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52
949화. 역고부 (2)
목두와 토룡의 안내에 따라, 허칠안 일행은 험한 산비탈을 넘어 역고부 세대가 거주하는 백산에 도달했다.
이 높은 비탈에 서서 멀리 바라보니 백산은 마치 우뚝 솟은 성벽 같았다. 수백 리나 이어진 백산이 북방 전체를 가로막고 있었다.
산간에 내린 운무는 보일 듯 말 듯 창망하면서도 원시적인 기운을 풍겼다.
산기슭은 광활한 평원으로, 하류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경작지는 네모난 덩어리로 구획돼 있었다. 농작물은 저마다 다른 색을 띠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색깔이 한데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유채화처럼 보였다.
지금 들판과 평원 사이엔 개미처럼 미미한 사람 형체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물을 쳐 생선을 잡거나 밭을 가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산과 들판 곳곳에 초가집, 황토집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크기도 제각기 다 다른, 나름대로 구색을 갖춘 건축물 집단이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전체적으로 세상과 무관한 분위기였다. 속세를 벗어난 듯한 방대한 촌락이 참으로 아름다운 전경을 자아냈다.
네모난 얼굴의 목두가 멈춰서 기침을 짜냈다.
“저희는 여기까지만 모시겠습니다. 돌아가 순찰해야 하거든요.”
그는 아주 서툰 중원 표준어로 말했다.
허칠안은 일찍이 남쪽 상인이 남강 사람과 자주 통상한다는 말을 들었었다. 품목은 도자기, 찻잎, 비단 그리고 소금과 철 등의 금지품 무역이었다.
‘그 말이 진짜였네. 고족이 정말 세상만사에 무관심하다면 이쪽 사람이 어떻게 중원 표준어를 쓰겠어?’
이내 활을 멘 토룡이 리나를 자세히 살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집에 돌아간 뒤에 햇볕을 좀 많이 쐬라. 피부가 이렇게 희니까 보기 좀 그러네. 안 그럼 너와 혼인하고 싶다는 사내는 한 명도 없을 거다.”
말을 마친 그는 모남치를 힐긋 쳐다보았다.
‘나는 뭐하러 보는 건데…….’
모남치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물론 현재 그녀의 용모가 평범하게 변한 건 맞지만, 피부는 여전히 눈부시게 하얗고 매끄러웠다.
* * *
토룡, 목두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허칠안의 일행은 고갯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평원에 진입했다.
이동 중, 리나는 길가에 있는 역고 족인들과 즐겁게 인사를 나눴다.
“아상(阿桑) 아주머니! 저 돌아왔어요.”
“리나? 어째 그리 못나게 하얘진 거니!”
“흑바(黑巴) 아저씨, 저 돌아왔어요!”
“리나 돌아왔니? 옆에 있는 사람은 중원에서 데려온 노예니?”
“아니요, 제 친구예요.”
“잠(蠶) 할머니, 저 돌아왔어요!”
“리나니? 리나가 돌아왔구나. 눈이 좋지 않으니 좀 가까이 오거라. 얘야, 본래는 연초에 할미가 족장을 찾아가 혼담을 꺼내고 싶었단다. 우리 집 손자가 아직 아내를 맞지 않았잖니. 너희는 함께 자랐으니……. 됐다. 할미는 너희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단다.”
허칠안은 말없이 역고부 족인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중엔 무명옷을 입은 이도 있고,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이도 있었다.
체격은 중원 사람보다 더 크고 건장했다. 그래선지 밭을 갈 때면 가축 대신 인력을 쓰곤 했다. 그들은 혼자 수백 근 무게의 수산물을 운반할 수 있고, 홀로 작은 배 한 척을 메고 왔다 갔다 뛰어다닐 수도 있었다.
허칠안이 조용히 관찰한 뒤에 짤막한 평을 내렸다.
“사람이 좀 적은 것 같은데…….”
리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사냥하러 나간 거예요. 우리 남강은 땅이 비옥하지 않아 그쪽 중원만큼 그렇게 좋지 않고 먹을 것도 많지 않거든요. 저희 역고부 족인은 매일 먹을 걸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움직이는데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답니다.”
‘음, 너희가 너무 잘 먹어서 그런 건 아니고……?’
허칠안은 이 생각은 그냥 생각만으로 끝내고 논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리나를 따라 평원을 지나치자 가옥이 점점 더 많아졌다. 도로도 갈수록 널찍하고 평평해졌다.
