 지금 내가 성인군자라고 칭찬하는 거야?’
허칠안이 다시 재촉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당연히 알 수 있지. 그의 원신을 내 거울에 거둔 적 있어 난 이미 그를 기록해두었다.”
혼천신경은 말을 마치고 청동 거울 면을 투명한 유리 색으로 바꾸었다.
먼저, 거울 면이 물결처럼 넘실대다가 잠잠해지고 한 화면이 나타났다.
이제 모두가 검을 부려 비행하는 이영소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방향은 견융산 서쪽 산맥이었다.
‘옛 정인을 만나러 가는 거지? 근데 옛 정인을 만나는데 이렇게 멀리까지 날아간다고? 설마, 유부녀는 아니겠지?’
다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추측이 스쳤고, 점점 더 흥미가 들끓었다.
특히 모남치와 이묘진은 두 눈까지 반짝거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영소는 비검을 눌러 산에 착륙했다.
그는 일단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더니 품에서 급하게 뭔가를 꺼냈다. 얼레빗이었다.
이내 이영소는 깔끔한 머리를 빗으로 흐트러트린 후, 앞머리 두 가닥을 늘어뜨렸다. 자유로운 탕아 분위기를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영소는 또 지서 파편에서 검은 바탕에 금은 실이 수놓인 긴 옷을 꺼내입었다.
뭐, 탕아에다 귀공자 분위기를 좀 더하고 싶었을까?
그렇게 알 수 없는 치장을 마친 그는 비검을 검자루에 넣은 후 품에 안고 나무줄기에 기댔다.
그는 그대로 그림자 뒤에 숨어,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진짜 놀고 있네…….’
허칠안은 하마터면 육성으로 마음의 소리를 내뱉을 뻔했다.
이묘진도 곁에서 말없이 얼굴을 감쌌다.
‘이영소, 저 천종의 불량분자…….’
* * *
한참 후, 한 인영이 나뭇가지 끝을 밟고 가볍게 날아왔다.
몸놀림이 가뿐한 것이, 뛰어난 경공 실력을 가진 듯했다.
이내 그 형체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인영은 하얗고 긴 치마에 머리를 높이 묶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수려한 새처럼, 승천하는 용처럼 유려하고 빠르게 날았다.
곧이어 새하얀 긴 치마가 산봉우리에 똑바로 섰다. 펄럭이던 치맛자락은 잠잠해졌고, 그녀는 눈알을 굴려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때, 나무 그림자 아래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왔군요!”
그녀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자유로운 탕자 하나가 나무줄기에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검을 품에 안은 사내는 고개를 살짝 숙여 얼굴 반이 그림자에 가려있었지만, 드러난 윤곽만으로도 매우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화려한 검은 옷차림과도 멋들어지게 잘 어울렸다. 여러모로 전과 다름없이 근사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