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47
944화. 순수한 마음
이각(*二刻: 30분) 후.
허신년이 숨죽여 조용히 기다리던 그때, 원호법이 돌연 걸음을 옮겼다.
“원호법!”
허신년은 바로 그 뒤를 쫓았다.
이내 허신년은 짙은 경의가 담긴 쪽빛 눈을 마주했다.
“……도대체 뭘 보신 겁니까?”
원호법은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순간, 허신년은 조마조마한 마음에 표정이 굳어졌다.
“원호법,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시지요.”
원호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방금 남강 낭자가 생각한 건 이러합니다. ‘저녁은 뭘 먹지? 내일은 뭘 먹지?’”
‘???’
허신년의 머릿속에 큰 물음표가 스쳤다.
‘꼬박 이각 동안 생각한 게 그거라고?’
뒤이어 원호법이 표정을 굳힌 채 천천히 이야기했다.
“그 어린아이라면 본 호법이 적수를 제대로 만났습니다. 아이가 저렇게도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마음이 마치 맑은 거울 같습니다. 지금껏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맑은 거울처럼 아무것도 없이 순수하다…….’
허신년은 경악했다. 영음이 이 정도로 비범함을 타고났을 줄이야!
하지만 몇 초 뒤, 문득 허신년의 표정이 변했다.
‘무려 이각 동안 영음이 아무 생각도 없었다고? 머릿속이 텅 비었어?’
“본 호법도 이런 건 불법에 조예가 깊고 마음에 때가 묻지 않은 고승에게서만 본 적이 있습니다. 역시, 허 은라의 동생답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미 범속을 벗어난 경지에 이르렀다니요!”
원호법이 감탄에 겨운 칭찬을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원호법, 단단히 오해한 거 같은데…….’
허신년은 여기서 당최 무슨 해명을 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 * *
남강.
허칠안은 아무도 없는 은밀한 산골짜기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신수의 두 다리가 있었다. 이제 다리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본래 신수의 시체가 분리될 때 두 다리는 완전히 잘렸었다. 그러나 며칠 기혈을 ‘수집’한 결과, 다리의 힘이 크게 회복되었다.
다리에 붙어 있던 잔혼은 성정이 오만하고 호전적이지만 교활하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뽐내고 교만한 모습은 약간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또 그는 약속은 언제나 꼭 지켰다.
지금 허칠안과 두 다리가 마주 선 것도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신수의 두 다리는 봉마정 두 개를 뽑은 뒤, 허칠안과 다시 전투하기로 약속했다. 정정당당히 허칠안을 물리치려는 것이었다.
강자와의 사투는, 가히 인생의 낙이라 할 수 있었다.
“준비됐는가? 이 봉마정 두 개를 제거하면 네 실력은 3품 대성에 접근할 것이다. 그때 가면 우리 시원하게 한판 붙자고.”
두 다리 안의 잔혼이 의념을 전달했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봉마정을 풀고 시원하게 한판 붙지요. 남강이 다 저희 터입니다.”
봉마정을 제거하는 건 신수에게 심력의 소모가 컸다. 그렇지만 신수의 두 다리는 약간 열정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구먼.”
* * *
산골짜기 밖.
야희 등은 땅의 진동을 느꼈다.
뒤이어, 멀지 않은 곳의 산골짜기에서 무시무시한 공기 기둥이 솟구치더니 하늘의 구름층을 찢어버렸다.
산골짜기를 중심으로 주변 수십 리 짐승이 전전긍긍하며 기어다니기 시작했고, 날짐승은 나뭇가지에서 추락했다.
수련 경지가 낮은 요괴들 역시 다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
십여 초 뒤, 무시무시한 위압이 누그러지고 산골짜기가 고요해졌다.
하지만 요괴들은 공포심에 아예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허랑의 경지가 또 어느 정도 회복됐어. 마지막 봉마정만 남았어…….”
야희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간 함께 지내며 그녀도 허칠안의 현 처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몸에 국운 절반을 짊어진 그는 대봉과 생사를 같이하고, 운주 반란군과는 목숨을 걸었다. 이런 상황에 힘은 하나하나 다 소중했다.
“과연, 금강 둘을 베어 죽일 수 있는 허 은라답군.”
홍영호법이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더 큰 기쁨에 젖었다.
