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29
926화. 반보 무신 (2)
골짜기 안, 사람 하나와 요괴 하나가 가뿐히 착지했다.
이내 허칠안을 동굴로 데려온 흰 원숭이는 그리 깊지 않은 복도를 지나 석굴 앞에 도착했다.
허칠안은 석굴 안의 장식을 한번 훑더니 좀 어리둥절해졌다.
이곳의 장식은 교방사 영매소각의 침실과 똑같았다.
한순간 그는 경성의 교방사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 걱정 없이 즐거웠던 그때 그 시절로…….
‘최고로 찬란했던 내 시절 일부가 여기 부향에게 남아 있었구나…….’
“야희 언니!”
백희가 허칠안의 머리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
여우는 나는 듯 침상으로 달려가 힘껏 도약했다. 배는 이변 없이 침상 가장자리에 부딪혔고, 뒷발을 몇 번 힘차게 파닥인 끝에 침상에 무사히 올랐다. 그러다 여우는 뭔가 위험을 감지한 듯 야희를 건드리지 않았다.
허칠안은 흰 여우를 보다가 침상 옆, 온몸이 푸른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넝쿨에 휘감긴 지팡이를 짚고서 침상 위 여인의 이마를 찌르고 있었다.
그를 따라 영롱한 녹색 빛이 흐르는 물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노인도 외부인이 들어오는 걸 보고, 지팡이를 거둔 채 온화한 낯빛을 보였다.
“이분은 대봉의 야경꾼 허 은라입니다.”
허칠안을 소개한 원숭이는 뒤이어 청목호법도 소개했다.
“청목호법은 저희 요족의 장수 노인으로 몇천 년을 사셨습니다. 듣건대 전임 국주께서 자라는 걸 지켜보셨다지요. 지금의 국주께서도 그를 만나면 조부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수련 경지는 높은 편이 아니지만, 항렬이 놀라울 정도로 높네. 본체가 아니라 목령(木靈)으로 응집되어 만들어진 법신…….’
속으로 판단을 내린 허칠안이 읍하며 말했다.
“청목호법을 뵙습니다.”
청목호법은 연신 손사래 치며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감히, 감히요! 귀하께서는 초범 무사시니 이 늙다리는 그냥 청목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순간 흰 원숭이가 쪽빛 눈을 크게 떴다.
‘초범 무사? 이 사람이 바로 국주가 찾아낸 조력자구나! 배후에 있는 자를 대신해 길을 안내하는 앞잡이가 아니라…….’
직접 보고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정보가 틀리지 않았다면, 허칠안은 확실히 경찰이 있던 해에 궐기하였다. 또 정보에선 이 허칠안이 사건 해결의 기재라고만 했지, 수련의 기재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아니, 어떠한 기재라고 해도 고작 1년 남짓 만에 작은 인물이 초범으로 승직하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다 문득 흰 원숭이는 한 생각이 번뜩였다.
‘눈앞의 이자는 허 은라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다!’
한편, 허칠안은 푸른 노인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지금 내가 기기를 장악한 정도면 보통 사람은 내 진짜 경지를 발견할 수 없을 텐데. 요족은 하나같이 인재구나…….’
이내 허칠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늙은이는 그저 생명에 극도로 민감할 뿐입니다. 귀하의 혈기는 마치 바다와 같습니다. 초범경만이 이런 드높은 생기가 있지요.”
청목호법은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하고 겸손했다.
허칠안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쯤에서 한담을 끊어냈다.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청목호법은 즉시 뒤로 물러나 자리를 양보했다.
허칠안은 침상 옆에 앉아 의식을 잃은 여인을 제대로 마주했다.
잠시 그는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눈앞의 여인은 그가 아는 부향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달걀형 얼굴, 조그맣고 도톰한 입술, 오똑한 코, 곧은 눈썹과 새빨간 눈매 아래 부채 같은 속눈썹까지.
허 색마의 어항 속, 이보다 더 매혹적인 여인은 없었다.
‘역시, 너무 비인간적인 미모야…….’
헤벌쭉해진 그는 이 와중에도 야희의 윤곽을 한번 훑은 후에야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파~
금빛 물결무늬가 자극에 반응하며 흔들리더니 허칠안의 가슴에 부딪혔다. 그러나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제야 원호법도 눈앞의 이 ‘허 은라’가 3품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살적과위의 힘은 절대 4품 경지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떠합니까?”
