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78
975화. 암고부
“인종 도사를 모셔올 수 있다는 건 분명히 엄청난 인심을 쓴 거겠지.”
대장로가 개탄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본래 다른 부족 사람들은 의심을 가슴에 담아두곤 했다. 하지만 역고부 사람은 언제나 할 말 있으면 직접적으로 말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이내 허칠안은 낙옥형을 한번 쳐다보더니 살짝 깨달은 듯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국사께서는 제 도려입니다.”
이 말을 내뱉자마자 허칠안은 자리에 있던 이 이십여 명의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는 것을 보았다.
‘인종 도사가 그의 쌍수 도려라니…….’
‘오라질, 저런 절세미인이 어찌 이런 저속한 무사에게…….’
‘허 은라는 역시 대봉 제일 무사답군. 중원에서의 저력이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깊고 두텁다…….’
‘흥, 내 사내를 빼앗다니…….’
사람들 마음에 각양각색의 감상이 스쳤다.
이윽고 천고 할머니는 낙옥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출발하시지요.”
* * *
낙옥형의 도움으로 고수를 처리하는 작업이 훨씬 수월하고 빨라졌다.
곧 도겁을 앞둔 검수인 그녀가 폭발해내는 살상력에, 고족 사람들은 그야말로 기겁하였다.
해 질 무렵, 허칠안은 고족 사람들과 극연에서 물러나 부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용도를 따라 역고부로 가지 않고, 천고 할머니를 쫓아갔다.
“할머님, 잠깐 따로 얘기 나누시지요.”
* * *
천고 할머니는 허칠안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얼마간 걸었다.
그러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인자한 얼굴로 물었다.
“지원군을 청하는 일인가?”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고 할머니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더니 침음하며 말했다.
“정고, 독고는 내버려 두게. 두 부족은 대봉에 대한 편견이 너무 강해.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네. 시고는 가능할 수 있네. 우시에게 위연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지만, 다른 족인은 대봉을 그렇게 증오하지는 않거든. 암고부는 습성 때문에 역고부보다 좀 나을 뿐이지만, 물자와 식량이 부족하여 청빈한 생활을 보내고 있네. 자네는 이 방면으로 착수해봐도 돼.”
‘습성의 이유?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숨바꼭질만 하지 않나……?’
허칠안은 속으로만 비아냥거릴 뿐, 꾹 참았다.
“심고부 족인은 이성적인 편이네. 순언은 자네에게 꽤 호의적이니 잘 상의해보게. 어렵지 않을 것이야. 역고부는 식량을 약조해주면 되네. 족인이 호전적이라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거든. 반면 천고부는 전투에 능하지 않네. 별자리 관측술은 술사도 가능하니 우리를 염려할 필요는 없네.”
“감사합니다, 할머님.”
허칠안이 공수를 올렸다.
이후 각 부족 주소를 정확히 물어본 그는 낙옥형과 역고부로 돌아갔다.
* * *
국사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문과 창문에 부적을 붙여 안팎을 차단했다. 그리고 허칠안은 허영음을 리나 방으로 보냈다.
탁! 탁! 탁…….
촛불이 어두운 방엔, 불청객이 있었다. 남강 기후의 찌는 듯한 무더위 때문에 성가신 모기들이 너무 많았다.
허칠안은 국사를 대신해 밤늦게까지 모기를 잡았다.
* * *
이튿날, 아침 해가 막 떠올랐지만 국사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 틈에 허칠안은 암영부(暗影部)로 향했다.
극연 서남쪽에 위치한 암영부는 상당히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3m 높이의 흙담이 마을을 둘러싼 채 뭇 산을 등지고 있었고, 마을 바깥에는 작은 강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마을 인구는 7천 명 정도였다. 당연히 암영부의 모든 인구는 아니었다.
고족은 남강에서 수천 년간 번영해 여러 작은 촌락으로 발전했다.
이 큰 마을 주변엔 작은 마을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
허칠안이 그림자 도약을 하여 암영부에 이르렀을 때, 아침 해는 이미 높이 걸려 있었다.
마을 밖에는 아름다운 금홍빛으로 물든 강물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마을 안도 조용했다. 분명히 사람들 기운으로 가득 찬 마을 같은데,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기이할 정도의 적막이 흘렀다.
허칠안은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침 집 앞에 앉아 옥수수 찐빵을 베어 먹는 남강 복식 차림의 한 아이가 보였다.
그는 바로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집안 어른은?”
말을 할 때, 허칠안은 사내아이를 자세히 살폈다. 소박한 옷차림에 손에 쥔 옥수수 찐빵은 아이의 아침 식사 같았다.
아이는 멀거니 눈만 깜빡였다. 중원 말을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때, 입구 물독 옆 그림자에서 젊은 사내가 한 명 기어 나왔다.