만요국이 저토록 훌륭한 맹우를 만나다니!
모두의 마음에 안정감을 안기는 사실이었다.
* * *
산골짜기 안,
기운이 쇠약해진 신수의 두 다리가 지친 듯 의념을 전달했다.
“잠시 기다려라. 생명의 정혈을 뺏으러 갔다가 다시 와서 싸우겠다.”
그는 막 허공을 가르고 가려던 찰나, 갑자기 드높은 기기에 뒤덮였다.
“너……!”
‘돌아선’ 신수의 두 다리에선 두려움과 의문이 비쳤다.
허칠안은 웃으며 이야기했다.
“선배님, 저 지금은 선배님과 싸울 수 없습니다. 선배님도 밖에 나가 정혈을 빼앗으면 안 됩니다.”
“번복하고 싶나?”
신수의 두 다리는 놀라면서도 화가 났다.
곧이어 허벅지 근육이 팽창하더니 폭발할 것처럼 부풀었다. 힘을 축적해 제대로 싸우기 위한 준비였다.
동시에 그는 기기를 부풀려, 자신을 뒤덮은 속박에 세차게 부딪쳤다.
허칠안은 침착한 미소로 여유롭게 말했다.
“아니, 번복하는 게 아니라 시기가 좋지 않은 겁니다. 물론 제가 어떻게 변명하든 대사는 이해하지 못하시겠지요. 그럼 대사의 규칙에 따르겠습니다. 강자가 높으니 약자는 복종할 수밖에 없는 법. 지금 나는 최강자의 신분으로 네게 얌전히 잠들어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크게 노한 신수는 투지가 거세져, 속박에 가하는 힘이 더 강해졌다.
“빈승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칠안은 손을 뻗어 그 다리를 힘껏 눌렀다.
퍽!
신수의 다리는 무릎을 꿇었고 더는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약해졌다.
이내 허칠안은 손현기가 선물한 옥병을 꺼내, 욕을 퍼붓는 신수의 두 다리를 안으로 거둬들였다.
생명을 삼켜 정혈을 빼앗는 일은 아주 큰 소란을 일으킬 게 뻔했다. 또한 신수와 전투를 벌여도 큰 움직임이 발생할 것이었다.
지금 불문의 척후는 이미 뿔뿔이 흩어져 요족의 행적을 감시하고 수색 중일 터였다. 이런 때에 허칠안과 신수의 전투가 관측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아소라는 당장 이곳으로 올 것이고, 허칠안은 절대로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여기엔 손현기도, 구미천호도 없었다. 신수의 두 다리와 손을 잡는다고 해도 상대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현재 신수의 나머지 사지 모두가 허약한 상태였다. 아직 정혈 보충을 받은 적도 없으니 사실상 큰 힘은 발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수의 두 다리는 이러한 염려를 전혀 고려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전투 생각에만 미친 다리와는 큰일을 도모할 수 없었다.
이때, 야희가 요족들을 데리고 산골짜기에 들어왔다.
“신수 대사께선 봉인되셨나요?”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병을 내밀었다.
“응, 우선 그대가 거두시오. 구미천호에게 구주로 돌아오면 백희에게 연락하라고 전해주시오. 내가 신수의 왼손을 보내주겠다고.”
야희의 정교한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허랑, 가려고요?”
“고족에 다녀와야겠소. 잘됐군, 그대가 고족 상황을 좀 얘기해주시오.”
* * *
허칠안은 야희를 안고 석굴 안으로 향했다.
그는 기왕 남강에 왔으니 그 천고 할머니와 얘기를 나눠보려 했다.
칠절고는 내력이 세서 그것이 무슨 물건인지, 왜 고신의 기억이 있는 건지 반드시 제대로 알아내야 했다. 이렇게 찝찝하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저도 허랑과 고족에 가고 싶은데 요족 사무가 너무 많네요.”
야희는 헤어지기 아쉬워했다.
석굴로 들어온 허칠안은 야희를 탁자 옆에 앉혀주었다.
“기왕 고족에 간다니 놓치면 안 될 좋은 물건들이 좀 있어요. 제가 목록을 만들어 드릴게요……. 허랑?”
그녀는 점점 가까워지는 허칠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 그대는 그대대로 글을 쓰시오. 봄밤은 너무 짧으니 우리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 * *
이튿날.
