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55
952화. 밀회
“할머님!”
용도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다른 족장은 그를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천고 할머니가 응답했다.
“그래, 내 이번에 너희를 불러 모은 이유는 서신에 제대로 쓰지 않았다. 중원의 일은 모두 다 들었겠지?”
할머니의 자상한 음성엔 산전수전 다 겪은 자의 세월이 묻어났다.
용도 등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천고 할머니가 다시 말했다.
“이 아이의 스승은 죽은 내 남편과 친분이 있다. 스승의 서신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내가 너희들을 소집해 공무를 논하길 바란다더구나.”
말을 마친 그녀가 백의 술사를 쳐다보았다.
갈문선은 용도를 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소생 갈문선, 운주 인사입니다.”
그는 전에도 여러 족장에게 같은 말을 했지만, 지금은 용도만 보고 말했다.
용도는 별다른 표정 없이 그를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한 손을 뻗었다. 목적은 천고 할머니 앞 나무 대야에 담긴 육잠 유충이었다.
탁!
용도가 유충을 한 움큼 쥔 순간, 천고 할머니가 그의 손을 찰싹 때렸다.
용도는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결국 천고 할머니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대야를 밀었다.
용도는 눈을 반짝이며 다시 유충을 한 움큼 쥐어 입으로 넣었다. 눈까지 감고서 제대로 즐기는 표정이었다.
갈문선은 얼른 고개를 돌리곤 구역질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그는 숨을 깊게 한번 들이쉰 후, 웃는 낯으로 말했다.
“스승님께서 제게 여러분께서 군사를 보내 대봉을 공격하게끔 설득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각 부족 족장의 표정은 차분했다. 놀라지도, 동하지도 않았다.
잠시 후, 두봉을 두른 산송장의 모자 아래서 거칠고 냉한 음성이 울렸다.
“그럼 우리는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지요?”
갈문선이 웃으며 말했다.
“전쟁의 승리로 취할 수 있는 이익은 상상하기 어렵지요. 20년 전 산해관전역 때 불문과 대봉은 승리자로서 전자는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 저력이 점점 더 두터워지고 뛰어난 인재를 많이 배출했습니다.
대봉은 국운 절반을 잃었지만, 저와 스승님이 따져보니 전사한 위연과 일찍이 몰락한 정덕제를 더한다면 대봉의 초범 고수는 무려 8명이나 됩니다. 만약 스승님과 천고 노인이 협력해 대봉의 그 국운 절반을 훔쳐 가지 않았다면, 지금 구주에서 불문과 상호 대립할 수 있는 건 대봉뿐입니다.”
손바닥에 전갈을 올린 여인이 입을 열었다.
“할머니, 뭐라고 하는 거예요? 전 못 알아듣겠어요.”
천고 할머니가 탄식했다.
“20년 전 대봉 국운을 빼앗고, 유가 성인 조각상을 보수하기 위해 그 죽일 늙은이와 감정의 대제자가 공모하여 산해관전역을 추진하였다.”
그녀는 그해 일을 여러 족장에게 상세하게 얘기해주었다.
얘기는 끝났지만, 천장 아래는 찬물을 맞은 듯 고요해졌다.
산해관전역 때 고족의 많은 고수가 죽었다. 그중에 초범도 적지 않았다.
이내 여인이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살구 같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고신을 봉인하는 건 수천 년간 변치 않는 고족의 목표이니 저희는 천고 노인의 행위를 이해할 수도 있고, 따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운은 어디에 있지요?”
갈문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국운은 여전히 대봉에 있지만, 또 대봉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은 허칠안 몸속에 기숙하고 있지요.”
순간, 용도의 눈썹이 세차게 치켜 올라갔다.
“허칠안이 누구예요?”
란옥이 물었다.
고족의 몇몇 족장도 잇따라 집중했다. 매우 낯선 이름이었다.
잠시간 침묵 후, 용도가 입을 열었다.
“현재 대봉의 제일 무사네.”
‘대봉의 제일 무사라…….’
란옥의 눈이 반짝였다. 꼭 내내 원하던 장난감 인형을 본 듯한 빛이었다.