곁에서 청목호법이 물었다.
흰 원숭이 호법은 바쁜 허칠안을 위해 친절을 베풀었다.
“허 은라의 마음이 제게 알려주네요, 와! 오늘 밤 꼭 거사 치른다!”
이내 원숭이 호법은 몹시 충격받았다는 얼굴로 청목호법 곁으로 가, 허칠안을 향한 경계를 드높였다.
‘아이 XX…….’
허칠안은 황급히 생각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했다.
“제가 체내 살적의 힘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다들 멀리 떨어져 계세요.”
청목호법과 흰 원숭이 호법은 말없이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 봐도 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꿈도 꾸지 마.’
허칠안은 살짝 한숨을 뱉었다.
‘그래, 그럼 말든가…….’
그는 곧 손바닥만 한 어두운 금색 보탑을 공중에 띄웠다.
“부도보탑?!”
갑자기 청목호법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흰 원숭이는 이 법보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불법의 힘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두 호법의 눈이 진지해졌다. 지금까지의 경계와는 아예 결이 달랐다. 이미 그들은 허칠안이 정말 국주가 말한 조력자가 맞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청목호법은 말없이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흰 원숭이 호법의 볼에는 흰 털이 자라났고, 동굴 내 자요들도 강적을 마주한 듯 눈매가 날카로웠다.
그때, 백희가 침상 옆에서 앞발을 힘껏 휘둘렀다.
“무서워하지 말라고. 부도보탑은 우리 요, 아니, 우리의 법보라고.”
석굴 안에 있는 요족들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아직도 곤혹스러움과 호기심이 가득한 눈치였으나, 억지로 억누른 채 더는 묻지 않았다.
이때, 허칠안은 이미 탑령과 소통하였다. 그는 약사법상의 힘을 시전해 살적의 힘 제거를 도와달라고 청했다.
곧 소형판 부도보탑이 천천히 회전하며 부드러운 금빛을 쏟아냈다.
금빛에 푹 젖은 야희는 신성함이 더해져 한층 신비로운 매력을 발산했다.
“약사법상…….”
청목호법이 조용히 말했다. 수명이 유구한 수요(樹妖)는 부도보탑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전혀 놀란 기색은 없었다.
이제 야희는 눈에 보일 정도로 안색이 붉어지고 숨결도 편안해졌다. 그녀를 괴롭히던 살적의 힘은 결국 봄눈처럼 녹아버렸다.
어쨌든 그녀는 아소라에게 정면으로 공격당한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여파를 좀 받은 거라 부도보탑의 위력 정도면 살적을 쫓기엔 무리가 없었다.
“됐습니다.”
허칠안이 부도보탑을 거둬들였다.
흰 원숭이 호법은 즉시 청목호법을 쳐다보았다. 청목호법은 바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확신을 주었다.
둘은 이제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초범경이 야희 장로를 구했고, 곁에는 연대 책임을 지는 백희 장로도 있었다.
허칠안은 바로 국주가 말한 조력자가 확실했다.
뒤이어 흰 원숭이 호법은 투명한 쪽빛 눈으로 허칠안을 한참 주시하였으나 그의 속마음을 ‘들을’ 수 없었다. 쪽빛 눈엔 약간 실망한 빛이 스쳤다.
“으음…….”
야희가 신음하며 속눈썹을 조금씩 꿈틀댔다.
천천히 떠오르는 시야엔 처음으로 모호한 사람의 형체가 잡혔다.
그녀는 눈을 찌푸린 채 초점을 잡았다. 자세히 보니 사내 같았다.
그 순간, 야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제 마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초조하고, 경계심은 높아지고 감정이 어지럽게 뒤얽혔다.
“깼소?”
그 사람의 형체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야희는 그대로 온몸이 굳고 말았다. 하늘에서 천둥과 벼락을 맞는대도 이보다 충격적이진 않을 것 같았다.
야희는 천천히 침상에 앉은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치 호수를 머금은 듯한 그녀의 눈 속에 멍한 안개가 솟아올랐다.
“허랑…….”
야희가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분명 허칠안을 알아봤다기보단 잠꼬대에 가까운 말투였다.
