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22
920화. 얼른 승직하게
울타리 밖, 양천남은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오른손으론 칼을 누르고 서 있었다. 이내 그의 두꺼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 대인, 한동안 못 뵈었습니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버티기 힘들군요. 전 대인께서 옥에서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참 뜻밖입니다.”
사로는 천천히 머리를 움직였다. 어지러이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울타리 밖의 양천남이 시야에 잡혔다.
“뭐하러 왔는가. 나더러 역당에 귀순하라 권하러 온 것인가?”
양천남과는 달리, 사로의 목소리는 몹시도 쇠약하게 쉬어있었다.
양천남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이게 사 대인의 유일한 출로입니다. 조정에서 대인을 구하러 오길 기대하지 마십시오. 버젓한 포정사가 옥에 갇힌 지도 반년인데 물어보는 이가 없지 않습니까. 대인도 총명하신 분이니 이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아실 겁니다.”
사로가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운주는 이미 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났더군.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내가 부임하기 전, 운주 관리 사회는 이미 자네 손아귀에 있었겠지.”
양천남이 웃었다.
“제 손아귀에 있는 게 아니라 성주 손아귀에 있는 것이지요. 저는 운주 포정사가 된 이래로 줄곧 암암리에 도당을 양성하고 심복을 육성했습니다. 그리고 1년 전, 송장보를 필두로 한 무신교 세력이 제거되면서 저도 비로소 운주 관리 사회를 철저하게 장악했습니다. 지금 운주 전체가 저희 손아귀에 있지요. 대인의 목숨까지도.”
운주의 향신, 현지 명문 귀족, 관리 계층은 이미 잠룡성에 귀순하였다. 그들 중 누군가는 귀순을 자원했고, 누군가는 처음부터 잠룡성을 암암리에 돕고 있었다.
짧은 시간, 운주 전체가 대봉 조정의 통제를 빠르게 벗어났다. 이것이 바로 몇백 년을 경영한 잠룡성의 저력이었다.
“사 대인께선 향시(鄕試)의 거인(擧人)과 회시(會試)의 진사(進士)에 급제하셨으니 본디 관리의 명성이 있지요. 잠룡성은 대인과 같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대인, 영리한 새는 나무를 골라 둥지를 틀고, 현명한 신하는 군주를 골라 섬기는 법입니다. 잠룡성이야말로 대인께서 날뛸 수 있는 귀착점입니다.”
양천남은 노파심에 거듭 권했다.
사로가 웃으며 말했다.
“애석하군.”
“애석하다니요?”
“이 7척 몸뚱이가 성현의 책을 헛되이 공부했구먼. 붓만 들 줄 알지,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고. 다들 서생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하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반박할 말이 없군.”
양천남의 표정이 약간 차갑게 변했다.
“오랜 세월 학문에 힘쓰는 건 쉽지 않지요. 사 대인께선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오르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반평생 모진 마음을 먹고 심혈을 기울이셨을 텐데 이를 하루아침에 다 날리실 겁니까?”
사로는 차가운 벽에 기대, 다시 한번 공기 구멍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그의 턱이 천천히 움직이며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마 그럴 수는 없지, 하지만 나는 오랜 세월 뒤, 후세의 미움을 받을까 더 두렵다네. 양씨, 자네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양천남은 말없이 사로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이에 사로는 알아서 자문자답했다.
“초주 포정사 정흥회네. 그는 세상 지식인들에게 무엇이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인지 깨닫게 했지.”
답을 끝낸 사로가 문득 차가운 웃음을 보였다.
“됐네. 자네 같은 사람과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양천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장황하게 말할 필요가 없겠군요. 사 대인께서는 원하던 것을 얻으셨습니다.”
그는 장검을 뽑아 들고 쇠사슬을 끊었다.
쾅!
감옥 문을 걷어차고 양천남이 그대로 성큼 들어왔다. 그가 쥔 철검은 사로의 가슴을 통과해 성벽 끝까지 파고들었다.
사로는 양손으로 검날을 쥐고 몇 번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그의 손은 금세 뜨거운 피로 물들었고, 생명은 붉은 피와 함께 녹아내렸다.
죽어가는 그를 보며, 양천남이 비웃음을 흘렸다.
