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75
972화. 업화를 잠재우려면
허칠안은 ‘문지기’를 떠올렸다. 지키는 게 무슨 문일까?
아니, ‘문’은 아마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백제는 신마가 몰락한 일을 묻지 않았지. 이건 진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야. 만약 문지기가 신마를 도살했다면, 왜 정보를 알아내려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고신은 원래 문지기가 유성인 줄 알았다고 했어. 하지만 유성은 천 년 전 인물이지. 이로써 문지기는 아마 신마를 죽인 살인범이 아닐 거라는 걸 알 수 있어. 신마가 몰락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백제는 우선 도존이 어디 있는지 물었고, 도존이 아마 이미 몰락했을 거라는 걸 안 뒤에야 문지기가 누구인지 물었어. 이건 백제가 도존이 문지기라고 의심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 아닌가? 대시대가 막을 내릴 때, 그게 빠질 리는 없지. 쯧, 이게 바로 유성이 모든 초품을 봉인한 이유는 아닐까?’
허칠안은 치밀한 논리적 추리에 근거해 유용한 결론들을 얻어냈다.
‘아, 참! 위 공께서 유서를 통해 말씀하신 적 있지. 이 세계는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하다고. 그는 이 속의 비밀을 알고 있던 게 아닐까? 혹은 짐작한 바가 있거나? 만약 그렇다면, 위 공의 구상은 더 이상 조당에만 국한되지 않을 거야.’
“배불러요.”
순간 허영음의 목소리가 허칠안의 생각을 깨웠다.
허영음은 아직 흥이 다하지 않은 듯 접시를 핥고 있었다.
허칠안도 정신을 차리고, 설거지가 필요 없을 듯한 그 접시를 보았다.
“정말 배불러?”
“한 접시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허영음은 내친김에 민첩하게 굴었다.
“충분해. 저녁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허칠안은 그대로 동생을 안아 들고 침상에 눕혔다.
“자.”
“근데 배부르게 안 먹으면 잠을 잘 수가 없잖아요.”
콩알이는 나름대로 열심히 투쟁했다.
그리고 몇 분 뒤.
도로롱- 도로롱-
콩알이는 편안히 꿈나라로 떠났다.
* * *
허칠안은 그림자에 녹아들어 족장의 대원을 떠났다.
수면은 그에게 필수가 아닌 일종의 문화생활이었다. 특히 오늘은 얻은 정보량이 너무 많아 잠을 잘 기분도 나지 않았다.
백산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그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연못을 찾았다. 몸을 담그고 내친김에 옷도 빨 작정이었다.
오늘 고족 족장과 맞붙고, 또 극연에 갔던지라 몸이 좀 더러웠다.
“에휴,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로 내 위생 관념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 목욕하지 않고 이도 닦지 않은 채로 잠자는 일이 허다하니까…….”
비록 초범 강자한테 위생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풍덩!
허칠안은 옷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청량하고 쾌적한 물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칠안이 바로 서 있으니 연못은 딱 그의 허리까지만 닿았다. 사내의 유려한 선은 강인한 힘이 넘쳤고, 상반신 근육은 보기 좋게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과장될 정도로 허울뿐인 근육이 아니었다.
거기다 얼굴까지 준수하고 남성적인 미모를 갖췄으니, 허칠안의 뒤에선 마치 후광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이성이 볼 땐 가히 유혹적이라 할 만했다.
“하하, 허 은라의 몸을 보니 탐이 나서 길을 걷지 못하겠군.”
갑자기 기슭에서 곱고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저 기슭에, 아름다운 여인이 달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매혹적인 얼굴의 미인은 흰색 가슴 가리개와 흰색 바지 겉에 얇고 긴 치마만 두른 채 아주 시원한 자태를 뽐냈다.
“뭐하러 왔지? 물론 너와 석 달을 함께하겠다 약속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허칠안이 불쾌한 기색을 비쳤다.
란옥은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더니 손으로 어깨를 스치며 얇고 긴 치마를 털어 냈다. 그렇게 그녀는 천천히 연못으로 걸어 들어왔다.
