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26
923화. 십만대산
“본 호법도 도리가 없네. 국주께 나서달라고 청할 수밖에.”
청목호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적과위의 역량은 약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반드시 동등한 위치의 힘을 써야만 대처할 수 있었다.
홍영의 낯빛이 굳어졌다.
“국주께선 지금 해외로 나가 구주 대륙에 계시지 않는데요……. 현재 불문에 살적과위를 지닌 나한은 도액 한 사람뿐인데 그, 그가 어떻게 남강에 왔을까요? 불문의 대·소승 다툼이 이미 끝났습니까? 만약 국주께서 제때 돌아오지 못하신다면, 야희 장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순간 엄청난 침묵이 찾아왔다.
원호법과 청목호법의 표정도 굳어졌다.
이후, 청목호법이 먼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틀뿐이야, 이틀 후면 살적과위의 역량이 육신과 원신을 파괴할 거야.”
바로 이때,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울렸다.
침상 위 미인이 조금 전 인기척에 놀라 깬 듯했다.
여인이 천천히 눈을 뜨자, 매혹적인 여우 눈이 드러났다.
“야희 장로!”
홍영 등이 야희를 둘러쌌다.
야희는 사람들을 하나씩 훑다가 힘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자네들 왔군…….”
청목호법은 고개를 끄덕인 후 나지막이 물었다.
“야희 장로, 자네를 해친 사람이 도액 나한인가?”
야희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소라(阿蘇羅)네.”
‘아소라?’
신세대 호법 원숭이와 홍영이 눈을 마주쳤다. 서로의 눈엔 똑같은 물음표가 떠 있었다. 둘 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산 청목호법의 안색은 급변했다.
“아소라, 수라왕의 막내아들? 그는 진작에 몰락했던 거 아닌가?”
야희 역시 곤혹스러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청목호법, 아소라가 누구입니까?”
홍영이 물었다.
청목호법은 얼굴을 굳히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천천히 말했다.
“아소라는 아수라(阿修羅)의 다른 호칭이네. 수라족에서 가장 강대한 전사만이 지닐 수 있는 칭호지. 지난 세대 아소라가 수라왕이었네. 수라왕이 부처에게 봉마정으로 아란타 산 아래 억눌려 죽음의 길로 들어선 후, 수라왕의 어린 아들이 새로운 시대의 아소라가 되었지.
그는 부친과 형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했고, 수라족을 이어가기 위해 앞장서 불문에 귀의하였네. 결국은 나한 과위를 수련해냈지. 그는 아주 강해. 그 당시 보살 아래에서는 불문 전투력 일인자라 불렸지.
아소라는 그 자체로 매우 강한 전사라네. 불문에 귀의한 뒤 고통을 감내하며 금강신공을 수행해 금강 신체와 영혼을 닦았지. 그러나 이후 금강법상 수행에 실패하면서 오로지 선사 체계만 수행하여 살적과위를 입증하였고.”
‘나한 과위에 금강의 신체와 영혼이 더해졌다라…….’
홍영호법은 이 묘사만으로도 아소라의 강대한 위력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내 흰 원숭이 호법이 물었다.
“그가 나중에 몰락했다고요?”
청목호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불요대전에서 우리 국주가 그를 직접 죽이셨네.”
말을 마친 녹색 빛의 노인은 야희를 돌아보았다.
“그가 죽지 않았음을 어찌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이건 도액 나한보다 훨씬 까다롭네. 국주께서 모의한 일은 계속하기 어려울 것 같구먼.”
앞에 언급한 국주는 그해 만요국 국주를 가리켰고, 뒤에 언급된 국주는 오늘날 국주이자 그해의 공주를 가리켰다.
야희가 홍영을 보며 물었다.
“홍영호법, 웅왕(熊王)을 보았는가? 그에게 산에서 나오라 청했는가?”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홍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무실 거랍니다. 고생스럽게 먼 길을 떠나길 원치 않으셔서 저도 웅왕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아니, 웅왕께 다가갈 엄두도 낼 수 없었지요…….”
설상가상의 정보였다.
청목호법은 깊은 탄색을 내뱉었다.
“지금 계획은 야희 장로 몸속의 역량을 제거할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네. 생명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해.”
야희가 손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네들 먼저 나가게. 마마께 연락해야겠어.”
홍영호법 등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석굴에서 물러났다.
* * *
야희는 가벼운 갖옷을 들춰 침상 밑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안에서 손바닥만 한 여우머리 청동 향로와 검은색 향을 하나 꺼냈다.