“아, 대인께 유서를 남길 시간을 드린다는 걸 깜박 잊었군요. 죽기 전 하실 말씀이 있다면 얼마든 하시지요. 안 그럼 영원히 기회는 없을 겁니다.”
사로는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생의 끝자락에선 젊은 날 등불을 높이 걸고 학문에 정진했던 그 시절만 떠올랐다.
그때는 산해관전역도 벌어지지 않았고, 선황도 도를 닦지 않았다. 대봉은 태평의 영광을 누렸으며 백성들의 삶은 그저 평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산해관전역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대봉의 국력은 갈수록 쇠락했고, 해마다 심각한 재해가 찾아왔다.
사로는 태평성대부터 나라가 점점 늙어가는 것을 몸소 겪은 사람이었다. 그도 동년배 지식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락을 향유했던 만큼 피땀 흘려 노력하면 다시 이 나라를 전성기로 되돌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오늘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
저승에 발을 딛기 전, 사로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날카롭게 외쳤다.
“누군가 나 대신 복수할 것이네! 너희 같은 역신은 죽어도 몸이 묻힐 곳이 없을 것이야!”
그는 양천남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거침없이 비웃었다. 그렇게 웃음소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모든 소리가 끊기고 긴 정적이 내려앉았다.
* * *
운주성, 도지휘사부.
저택으로 돌아온 양천남은 곧장 서재로 직행했다.
문을 열자, 마침 접본을 뒤적이는 희현이 보였다.
양천남은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소주! 등기대전(登基大典)이 곧 시작할 텐데 왜 아직 여기 계십니까?”
희현이 접본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한곳에 모은 유랑민이 1만 명이 되지 않네. 예상했던 기대치보다 훨씬 못 미쳐. 어떻게 된 일인가?”
양천남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양공이 청주 변방을 봉쇄하여 유랑민이 넘어오지 못합니다. 산을 넘고 고개를 넘거나 이웃한 주를 돌아와야만 우리 운주에 도착할 가능성이 있지요. 이 양공은 상대하기 쉽지 않습니다.”
희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천남이 다시금 재촉했다.
“반 시진 후면 폐하의 등기대전입니다. 태자이신 소주께서 빠지시면 안 됩니다.”
희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등기대전에 나서지 않을 것이네. 나는 갈 데가 있어.”
잠룡성은 칩거 시기의 ‘은신처’였다. 그러나 지금 희현의 부친이 제위에 오른다면 자연히 세상에 공개될 것이었다.
오늘 등기대전은 운주성 중심지인 백제묘(白帝廟)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그 사로는 귀순하길 원하던가?”
양천남은 고개를 저었다.
“소직이 이미 죽였습니다.”
“죽이는 것도 좋지. 지식인은 늘그막에 명예를 저버리는 걸 가장 두려워하지 않던가. 그 역시 목적을 달성하게 해준 셈이군.”
희현은 한담을 나누듯 담담하게 말했다.
* * *
백제묘.
오늘 운주성 모든 관리가 백제묘에 모였다. 잠룡성 관원도 빠지지 않았다.
문관은 좌측, 오관(五官)은 우측에 정연히 자리를 지켰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광장에 새까만 점들이 빽빽했다.
곧이어 악기 합주 사이로, 밝은 노란색 용포를 입고 머리에 평천관을 쓴 중년 사내가 백제묘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통상 태자의 제위식은 국가 대사라 의식이 복잡했다. 더욱이 신구 제왕의 교체는 장례를 수반하기에 채찍만 올렸지, 악기 연주는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군주는 상복을 입고 선황의 영전에 지극정성으로 절하며, 조묘에서 조상에게 알리는 의식 등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지금 이 제왕의 상황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새로운 군주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백제묘 앞 고대에 서서 위엄있게 전 관원을 굽어보았다.
이윽고 대각선 아래쪽 사천감 백의 술사가 백관을 향해 성지를 펼쳤다.
“무종이 반란을 일으킨 이래, 선조께서는 초야에 숨어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으셨고, 대의는 지금껏 대대로 이어졌다. 짐은 한순간도 선조의 가르침을 잊을 수 없었다. 이제는 힘을 다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강산을 되찾고자 한다…….