이내 일행은 백산에서 가장 큰 건축 단지에 이르렀는데 이곳에는 역고부 고위층이 살고 있었다.
리나의 집은 건축 단지 가장 높은 곳의 두 채가 이어진 대원(大院)이었다.
이 대원 옆엔 여러 초가집과 황토집이 붙어 있었는데 리나는 그 안에 자신들 집에서 일하는 하인이 살고 있다고 했다.
* * *
“아버지, 저 돌아왔어요!”
리나가 거침없이 외쳤다.
몇 초 뒤,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땅이 진동하였다.
내원에선 거의 9척에 달하는 거인이 맨발로 걸어 나왔다.
사내는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과 삼베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얼굴형은 약간 네모났으며, 거친 이목구비는 정교하다고 말하긴 좀 어려웠다.
눈은 쪽빛에, 머리카락은 짧게 난 상태라 천연 곱슬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꼭 환속(還俗)한 뒤에 머리카락이 막 자라기 시작한 승려 같았다.
사내의 우람한 체구는 불문 금강과 비교해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 미치진 않았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가볍게 진동하는 땅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용도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딸을 보고 일순간 멍해졌다.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흐뭇한 낯빛으로 말했다.
“중원에서 많은 일을 겪은 모양이구나. 이렇게 천지개벽할 만한 변화가 있을 줄이야.”
말을 마친 그가 허칠안 일행을 한번 훑어보았다.
“이들은 포로로 잡은 노예니? 어린아이는 데리고 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일도 제대로 못 하고 때려죽이지도 못하는데.”
“노예 아니에요! 중원에서 사귄 벗이죠. 이 아이는 제가 거둔 제자고요.”
리나가 한 손으로 콩알이의 머리를 살짝 눌렀다.
‘제자라니…….’
용도의 두 눈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그에 따라 혼돈 상태에 빠진 맹수 같은 기운이 온 정원을 뒤덮었다.
하늘에서 쏟아진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사람들 머리 위를 뒤덮었다.
딸인 리나조차 고개를 숙인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흰 여우는 모남치의 품에 웅크려 몸을 덜덜 떨었다.
모남치 역시 불편함을 느끼곤 허칠안 뒤로 살짝 몸을 피했다.
‘엄청난 압박감이다…….’
허칠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리나는 아버지가 20년 전 산해관전역 때 3품 전봉급 인물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현재 봉마정 8개를 뽑아낸 허칠안은 3품 대성으로, 경지로는 리나의 부친과 차이가 크지 않지만 정말 싸운다면 허칠안의 패색이 더 짙을 터였다.
“기운을 숨긴 건가?”
용도는 허칠안을 자세히 살폈다. 허칠안에게선 어떠한 기기 파동도 감지할 수 없었다. 더 불가사의한 건 그의 몸에 신체를 보호하는 신광인 동피철골이 없다는 것이었다.
허칠안은 겉보기엔 그냥 보통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평범한 자가 어찌 용도의 위압에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
남강 말을 아예 모르는 허칠안은 용도가 쳐다보자 일단 인사부터 올렸다.
“용도 족장을 뵙습니다. 저는 영음의 큰 오라비입니다. 이 일은 용도 족장께서 봐주실 수 있길 바랍니다.”
허칠안은 읍하며 대봉 표준어를 썼다.
금강보다도 훨씬 더 몸이 좋은 이 부족의 수장이 말을 알아듣지 못할까 걱정되진 않았다. 리나와 부족의 순찰자도 대봉 표준어를 구사할 줄 아는데, 그 족장이 못 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용도는 허칠안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드디어 그 무시무시한 힘을 거두고 중후하고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리나, 네가 제자를 데려온 건 나와 장로들이 저 애를 인정하길 바라서겠지. 그럼 공정하게 원칙적으로 처리하자꾸나. 장로를 소집해 의논하자고.”
리나는 어려서부터 똑똑했지만, 제멋대로이기도 해서 보통은 생각나는 대로 일을 저질렀고 뒷일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용도 역시 리나가 중원의 한 아이를 제자로 거두었다는 것이 그리 의외라거나 황당무계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물론 그것이 화가 나지 않았단 뜻은 아니었다.
용도는 허영음을 한번 쳐다보곤 돌아서 밖으로 걸어갔다.
“아버지께서 직접 가시려고요?”
리나가 기뻐했다.