창백한 얼굴에 푸른색, 남색이 뒤섞인 옷을 입은 사내는 머리에 푸른색 두건을 두르고 있었다.
“허 은라십니까?”
젊은이가 공손하게 물었다.
“당신이 아버지요?”
허칠안이 반문했다.
“저는 순찰대입니다. 허 은라께서 마을에 들어오시는 순간부터 저희는 허 은라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족장께서 만약 허 은라가 방문하시면 바로 모셔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젊은이는 아이를 힐끗 보며 덧붙였다.
“아이 부모는 숨었으니 두 시진 안에는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나도 암고가 도져서 숨고 싶은 걸 참지 못하겠는데…….’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인 후, 차분한 어조로 응했다.
“길을 안내하시오.”
* * *
조용한 마을을 걷다 보면 이따금 아이 몇몇이 텅 빈 거리를 돌아다닌다거나 바지를 벗고 길가에서 오줌을 싸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성인은 보기 드물었다.
허칠안은 아직 아이들이 능력이 약해서 굳이 숨어서 암고의 부작용을 완화할 필요가 없다고 추측했다. 장차 아이들이 커서 능력이 증가하면 부모 세대처럼 매일 구석 귀퉁이에 숨게 될 것이었다.
‘어쩐지 천고 할머니가 암고부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고 그랬지. 좋은 게 이상하지. 대부분 시간을 무의미한 숨바꼭질에 소비하고 있는데.’
허칠안이 막 칠절고를 얻었을 때는 암고의 부작용이 성가시다고만 생각했었다. 매일 시간을 내서 숨어야 하는데 한번 숨으면 한두 시진이었다.
그러나 한 종족 사람이 모두 그렇다는 건 일종의 재난에 가까웠다.
“사실 저녁에도 숨을 수 있죠. 꼭 낮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허칠안의 말에, 순찰대의 젊은 사내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저녁에도 숨는 이가 있지요. 하지만 대다수가 미혼자입니다. 혼인하면 저녁에 시간이 없고, 차원이 높을수록 몸을 숨기는 목적이 부작용을 없애는 것만은 아닙니다. 허 은라 역시 암고 대가시니 이해하실 겁니다.”
부작용은 암고의 가장 기본적인 수요였다. 수련 경지를 높이고 암고를 배양하고 싶다면 자발적으로 그림자에 몸을 숨겨 암고의 힘을 깨달아야 했다.
말하는 사이, 사내는 허칠안의 시선이 자신 발밑의 그림자를 주시하는 걸 보고 웃으며 말했다.
“잘못 보지 않으셨습니다. 순찰대의 다른 사람 모두 제 다리 밑의 그림자에 숨어 있습니다.”
‘뭐?! 이 미친! 무슨 다리 밑 그림자야! 너희 암고부는 전부 다리 밑에 사는 거냐……?’
허칠안은 하마터면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을 뻔했다.
* * *
조용한 골목을 지나 두 사람은 마을 중앙에 접근했다.
이곳은 인가가 꽤 빽빽이 들어차 있고, 행인이 삼삼오오 텅 빈 거리를 왕래하고 있었다. 양쪽에는 점포도 있었다.
행인들 가운데 중원 사람도 있고, 남강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해진 무명 옷차림을 보면 중원의 유랑민보다 딱히 나을 것이 없었다.
중요한 건, 이 행인들은 대부분 몸속에 암고가 없다는 것이었다.
“저들은 노예입니다. 중원에서 잡혀 온 자도 있고, 규칙을 지키지 않는 남강 부락의 자들도 있지요. 저희에게 소탕당했고, 인구는 일곱 부족이 평등하게 나눴습니다. 저 노예들은 저희 고족의 귀중한 노동력입니다.”
순찰대의 젊은이가 말했다.
허칠안은 잠시 침음한 후에 입을 뗐다.
“고족은 자주 중원 상인들과 인구 무역을 하고 있지요?”
인구 무역이란 말에 젊은이는 한동안 어리둥절하다가 대답을 이었다.
“네, 맞습니다. 중원의 상대는 저희가 사람이 부족한 걸 알고선 자주 남강으로 사람을 보냅니다. 남강 특유의 약초, 목재, 광석 등과 바꿉니다.”
‘그리고 그 인구는 대다수가 유괴돼 온 것이겠고…….’
허칠안은 시가 선조를 떠올렸다. 그 선조는 어릴 적 온 가족이 원수에게 전멸하였다고 했다. 그 역시 남강 시고부에 노예로 팔려 온 것이었다.
나중에 어떻게 다시 중원으로 도망쳐 왔는지는 모르지만, 훗날에 그는 상주 고향에 종파를 세웠다.