이것이 현실일 리는 없었다. 밤낮으로 그리워하던 이를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겠는가. 야희는 틀림없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한참 후, 야희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출렁거렸다.
“……정말 허랑이에요?”
그녀도 이제는 꿈이 아니란 걸 깨달았는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표정은 점점 환해졌고, 감격에 겨운 나머지 결국 허칠안의 손을 잡아당겼다.
“허랑? 허랑……!”
“그래, 정말로 나요. 치수도 그대로인데 한번 직접 재보겠소?”
허칠안도 예전 그 모습 그대로 능글맞게 대꾸했다. 언젠가 영매소각의 침실에서 종종 음담패설을 하며 놀았던 그때 그 나날처럼.
야희는 금세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로 허칠안을 살짝 흘겨보았다. 그리곤 힘없이 몸을 일으켜 허칠안의 품을 찾았다.
“허랑, 어떻게 온 거예요? 여긴 어떻게 찾았어요?”
그녀의 목소리엔 오랜만에 만난 재회의 기쁨과 당혹감이 함께 묻어났다.
야희가 기억하는 허칠안은 여전히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 앞날이 까마득한 5품 화경 무사였다.
그러다 야희가 ‘사후’, 마마의 휘하로 돌아오면서 모든 소식이 끊겼다.
둘은 수없는 강산에 가로막힌 듯,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도 없었다.
이 시각, 원호법은 입을 쩍 벌린 채 혼란에 빠져있었다.
‘이 대봉의 은라가 정말 야희 장로의 사내라고?! 야희 장로가 인족 사내를 찾았다고?’
이 일이 퍼지면 얼마나 많은 웅요(*雄妖: 수컷 요괴)가 분개할까.
원호법은 이를 부정하고 싶어도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타인의 마음을 들을 수 있지 않은가. 지금도 야희의 뜨거운 마음이 분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청목호법은 원호법 곁에서 고개를 내저으며 실소를 터뜨렸다.
‘아, 너희 남강 쪽에는 인터넷이 전혀 뚫리지 않았구나…….’
허칠안이 야희를 보며 물었다.
“그대, 대봉의 일을 조금도 모르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가 원경제를 참수한 지도 고작해야 몇 달이 지났다. 그 후 강호를 떠도는 중에 일어난 일은 따로 말할 것도 없었다.
예를 들어 부도보탑을 빼앗고 도범, 도난 두 금강을 베어 죽인 일은 며칠 전 일어난 일이기에 방대한 정보망이 없다면 전혀 알 턱이 없었다.
야희가 고개를 저었다.
“만요국 요중(妖衆)은 각자 맡은 구역이 있어요. 제가 마마 곁으로 돌아온 후에 남강을 다스리는 요족으로 파견되었지요. 그녀를 대신해 남국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신수의 나머지 사지가 봉인된 위치를 살피는 거예요. 중원은 제 관할이 아니라 소식이 닿지 않아요. 허랑의 소식을 알고 싶어도 마땅한 인력과 경로가 없었어요.”
‘분업이 아주 명확하네. 이건 효율을 높일 수도 있고, 구미천호가 각지의 요중을 통제하는 수단이기도 하고…….’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나는 지금 이미 3품 초범이오, 불멸의 몸이지.”
순간 멍해진 야희가 생기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허칠안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야희는 탄식하듯 숨을 내뱉었다.
“저는 진작부터 허랑이 남의 밑에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요. 다만 수련경지가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발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지금 어떠한 품격인지 상상이 되는걸요.”
“야희 언니! 나 좀 안아줘, 나 좀 안아줘!”
드디어 틈을 발견한 백희가 야희의 몸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야희도 미소 지으며 흰 여우를 가슴에 꼭 품어주었다.
“백희가 허랑과 함께 있었나요?”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를 따라 한동안 떠돌았소.”
백희는 야희의 품에서 고개를 몇 차례 흔들었다. 조금 적응이 되지 않는 건지, 그리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왜 그래?”
야희가 물었다.
“불편해…….”
백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희의 얼굴엔 당혹감이 묻어났다.
“너 예전에는 언니가 이렇게 껴안는 걸 제일 좋아했잖아.”
‘더 좋은 베개를 찾았거든…….’
허칠안이 속으로만 조용히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