차디찬 연못 물에 긴 다리와 허리가 잠기고, 그녀는 서서히 허칠안 앞으로 걸어와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낮에 순언의 정독을 흡수했는데 정독이 조금씩 쌓여서 참을 수 없이 근지럽더라고. 허 은라가 너무 보고 싶었어.”
‘간지러운 게 확실히 마음인 거야?’
허칠안이 차갑게 말했다.
“돌아가라.”
란옥은 계속해서 붉은 입술을 오므린 채 애교를 부렸다.
“너희 사내들은 속마음과 달리 말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만약 나와 밀회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여기는 뭐하러 온 거지? 네가 내 미행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말하지는 마.”
허칠안은 탄식을 했다.
“내가 여기에 온 건 너와 밀회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어서다.”
란옥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설마 순언?”
허칠안은 고개를 저었다.
“뒤를 봐.”
란옥은 의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달빛 아래,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연못 기슭에 우의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머리에 연화관을 쓰고, 고검(古劍)을 등에 멘 채, 오른팔 오금에는 총채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경국지색이란 말이 절로 떠올랐다. 이목구비는 아주 아름다웠고, 미간에 주사가 있어 맑은 선기(仙氣)도 두드러졌다.
한차례 밤바람이 불어와 우의를 펄럭였다. 그녀는 언제든 허공을 타고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녀는 소리 소문 없이 란옥의 5장(丈) 내로 침입할 수 있었다.
란옥은 버들눈썹을 곤두세우고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란옥의 눈빛에는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곁에 허칠안이 있다는 이유로 배짱이 제법 두둑했다.
“네 목숨을 노리는 자다!”
낙옥형의 웃음은 연못처럼 차디찼고, 눈빛은 더욱 서늘했다.
순식간에 온 천지가 검기로 가득 차 사방팔방에서 란옥을 공격했다.
띵! 띵! 띵…….
쇠털처럼 가늘지만, 비처럼 빽빽한 검기가 금빛 층에 가로막혔다.
허칠안은 금강신공의 공기 벽을 펼쳐 분노에 찬 낙옥형의 일격을 막았다. 덕분에 란옥은 다행히 10,000개 화살에 몸을 꿰뚫릴 뻔한 위기를 모면했다.
이윽고 허칠안이 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국사, 고족 정고부 족장이자 대봉의 맹우이니 사정을 봐주시지요.”
허칠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란옥에게도 설명했다.
“대봉 국사이자 내 도려다.”
낙옥형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으나, 결국 하늘 가득한 검기를 거두었다.
“가지!”
허칠안은 란옥을 가볍게 밀어 그녀를 연못에서 내보냈다.
란옥은 그대로 먼 곳까지 흩날려 갔다.
낙옥형도 허칠안을 특별히 막진 않았다.
훼방꾼을 쫓아낸 후, 허칠안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남강에 일을 처리하러 왔는데 대봉과는 거리가 좀 멀어 한동안 국사와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낙옥형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청주에 가 손현기를 찾았는데, 자네가 남강에 있다고 하더군.”
그녀는 남강에 온 뒤, 호신부를 추적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허칠안은 그녀를 한참 주시하다가 말했다.
“국사께서는 업화를 견디실 수 있는 듯합니다만?”
낙옥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달과 비교하자면 업화가 다소 약해졌네.”
‘그래서 지금까지 억제할 수 있었다고?’
허칠안은 얼른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국사께서 육지신선에 또 한 걸음 가까워지셨군요.”
본디 도문 1품을 육지신선이라고 불렀다.
낙옥형은 그제야 웃음을 보이며,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남강은 오랑캐 땅이라 객잔을 찾을 수 없더군. 내가 자네를 데리고 중원으로 돌아가지.”
‘쌍수하는 데 의식을 치르는 마음가짐이 필요한가?’
허칠안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좋습니다. 황량하고 인적이 없어 방해하는 사람이 없지요.”
낙옥형은 아름다운 얼굴에 서리가 내린 듯 그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허칠안은 기슭으로 걸어가 그녀의 너른 소매를 잡아당겼다.
낙옥형은 소매를 도로 잡아끌더니 차가운 얼굴을 하고 말을 하지 않았다.
허칠안이 소매를 다시 잡아당겼고, 낙옥형은 다시 또 도로 잡아끌었다.