‘참, 우시에게 물어서 지도를 얻어내야 해. 시가 선조의 그 지도 절반이 시고부에 있으니까…….’
이때, 허칠안은 큰 저택을 보았다. 편액에는 남강의 문자가 적혀 있었다.
“이곳이 바로 족장의 저택입니다. 허 은라, 들어가시지요.”
* * *
저택에 들자마자 허칠안은 대원의 배치부터 훑었다.
청석이 깔린 길은 내원으로 통했다. 길 좌측에 물독이 있었는데, 위에는 나무판이 덮여 있었다. 또 우측엔 구경이 협소한 구덩이가 있었다.
‘구덩이 속 독에도 전부 사람이 숨어 있네.’
허칠안은 시선을 거두고 젊은이를 따라 계속해서 깊이 들어갔다. 한참을 걸었음에도 여전히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내청에 들어서야 암고부 족장이 보였다.
그는 찻잔을 받친 채 주인석에 앉아 있었다.
족장은 1년 내내 햇빛을 보지 않아서인지, 약간 좀 창백해 보였다.
창백한 얼굴의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차는 이미 준비됐네. 허 은라, 앉게나.”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건 중원의 예절이었다.
허칠안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 그가 다시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지. 내 이미 사람을 보내 장로를 모시러 갔으니. 출병에 관한 일은 나 혼자 결단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 * *
5분 뒤, 그림자 8개가 탁자 아래를 뚫고 나왔다.
그림자들 모두 중년 혹은 노년의 여덟 장로로 변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대장로인 듯했다. 그가 느릿하게 말을 시작했다.
“족장이 이미 우리에게 말했네. 북상하여 운주 반란군에 대항하는 대봉에게 협조하고 싶다고. 안 되는 건 아니네. 허 은라가 무슨 대가를 치를 수 있는지 봐야겠지.”
허칠안은 차를 한 모금 홀짝인 후, 입을 열었다.
“전쟁을 평정한 뒤, 대봉은 매년 암고부에게 백은 5백 냥, 비단 5만 필, 식량 3만 석을 드리겠습니다. 5년만입니다.”
몇몇 장로가 약간 동요하더니, 남강 언어로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백은 5백 냥이면 우리 집 방을 가득 채울 수 있겠군.”
“비단 5만 필이면 우리 암고부 족인이 전부 예쁜 옷을 입을 수 있겠어.”
“식량이 더 중요하네. 우리 족인은 늘 사냥하고 경작할 시간이 없잖나.”
백발이 성성한 대장로가 헛기침으로 장로들의 귓속말을 끊었다.
허칠안이 남강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흥정할 여지도 남지 않았을지 몰랐다.
이내 대장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만약 대봉이 패한다면? 우리가 헛수고하는 건 아닌가.”
허칠안이 아무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대장로께서는 어떤 조건을 추가하고 싶으십니까?”
대장로는 고개를 끄덕이곤 나지막이 말했다.
“시원시원하군! 2배 더하지.”
“시원시원하군요! 저는 심고부에도 다녀와야 하니 여러분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먼저 물러납니다.”
허칠안은 묵묵히 일어나 공수했다.
영자는 손을 움직였으나 참았다. 그리고 입구로 향하는 허칠안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백은 6만 냥, 비단 5만 필, 식량 5만 석, 6년. 보답으로 우리 부족이 정예 족인 8백을 파견해 참전하도록 하지. 안심해, 전부 절대적인 정예병이니.”
고족은 모든 백성이 병사이긴 하나, 노인과 어린이를 제하고 또 보통 족인까지 제하면 정예병 8백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허칠안은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고 웃으며 뒤돌아섰다.
“거래 성사!”
허칠안은 이곳으로 오기 전, 이미 회경과 소통했다. 그녀에게 ‘세사(*歲賜: 해마다 물품을 하사하는 것)’의 합리적인 범주를 알아냈다.
어쨌든 허칠안은 역사를 공부하는 자가 아니었기에 그런 것을 딱히 연구하진 않아 세사의 시장가를 알지 못했다.
영자가 제시한 요구는 합리적인 범주 안이었다.
영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암고부 정예 전사는 전력을 다해 대봉을 도와 반란군을 토벌할 것이다.”
그와 장로들 모두 허칠안이 대봉 조정을 대표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허칠안은 대봉 제일 무사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사 낙옥형의 쌍수 도려이기도 했다. 허칠안이 하는 말은 중원 황제인 천자의 말보다도 믿을 만했다.
이내 허칠안이 말했다.
“그동안 나는 조정이 공문서를 보내도록 하지. 대봉과 고족이 동맹을 맺는다는 증거로 삼을 것이야.”
영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