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80
977화. 자비로운 자는 군대를 통솔할 수 없다
행시는 나무 상자를 허칠안 앞에 두고 떠났다.
허칠안은 즉각 구리 자물쇠를 떠받친 후, 기기로 걸쇠를 튕겨냈다.
우지끈!
나무 상자가 열리자마자 방부와 방충 가루약 냄새가 났다. 상자 안에는 짐승 가죽이 말려 있었다.
‘만약 일부러 짐승 가죽을 소재로 한 게 아니라면, 이 지도의 연대는 무조건 2천 년 이상이다. 유성 시대 서적의 매개체는 죽간이었는데 짐승 가죽은 죽간보다 더 오래됐으니까…….’
허칠안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짐승 가죽 반을 펼쳤다.
지도는 가운데부터 찢어져 있었다. 지도의 왼쪽 절반이었다.
지도의 제작 기법은 아주 이상했다. 비틀리고 불규칙한 선이 가득 널려 있었는데, 전생의 그 현대 지도와 유사했다. 선 외에 아무 글자도 없었다.
‘전에 공부할 때, 지형도도 이렇게 엉망진창인 선이었던 것 같은데…….’
허칠안이 우시를 보며 말했다.
“이 지도는 비밀이 밝혀졌나?”
이 지도는 당연히 전생의 지형도와 같을 수는 없었다.
우시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연구하셨는데 지도의 선은 이 산천과 지맥을 상징한다고 여기셨다. 술사만이 알아볼 수 있지. 하지만 설령 술사라고 해도 구주 대륙에서 상응하는 지역을 찾는 건 바다에 빠진 바늘 찾기다.”
거의 찾을 수 없으니 그도 허칠안과 흔쾌히 거래한 것이었다.
시고부에 남겨둬봤자 영원히 봉하여 보존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 옛 시체를 부족에 며칠 보존하는 걸로 바꾸는 편이 나았다.
완벽하다고 할 만한 그 시체를 떠올리자 우시는 다시금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뜨거운 피가 들끓었다.
허칠안이 귓바퀴를 움직였다. 마당 깊은 곳에서 갑자기 훨씬 낭랑하고 격렬해진 여인의 신음이 들렸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지서 파편에서 관을 꺼낸 뒤 지도 절반이 담긴 나무 상자를 잘 거뒀다.
이내 허칠안이 웃으며 일깨웠다.
“참, 한 마디만 권하지. 그것에게 이상한 일을 하면 안 돼. 인과가 오염되지 않아야 하거든. 내 생각에 그것의 인과는 다 철저히 제거됐긴 하지만.”
‘우시’는 흰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 시고부에는 욕망을 누르지 못하면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옛말이 있다. 무릇 4품 가능성이 있는 자는 본명고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지. 우리 부족은 이 방면의 일을 금지하지 않았지만, 시체와 도를 넘는 자는 인재가 될 수 없는 무능한 놈이야.”
“…….”
허칠안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러나 우시는 오로지 옛 시체 감상에만 빠져 온 힘을 다해 손사래 쳤다.
“가게, 나를 방해하지 마.”
* * *
진시(*辰時: 아침 7~9시), 삼각(*三刻: 45분).
태양이 하늘 높이 걸렸을 즈음, 허칠안은 역고부로 돌아왔다.
그는 우선 방으로 돌아와 낙옥형을 만났다.
국사는 가부좌를 틀고 토납하며 수행하고 있다가 그가 들어오는 걸 보고 아름답게 웃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예쁜지, 봄날에 흐드러진 꽃 같았다.
‘아, 소희(*小喜: 기쁨 인격을 귀엽게 나타낸 말)구나…….’
허칠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희 역시 소애처럼 긍정적인 인격으로, 언제나 얼굴에 희색을 띠고 있었다. 부정적인 정서는 하나도 없고, 쌍수할 때도 그의 뜻을 따르길 바랐다.
“남강은 정말 좋아. 날씨도 따뜻해. 주변엔 새가 지저귀고 꽃은 향기롭고. 나 너무 기분 좋아.”
낙옥형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허칠안도 웃음을 지었다.
“다만 모기가 좀 많지요. 어젯밤 한창 국사 대신 모기를 잡았는데 엉덩이가 다 빨개졌더라고요.”
낙옥형은 그를 흘겨보며 약간 수줍어했으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여전히 희색을 띠고 있었다.
‘노(怒) 인격이었다면 난 아마 단칼에 죽었겠지…….’
뒤이어 허칠안은 침상에 곯아떨어진 허영음을 발견했다.
“영음이 어째 이곳에서 자는 건가요?”
낙옥형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자네가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뛰어 들어왔네. 사부 리나가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면서. 두려운 마음에 자네를 찾아왔으나 자네는 자리에 없었고.”
“…….”
잠시간의 침묵 후, 허칠안이 말했다.
“자기 손목에 문 자국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지요?”
낙옥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음이 승직한 뒤에 식사량이 눈에 띄게 늘었어. 장차 경성으로 돌아가면 숙모가 울지도 모르겠는데…….’
허칠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속으로 숙모를 위한 기도만 올렸다.
* * *
셋째 날, 심고부, 시고부, 역고부, 암고부의 전사가 집결을 마쳤다.
심고부 비수군 500명, 역고부 전사 400명, 숙련된 시고부 공시수(控尸手) 600명, 암고부 정예병 800명.
총 2,300명의 고족에 전투력이 막강한 행시 꼭두각시도 1천이 더 있었다.