용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따가 천고부에 다녀오려 한다. 천고 할머니께서 내게 서신을 보내 통지하셨거든. 하지만 그 전에 우선 네 문제부터 처리해야겠구나.”
“아버지, 저도 같이 갈래요!”
리나가 하인에게 허칠안 일행을 대접하라고 한 뒤, 아버지 뒤를 쫓아갔다.
‘오면서 보니까 역고부 청·장년은 대부분 본거지에 없던데. 아마 사냥하러 갔겠지? 부대를 파견해서 주위 감시자를 피하고 곧바로 이곳을 급습하면, 짧은 시간 내로 역고부 보금자리를 파괴할 수 있겠는데…….’
허칠안은 속으로 조용히 군사를 배치하고 진을 쳤다. 하지만 금세 아무 의미가 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청·장년이 주둔지에 없다면, 설령 여기를 파괴한다고 해도 역고부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없었다.
게다가 방금 평원에서 보고 들은 것에 따르면 역고부 전원이 모두 병기나 다름없었다. 할머니조차 나는 듯이 걸으며 동작이 아주 날쌔다니 이곳은 그냥 신체적 약자가 없다고 봐야 했다.
또 하나, 역고부는 가난한 듯했다. 집에 아무것도 없는 건 둘째 치고, 아예 값어치 나가는 물건이 없으니 뭐든 망가져도 그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칠안이 귓바퀴를 움직였다.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중원에서 사 온 게 분명한 진차(*陳茶: 차의 일종)를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내려놓고 웃었다.
“리나가 돌아왔군.”
허칠안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리나가 헐떡거리며 돌아왔다. 방금 누군가와 싸운 듯 그녀의 옷이 너덜너덜했다.
“사부님, 옷이 망가졌어요!”
허영음은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리나의 치마를 가리켰다.
“응, 방금 장로들과 한판 싸웠거든.”
리나는 허리춤에 양손을 얹었다. 아직 화가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 * *
리나는 허칠안 일행을 데리고 마당을 나와 널찍하고 평탄한 길로 내려갔다. 최종 목적지는 건축 단지 밖 공터였다.
허칠안은 곧 이곳에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모여있는 걸 발견했다.
사람들은 원을 이루고 있었는데 원 안에는 의자 6개가 있고, 의자에 노인 6명이 앉아 있었다.
용도는 그 원 안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허칠안은 저 여섯 노인이 역고부 장로임을 알아보았다. 사실 뭐 이건 발가락으로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장로들은 왠지 그의 상상과는 좀 달랐다. 본래 허칠안이 생각하는 장로들은 백발이 성성하고 지팡이를 하나 정도는 짚고 있어야 했다.
보통 장로라 하면, 거의 죽음과 가까운 나이였지만 자신의 집단에서는 높은 위엄과 명망을 떨치는 자들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부패와 고집스러움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역고부가 ‘장로’에 대한 허칠안의 고정관념을 확실히 깨부쉈다. 물론 이들도 백발이 성성하긴 한데, 나이는 들어 보이지 않았다.
거의 보디빌더와 견줄만한 근육질이라고 해야 할까.
그 혈기는 결코 청년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리나가 이방인을 데려오는 걸 보고, 한 장로가 차갑게 웃었다.
“도망치긴 왜 도망친 것이냐. 방금 나는 아직 실력을 다 발휘하지도 않았는데 경황없이 도망쳐버리다니.”
리나는 버들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냥 노쇠하신 몸 곧 쓰러지실까봐 봐드린 거거든요?”
백발의 근육질 장로는 가슴 근육을 한번 부풀린 뒤 콧방귀를 뀌었다.
“이 몸의 근육이 절대 만만한 것이 아닌데.”
다른 장로들은 이미 겉옷을 벗고 지팡이를 내던졌다. 여섯 장로 모두가 리나와 한판 싸울 작정인 모양이었다.
이때, 까무잡잡한 피부의 한 젊은 미인이 소리쳤다.
“대장로! 먼저 리나가 비술을 사사로이 전수한 일을 처리하시지요.”
“역시 아추(阿楸)가 총명하군.”
대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결투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 한마디로 장내가 매우 고요해졌다. 다들 엄숙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리나와 이방인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 보고 모남치와 백희는 다소 겁에 질렸다. ‘꾸밈없는’ 이 역고족이 갑자기 스산하고 냉담하게 느껴졌다.
동족인 리나를 보는 눈길도 얼음같이 차가웠다.
모남치는 비로소 역고부 족규의 삼엄함을 사무치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