한차례 실랑이 후, 결국 낙옥형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못 이기는 척 물속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 * *
송산현, 성벽 위.
허신년은 군장을 입고 손에는 횃불을 든 채 균열과 웅덩이로 가득 한 마도 위를 걸으며 차례로 성을 지키는 군비를 철저하게 점검했다.
민병은 성벽 위에 삼삼오오 모여 부서진 성벽 수리에 한창이었다.
송산현 남쪽은 험준한 산봉우리와 인접해 있고, 지세가 아주 높아 성벽 역시 보통 현성보다 높게 솟아 있었다. 서쪽은 천연적 방벽인 송하가 있어 적군의 대규모 집결을 차단하기 용이했다.
이 때문에 엄수해야 할 건 동성문과 북성문이었다.
이는 송산현의 지리적 이점이었다.
이밖에 송산현은 조운을 독점하는 지역에 있어 무역이 발달하고 토지가 비옥하며 지세가 풍족해서, 늘 식량이 넉넉하게 비축되어 있었다.
이상 여러 가지 이유로 송상현은 양공이 배치한 두 번째 방어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지 세 곳 중 하나가 되었다.
양공이 허신년에게 맡긴 중책은 이 송산현을 굳게 지키는 역할이었다.
당시 허신년은 이같이 대답했었다.
“성이 있어야 사람이 있고, 성이 죽으면 사람도 죽는 법이지요.”
어제 반란군 6천 병마가 성 밑까지 쳐들어와 성을 지키는 주둔 군대와 격렬한 교전을 펼쳤다.
반란군 화포 대대는 화포 40대를 끌어내 성벽 위 화포 12대와 맞폭격했고, 보병들은 화포의 엄호를 받으며 성을 공격했다.
교전은 황혼까지 이어졌다. 반란군은 결국 시체 800구를 내버린 채 철수했고, 수비군은 300명을 잃었다.
“그 후레자식들이 밤에 습격하진 않겠지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허신년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평범한 외모의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칼을, 한 손에는 밀전병을 들고 있었다. 사내는 칼자국 가득한 가벼운 갑옷을 입고, 그리 단정치 못한 자세로 걸어왔다.
허신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야간 습격은 공성전에서 순전히 패착에 속합니다. 묘 형께서는 아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리 확신합니까? 저는 밤에 다른 사람을 기습하는 걸 좋아합니다. 밤에는 잠을 자야 하기에 가장 방심할 때거든요.”
묘재방이 칼을 짚은 채 옥수수 찐빵을 씹으며 반문했다.
허신년은 발 옆에 놓인 석유가 가득 담긴 나무통을 툭툭 치며 웃었다.
“저희 기름은 적군을 태워 죽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밤에는 밝게 비추는 데 쓰일 수 있지요. 투석차(投石車)로 그것들을 투척하면 불빛이 환해집니다. 병사들은 성벽 위에서 아래쪽 상황을 똑똑히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적군은 성벽 위에서 쏜 화살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사람이 얼마나 오든 전부 죽음을 자초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묘 형의 이 수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기선을 제압하는 습격에만 적합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양측 모두 준비된 공수전이었다.
묘재방은 이 지식인의 말이 일리 있다는 생각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만약 상대가 고수를 파견한다면?”
허신년은 그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제가 군의 고수더러 야간 순찰을 명한 게 뭘 방비하기 위함이겠습니까?”
묘재방은 수긍하고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역시 허 은라의 동생답군요. 그다운 품격이 있습니다.”
허신년은 입꼬리를 가볍게 실룩였다.
‘너도 우리 형님처럼 저속한 품격이 있구나.’
그는 묘재방이 허칠안의 수행원임을 알았다. 지난번 허칠안이 경성으로 돌아왔을 때, 몇 번 만난 인연이 있었다.
허신년이 송상현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기 전날 밤, 묘재방은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 그를 따라 함께 싸우겠다고 했다.
허신년은 형님이 보내온 것인지 물었지만, 묘재방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나라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대장부가 할 일이라고 답했었다.
5품 화경 무사가 자발적으로 빌붙고 신분도 문제가 없으니, 군 측은 당연히 엄청나게 환영했다. 그렇게 묘재방은 허신년을 따라 송산현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