갈문선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는 제 스승님의 적장자입니다. 본래 국운을 기숙하는 용기로 삼았기에 국운을 빼내면 용기는 죽습니다. 그는 그 자체로 버려진 자식이지요. 하지만 사모님이 회임하셨을 때, 갑자기 번복하시어 몰래 운주에서 도망쳐 경성에서 그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감정의 시야에 들게 됐고, 스승님께서는 후환이 두려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20년 동안 꾹 참으며 무엇도 물으러 가지 않았지요.”
갈문선이 잠시 말을 그쳤다. 고족 족장들은 허칠안 부자의 원한만 알면 되었다. 자세한 사정까진 진술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몇몇 족장들은 어떤 생각에 잠긴 듯했다.
잠시간의 공백 후, 갈문선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대봉의 상황은 여러분께서도 어느 정도 들으셨을 겁니다. 유랑민이 화가 되었는데 조정의 국고가 텅 비어 이재민을 구휼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남쪽에서는 저희 운주군이 북벌을 목적으로 출병했고, 서쪽에서는 서역 각국의 군대가 집결하였습니다. 만약 고족 여러분이 저희에게 합류한다면, 대봉은 의심할 여지 없이 패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이렇게 큰 중원이 전부 저희에게 돌아오는 거지요.”
란옥이 깜짝 놀랐다.
“불문도 개입했다고?”
몇몇 족장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때, 두봉을 걸친 산송장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실질적인 걸 얘기합시다. 쓸데없는 얘기는 적당히 하시고.”
두봉의 말투가 기분 나쁠 법도 했지만, 갈문선은 오히려 웃었다. 그의 말 덕에 고족에게 적의 상황을 분석해줄 기회가 생겼다.
진정 고족을 끌어들이고 싶다면, 먼저 해야 할 건 이익으로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이 가능하다는, 승리의 희망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만약 상대하는 적이 불문이라면, 제시하는 이익이 아무리 커도 고족은 절대 상대하려 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불문도 개입할 예정이며, 대봉의 처지가 엉망진창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몇몇 족장은 확실히 마음이 움직였다. 무엇보다 방금 시고 족장의 말에 내포된 뜻은 사실 협력에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갈문선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침착하게 말했다.
“조급해하지 마시고 제 말을 천천히 들어보십시오. 스승님께서 제시한 보수는 일이 성사된 후, 우주와 청주 절반을 고족에게 할양하고 고족이 남강에서 나라를 세워 기운을 응집하도록 돕는다는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술사에게 기운을 응집하는 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되면 남강 절반과 중원 영토 일부를 통치하는 여러분은 유가 성인의 조각상을 복원하여 고신을 진압하는 기운을 충분히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란옥 등은 소리 없이 눈빛을 교환하며, 서로의 눈에 비친 설렘을 읽었다.
갈문선이 다시 또 덧붙였다.
“우주와 청주는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은 경작에 능합니다. 건국한 뒤에 역고부는 더는 먹을 것으로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용도 족장, 집단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거절하실 리 없겠지요.”
용도는 천고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님, 어떻게 보십니까?”
모두가 주목한 그때, 천고 할머니가 차분하게 말했다.
“앞으로 무수한 가능성이 있겠지. 마치 대지에 널린 하류가 수많은 갈래로 나뉘고 갈라지는 것처럼. 이것이 그중의 한 가지 가능성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네.”
천고부는 미래의 한 귀퉁이를 엿볼 수 있었다.
두봉인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시고부는 동의합니다. 아버지께서 산해관전역에 돌아가셨습니다. 위연의 ‘칠일살진(七日殺陳)’에 돌아가셨지요. 이 원수는 반드시 갚을 겁니다.”
란옥이 탄식하며 뒤를 이었다.
“산해관전역 때 저희 정고부 족인 역시 손해가 막심했지요. 족인은 대봉과 불문을 원수로 여깁니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독극물을 먹고 있던 중년 사내는 입안의 음식물을 다 삼킨 후 담담하게 말했다.
“중원 토지가 비옥한 건 거짓이 아니나 독극물, 독초가 부족합니다. 우리 독고부에게는 유혹이 크지 않군요. 하지만 고신을 봉인하는 건 확실히 거절하기 어려운 조건입니다.”