그녀가 검은 향을 비벼 밝힌 뒤 향로에 꽂았다.
하늘하늘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자, 야희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푸른 연기를 코로 들이마셨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 안에 강대한 의지가 되살아났다. 오른 눈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왼쪽 눈에선 청광이 넘쳐흘렀다.
곧이어 야희의 붉은 입술 사이로, 고혹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적과위……. 누구를 만난 건가?”
야희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마마, 제가 남하사에서 아소라를 마주쳤습니다. 그는 몰락하지 않았더군요. 어젯밤 제가 남하사에 잠입하여 법진 위치를 살폈고, 마지막 확인을 하다가 진법 밖을 지키고 있는 아소라를 보았습니다.
당시 전 그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그는 콧방귀 한 번으로 저를 공격해 해쳤습니다. 제 둔술이 아니면 아마 돌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잠자코 있던 구미천호가 혀를 찼다.
“어머니가 그해 죽인 게 아니라고? 알겠다. ‘대윤회법상’을 장악한 광현보살이 그를 지켜주고 환생해 다시 수련하도록 보낸 것이다. 그도 당시 생기가 한 가닥 있었을 거다. 500년 후에 제자리로 돌아왔구나.”
야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마께서 저를 구해주십시오. 신수를 봉인하는 계획은 마마께서 돌아오지 않는 이상 실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구미천호가 웃었다.
“나는 널 구할 수 없다. 내 의지는 살적과위를 제압할 수 있지만, 네 몸이 내 의지를 계속 감당할 수는 없다. 이틀 후엔 틀림없이 죽을 거야.
우리 계획이라면, 허, 운주 역당이 이미 황위에 올랐다. 곧 중원의 정통 다툼이 벌어지겠구나. 가나수 보살은 분명히 산에서 나올 것이다. 불문이 도난과 도범, 도정 나한을 잃었으니. 유리 보살이 감정과 싸우다 부상을 입고, 광현과 도정이 아란타에 주둔하고 있으니 마침 남강 불국이 텅 비어있을 때다. 그런데 지금 봉인을 해제하지 않으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겠니?”
야희는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노비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다만, 다만 웅왕이 아직 약조대로 오지 않았습니다. 저희의 보잘것없는 재주로는 분골쇄신한다고 해도 마마께서 주신 임무를 완수할 수 없을 겁니다.”
“너 죽고 싶지 않은 게로구나. 지금 목숨을 아끼고 있잖니.”
구미천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뒤이어 야희의 낯빛이 약간 변했다.
구미천호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 게으른 곰이 오지 않겠다면 오지 말라지. 본좌가 조력자를 찾아놓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도착할 테니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고 있으려무나. 그의 시중을 잘 들거라. 어쩌면 네 목숨을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누구입니까?”
야희가 경계심을 높였다.
구미천호는 놀리듯 웃었다.
“그때 가면 알게 될 거다. 쯧쯧, 이렇게 아름다운 자태를. 본좌가 일찍이 가치가 오를 때까지 잘 기다리고 있었으니 안심하고 기다리려무나.”
야희 왼쪽 눈의 청광이 잦아들고 검은색 향이 꺼졌다.
그녀는 탁자 옆에 가부좌를 틀고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다소 무거운 얼굴로 향로와 향을 거두었다.
그리고 야희는 석굴 밖을 지키는 자요에게 호법들을 모셔오라 명했다.
* * *
세 호법이 돌아오자, 야희는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냉담하게 말했다.
“마마께서 가까운 시일 내에 누군가 도우러 올 것이니 자네들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네.”
호법 셋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느 분이신지요?”
홍영이 캐물었다.
야희는 더욱더 차가운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모르네.”
‘엇, 야희 장로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홍영은 그녀의 태도 변화를 예리하게 눈치챘다.
이어, 흰 원숭이가 홍영을 슬쩍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야희 장로, 홍영이 장로께서 왜 기분이 좋지 않은지 묻고 있네요.”
야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쓸데없긴!”
“…….”
조요는 입을 벌려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 * *
부도보탑 안.
백희는 3층 창가 옆에 엎드려 기어코 두 발로 창틀을 쥔 채 몸 절반을 늘어뜨렸다. 그러다 또 흥분하여 고개를 돌렸다.
“밑이 바로 십만대산 경계 구역이에요.”
말을 하던 백희가 뒷다리를 벽에 몇 번 긁다가 허칠안에게 애원했다.