오늘날 대봉 조정은 부패했고 새 군주의 무능으로 백성은 평안을 잃고 도처엔 이재민이 가득하다. 짐은 희씨 손이자 황실 정통으로 원이 극에 달하였다. 이제는 응당 높은 곳에 올라 그릇된 모든 걸 바로잡아야 한다…….
오늘, 운주에서 황위에 오른 짐은 국호를 ‘광복(光複)’이라 정하겠다. 너희들이 충성심으로 보좌하고 패업을 공모하길 바란다. 태자는 예법상 장자를 따를 것이다. 천하의 근간이 바로 이곳에 있다. 짐의 적자 희현은 문무를 겸비하고 하늘의 뜻에 속하니 동궁에 배속하겠노라.”
성지를 다 읽은 백의 술사가 말없이 옆으로 가 섰다.
문무백관은 잇따라 무릎을 꿇고 소리 높여 새 황제를 찬양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 * *
운주성 상공.
희현은 조용히 뜬 어풍주 뱃전에서 우레와 같이 퍼지는 함성을 들었다. 몸은 고공에 있어도 그 소리만은 곁에 있는 듯 선명했다.
운주성 백성들은 백제묘 밖 거리나 골목에 모여 의식을 참관했다.
이들은 누가 황제가 되든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백성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먹고 입는 문제밖에 없었다.
그렇게 희현의 부황은 3년간 세금 감면으로 운주 백성을 손쉽게 구슬렸다.
“이때 초범으로 승직하지 않으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가?”
갑자기 온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청광이 솟구치더니 어풍주에 백의를 입은 허평봉이 나타났다.
희현은 웃으며 그를 반겼다.
“국사를 기다렸습니다!”
허평봉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 자질구레한 용기들이 소리 없이 포효하더니 허평봉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영 달갑지 않은 듯했지만 허평봉의 힘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허평봉이 다시 손가락을 꼽아 튕기자 용기 십여 개가 모조리 희현의 몸속으로 돌진했다. 희현의 눈에는 마치 황금색 용 그림자가 찬란한 금빛을 뿜으며 헤엄치는 것처럼 보였다.
이어서 허평봉은 다시 무형의 기운 두 가닥을 튕겼다. 이것들이 희현의 몸속에 합류했다. 이는 도난과 도범, 두 금강의 기운이었다. 그는 2품 연기사의 수법으로 금강의 두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개인의 기운과 국운은 한데 섞어 논할 수 없었다. 고작 세 방법을 동시에 쓰는 것만으론 희현이 혈단을 빨아들여 3품으로 승직할 가능성도 없었다. 이것이 지금에야 비로소 그가 태자에 책봉된 이유였다.
운주의 태자는 당연히 몸에 기운이 더해진 자여야 했다. 물론 이 기운을 대봉 국운 절반을 몸에 짊어진 허칠안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겠지만.
“자네 몸에 용기를 일각만 남겨둘 수 있네. 얼른 승직하게.”
아무리 2품 술사라 해도 용기를 주무르긴 어려웠다. 오직 영향을 가할 수만 있는데, 그 시간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탁!
희현이 품에서 상자를 꺼내 열었다.
그의 눈동자에 순수한 핏빛 한 오라기가 비치고, 연이어 방대한 생명의 숨결이 어풍주를 가득 채웠다.
희현의 손은 걷잡을 수 없이 가늘게 떨렸다. 가슴에서 미친 듯 뛰는 심장 소리도 들려왔다.
이제 배 속에 이 혈단이 들어가면 오로지 두 가지 결과만 있을 터였다.
초범경 무사가 되어 구주 대륙 전봉 반열에 오르거나, 죽어 재가 되거나.
‘국사께서 말씀하셨다. 설사 용기, 금강 둘의 기운 그리고 태자로서의 기운이 있다고 해도 혈단 정제를 성공할 확률은 여전히 5할이 되지 않는다고. 목숨을 걸 때가 왔다…….’
희현은 혈단을 쥐고 눈을 감았다. 지금 머릿속을 스쳐 가는 건 거사를 위해 치욕을 참았던 20년과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비공식적으로 수행해온 인내, 초엽 도사가 죽기 전 그에게 품었던 기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