붉은 새가 4장(丈)에 달하는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날아올랐다.
산들을 지나, 동남쪽을 향한 비행이 시작되었다.
“홍영 형, 그 낡은 탑보다 훨씬 빠른데요?”
묘재방이 크게 웃었다.
“우리 적조 종족은 하늘의 제왕이자 당당한 맹주입니다!”
홍영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묘재방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형씨랑은 전혀 관계없는 얘기 아닌가?’
하지만 이곳엔 원호법이 없기에 그는 자신 있게 웃을 수 있었다.
“하늘의 제왕이라니, 대단합니다. 홍영 형과 친분을 맺을 수 있어 참으로 크나큰 행운이군요.”
“아니요. 묘 형과 친분을 맺게 된 것이 본 호법의 영광이지요. 지금쯤 선산에 푸른 연기가 자욱할 듯합니다(*祖坟冒青烟, 좋은 일이 생겼다는 비유).”
‘허, 너희 요족에도 조상님 무덤이 있는 거 확실해?’
허칠안은 거의 정신을 놓은 듯한 아부 행렬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그는 헛기침을 한번 짜내곤 옆에 있는 모남치를 돌아보았다.
“콜록콜록! 남치, 나…….”
모남치는 바로 고개를 틀어버렸다.
물론 부도보탑엔 각종 물자가 있어 그 안에 열흘이고, 보름이고 있을 수 있었다. 생활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모남치는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난 후에야 풀어준 허칠안이 원망스러웠다.
허칠안은 인내심을 갖고 설명했다. 이번 여정은 위험했고, 방금 생사를 건 대전을 치렀다고.
그는 요족의 자요와 겨루느라 체력을 극도로 소모했고, 지금은 일이 원만히 해결돼서 자요를 설득해 만요국과 동맹을 맺었다고 이야기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모남치는 갑자기 버들눈썹을 치켜세웠다.
“손 줘봐.”
그런데 이 거지 같은 사내는 허락도 없이 슬그머니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허칠안은 히죽거리며 제대로 안지 않아 추락할까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분노’한 모남치는 그를 힘껏 밀쳐냈다.
한참을 시끄럽게 시간을 보내던 도중, 모남치가 돌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희는?”
“품에 안고 있는 거 아니에요?”
허칠안은 그녀의 품을 보더니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아, 방금 마마께서 던졌나 본데요.”
“뭐? 얼른 돌아가서 찾아! 떨어져 죽으면 어쩌려고!”
모남치가 소리쳤다.
“떨어져도 안 죽어요, 안 죽어…….”
* * *
십만대산 경계를 벗어나니 참 다채로운 지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갈수록 평원, 호수 등이 점점 더 많아졌다.
‘구주지리지’를 보면 남강은 두루뭉술하게 2대 구역으로 나눌 수 있었다.
‘십만대산’과 ‘극연(極淵)’으로, 두 명칭은 남강에 웅거하는 거대한 두 세력을 대표했다. 만요국과 고족이었다.
“왜 ‘구주지리지’에는 남강의 맛있는 음식이 쓰여 있지 않지?”
시냇가 암석 위, 모남치가 가부좌를 틀고 남색 표지의 책을 읽고 있었다.
이 시각, 묘재방과 홍영호법은 요리를 맡았고, 백희는 한쪽에 엎드려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칠안은 웃으며 모남치 곁에 앉았다.
“그건 유가 성인한테 물어보셔야지요. 아마 유가 성인이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나 본데요.”
‘구주지리지’는 유가 성인이 구주를 두루 돌아다니며 3년에 걸쳐 쓴 저서로, 구주 각지의 산천 지형, 하류 분포, 민속 특징이 간단히 기록돼 있었다. ‘대봉지리지’는 추후 유가 후손이 유가 서인의 저서를 모방한 것이었다.
모남치는 허칠안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하지만 산천 지형과 각지에 흩어진 부족은 아주 상세히 기록돼 있던데.”
그때, 갑자기 그녀의 입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이 무슨 미개인들이야?”
남강의 부족은 아주 많았다. 적게는 몇백에 많게는 수천이었다. 그 많은 이들이 흡사 하늘에 뿌려진 별빛처럼 남강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의 풍습은 아주 이상했다. 모남치 눈엔 미개인처럼 보일 법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