“허칠안, 저 좀 안아주세요. 저 너무 힘들어요…….”
허칠안은 사람의 속마음을 잘 이해하는 자였다. 그는 바로 백희의 뒷덜미를 잡더니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이렇게 말고요, 이렇게 말고. 괴롭잖아요…….”
백희가 사지를 열심히 파닥거렸다.
허칠안은 여우의 항의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아래쪽 땅 생김새를 굽어보는 데만 열중했다.
그는 한동안 자신이 원시림에 이른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아래엔 뭇 산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빽빽하게 우거진 수풀은 마치 지표면을 뒤덮은 듯했다. 발달된 수계가 마치 경락처럼 산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건 아마 산간 지대겠지. 근데 면적이 너무 넓어. 도처가 산이고, 원시림이니……. 기후는 아주 쾌적해.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 대봉 백성이 이곳으로 도망칠 수 있다면 한재의 고통을 피할 수 있을 텐데. 남강 십만대산이 대봉 영토에서 너무 먼 게 안타깝네. 이 시대는 교통도 발달하지 않았고, 걸어서 여기까지 걸어올 이재민이 어디 있겠어…….’
갖가지 생각 끝에 허칠안은 결국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게 바로 너희 남요(*南妖: 남쪽 요괴)가 대대로 살았던 십만대산인가?”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었다. 자원은 상상하기 벅찰 만큼 넘쳐흘렀다. 만약 대봉이 이 지역을 점령할 수 있다면 목재 자원만 써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부…….”
허칠안은 돌연 고개를 돌려 탑령 노승에게 불법에 관한 가르침을 청하고 있는 모남치를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얼른 말해, 네 야희 언니는 어디에 있지?”
* * *
경성.
숙모는 또 귀한 아들이 참군하여 출정할 거라는 비보를 들었다.
지식 수준이 높지 않고 근시안적이며 자신을 선녀라고 생각하는 숙모에게 전쟁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집과 가족을 잃고,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엄청난 고통 그 자체였다.
올해 가을, 허신년이 군을 따라 요족과 오랑캐를 지원하러 북으로 향했다. 그 한 달 내내 숙모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었다. 신년이 정국의 발굽 아래 죽는 악몽에 시달리느라 한밤중 갑자기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처음엔 숙부도 부드러운 말로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속에선 저도 모르게 불만이 피어올랐다.
‘신년은 매일 당신 꿈에서 죽잖소! 그게 거의 저주하는 거 아니오?!’
저녁 하늘, 반짝이는 촛불 아래 허신년이 식사하는 식구들을 쳐다보았다.
“어머니, 안심하세요. 저 지금 7품 인자라고요.”
자신만만한 그의 말에, 숙모가 고개를 돌렸다.
“7품 인자가 얼마나 대단한데?”
허신년은 잠시 생각한 후에 답했다.
“유가 7품은 인의를 체득하고 도덕을 수립하지만, 전투력이 더해지지는 않아요. 음, 성장한 부분을 굳이 말하자면 저는 점점 더 본심을 지키고 재물과 여색, 술에 유혹당하지 않을 수 있어요.”
숙모가 짧게 혀를 찼다.
“쳇, 그건 아직 나약한 서생 아니니. 나는 차라리 네가 술과 여색, 재물에 유혹당하는 편이 낫겠구나. 칠안이 전에는 너무 착실해서 장래성이 없었잖니. 매일 교방사에 간 뒤로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허 은라가 되었고.”
“…….”
허신년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때, 리나가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 말했다.
“신년 형제는 언제 출정하나요? 저도 같이 남하할래요.”
“응?”
허신년은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우리 집 밥이 맛이 없어졌나?’
리나는 본인이 바란 건 아니었다는 듯 아쉬운 얼굴을 했다.
“어제 허칠안이 내게 연락해서는 남강에 일을 처리하러 갈 거라고 했어요. 아마 고족에 다녀올 것 같으니 제가 길을 안내해주길 바란다고요. 에휴, 경성과 여러분을 떠나기 아쉬워요.”
‘우리 집 흰쌀밥이 아쉬운 거겠지…….’
허신년은 남몰래 리나를 위아래로 훑다가 갑자기 소리를 냈다.
“아, 동행하는 건 좋으나 돈과 식량은 알아서 준비하시오.”
이는 리나의 밥양을 철저히 고려한 것이었다. 그녀 혼자 군량미를 다 먹어 치우는 일은 막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