살구처럼 동그란 눈을 가진 심고부 족장은 귓불의 뱀을 어루만지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일은 갈 장군의 단편적인 말만 들으면 안 됩니다. 우리 고족이 출병하는 건 가능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저희는 족인을 북쪽으로 파견하여 정보를 알아봐야 합니다. 만약 상황에 착오가 없다면 그때 군대를 출동시켜도 늦지 않습니다.”
이때, 두봉을 걸친 산송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영자(影子), 자네는 어떤가.”
“다 괜찮네!”
천장 안에서 목소리가 메아리쳤지만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암고부의 족장이었다. 여태껏 계속 여기 있었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잘 숨어 있었을 뿐이었다.
고족 사람들이면 진작에 익숙해진 그림이었다.
암고부는 밤낮도 없는 죽음의 도시 같았다. 이 부족 족인은 자신을 숨기는 데 아주 능했고, 천하에 그 부족이 없는 곳이 없었다.
어떤 때엔 돌 하나를 뒤집었는데 밑에 있던 그림자에서 암고부 사람을 끌어낼 수도 있었다. 혹은 실수로 깊은 구덩이에 빠졌는데 안에 있던 암고 족인이 인사하며 말할지도 몰랐다.
“아주 공교롭군. 자네도 내려왔는가!”
란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용도, 자네 역고부는?”
산송장 꼭두각시가 담담히 말했다.
“용도가 어찌 거절하겠나, 역고부는 먹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텐데.”
모든 이가 용도를 쳐다보았다.
거인의 거친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는 동족들을 훑어보더니 다시 갈문선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고신을 봉인하든, 역고족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식량이든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을 동하게 하는 조건이군.”
갈문선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나는 거절하겠네!”
용도의 결론에, 갈문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게 용도를 쳐다보았다.
* * *
남강에 있는 극연의 중앙 지대엔 몇백 리에 걸친 틈이 있었다. 너무 깊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 틈 주변은 한없이 넓은 원시림으로 그 안에 수많은 독충과 맹수가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타고난 고로, 능력에 따라 일곱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바로 고신에 대응하는 일곱 가지 능력이었다.
원시림 외곽, 황량한 들판에 역고부 장로들이 기명 제자 허영음을 데리고 이곳 극연에 도착했다.
“이 구역에 만연한 힘은 역고에 대응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힘이 드세져 초보자에게는 적합하지 않지. 여기까지만 하면 된다. 방금 네게 가르친 비법은 기억했느냐?”
대장로가 애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자하게 물었다.
허영음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전부 다 잊었어요.”
대장로는 크게 칭찬했다.
“좋아! 순수하며 거짓 없는 마음, 때 묻지 않은 순박함, 역시 역고 수행에 선천적으로 적합한 천재답구나.”
장대한 체구에 백발이 성성한 다섯 장로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옆에 있는 학부모 허칠안도, 모남치도 속으로 쉼 없이 빈정대느라 바빴다.
백희도 이 남강 사람은 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견문이 얕고 나이가 어린 까닭에 정확하게 평가할 수는 없었다.
역고부 장로와 족장 그리고 리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허영음 쟁탈전을 펼쳤다. 장로들은 정말 족장과 필사적으로 싸우려 했었다.
거기다 족인들은 옆에서 잇따라 갈채를 보내며 족장이 장로를 때려죽일지, 장로가 족장을 때려죽일지 제대로 된 승부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허칠안이 묘책을 떠올렸다.
족장 용도가 허영음을 제자로 거두고 장로 여섯은 그녀를 기명 제자로 거두는 것이었다. 리나는 부친을 대신해 절학을 전수하는 방향이 있었다.
허칠안의 기지는 과연 역고부 모든 이의 환영을 받았다.
결국 그는 여기서도 ‘아추 낭자처럼 총명’한 인재로 평가받았다.
“잊어버려도 두려워하지 말거라. 네가 역고의 힘을 흡수할 수 있게 이 사부가 인도해줄 테니.”
대장로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이 어리버리한 조그만 얼굴은 볼수록 친근했다. 그야말로 역고부의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허칠안은 돌연 목덜미가 저려 오면서 깊이 잠든 칠절고가 소생함을 느꼈다. 이 구역의 힘에 아주 강한 갈망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