이 위풍당당한 3천여 대오가 남강을 떠나 청주로 나아갔다.
특별히 언급할 만한 건, 리나의 오라버니 막상도 역고부 출정 대오에 포함돼있다는 점이었다.
리나는 역고를 튼튼히 다지고 고신 기혈의 힘을 다 흡수한 뒤 청주로 북상할 계획이었다. 전쟁에 참여해 고도(蠱道)를 연마하기 위해서였다.
역고부는 정예병 400명의 출정에 기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었다. 기쁜 점은 앞으로 이들의 식량은 대봉의 몫으로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윗사람들은 출정하는 청장년에게 남몰래 당부했었다.
“죽을힘을 다해 먹거라, 중원 사람의 곡창을 남김없이 비워라.”
다만 걱정되는 건 이들의 부재로 사냥할 일손이 부족해졌다. 이로 인해 전에는 농사하거나 아예 일하지 않던 노인들도 산으로 가 사냥을 해야 했다.
* * *
송산현 10여 리 군장 내부.
깊은 밤, 탁호연은 회의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구리 대야가, 그 안에는 갓 구운 양다리가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양다리를 들고 힘껏 뜯어 먹었다.
지금 그의 오른손 옆에 있는 긴 칼에는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한차례 대전이 막 끝난 참이었다. 탁호연 휘하의 운주군은 야간 습격한 대봉 수비군을 물리쳤다. 이런 기습전은 지난 며칠 새 수시로 발생했었다.
장수들은 탁호연을 슬쩍 쳐다보았으나 말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군장 안 분위기는 딱딱했고, 탁호연이 양다리를 뜯어 먹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미 닷새 기한이 지났으나 여전히 송산현을 점령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 점령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운주군 쪽은 손해가 막심했다.
탁호연은 맹장으로, 개인이 가진 전투력도 용맹하고 군사를 통솔하는 능력 역시 특출났다. 그의 송산현 공략 전략은 지난 3일간 유랑민 잡병을 조직하여 상대방의 포탄, 화살을 소모하는 것이었다.
또한 뇌목(*檑木: 성벽 위에서 떨어뜨려 적을 막는 데 사용한 통나무), 석유 등 성을 지키는 군비도 확실히 소모하려 했다.
그동안 유랑민 틈에 고수를 파견해 기회를 엿보던 그는 마침내 성벽에 올라 화포와 상노를 부쉈다.
이 수는 탁월한 효과를 거두었다.
셋째 날 공성전에선 성 수비군 쪽은 화포 2대, 상노 1대만 남았다. 대세를 이루지 못한 그들은 오직 뇌목, 석유, 궁수로만 운주군에 대항했다.
이 광경을 보고, 탁호연은 즉시 3일간 칩복한 정예 보병을 보내 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운주군 정예 보병이 화포 사정거리 범위로 돌진했을 때, 성벽 위에서 갑자기 포화가 일제히 울리고, 활시위가 벼락을 쳤다.
맹렬한 화력 타격에, 정예 보병은 그대로 넋을 잃어버렸다. 끝내 성 공격이 아무 성과가 없자, 7~800명을 내버리고 허둥지둥 철수하고 말았다.
사실 허신년에게는 화포와 상노가 더 있었으나 지난 3일간 인내하며 쓰지 않았다. 설령 그 과정에 수많은 사상자를 냈을지라도 끝까지 인내했다.
그를 보며 탁호연은 대장군의 말을 떠올렸다. 언젠가 대장군은 전쟁의 본질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라 말한 적이 있었다.
‘자비로운 자는 군대를 통솔할 수 없다.’
이 말만 놓고 보면, 탁호연도 결국 허신년이 기준에 부합하는 군대 통솔자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면으로 강공을 펼치지 못하자 탁호연은 암암리에 병력을 나눴다. 정예 장병들은 밤을 틈타 남쪽 험준한 산봉우리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정예병들은 산천에 가득한 짐승 덫을 밟고, 뾰족하고 날카로운 말뚝이 있는 깊은 구덩이에 끼었다.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는 고수를 제외하고, 병사들 손해가 막심했다.
본래 탁호연은 송산현에 보름간 비가 내리지 않아 산이 건조하고, 허신년이 산에 불을 지를 가능성을 고려해 험준한 산봉우리를 돌아 성 수비군을 기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 역시 수포가 돼버렸다.
넷째 날 밤엔 성벽에서 갑자기 고(鼓)와 말발굽 소리가 크게 울렸었다.
낮에 성 공격에 실패하고 지쳐있던 운주군은 적이 습격해온 줄 알고 당장 군사를 이끌고 맞섰다.
그러나 적은 공격하는 척만 했을 뿐, 습격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연거푸 몇 번 반복되자 운주군은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다.
동틀 무렵, 성벽 위에선 다시 또 고(鼓) 소리가 울렸다.
운주군은 당연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척후병과 일부 군사를 파견해 형식적으로만 상황을 살폈었다.
그 결과 경기병 1천여 명이 진을 쳐, 운주군은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6천 정예병의 1/3을 잃은 것이었다.
닷새째엔 탁호연은 손실을 무릅쓰고 공성을 강행했으나 패하고 돌아왔다. 성 수비군 역시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성 수비군은 다시 한번 상투적인 수법을 되풀이하여 운주군을 더할 나위 없이 교란했다.
그리고 지금이 7일째였다.
유랑민으로 조직된 군사 4천은 거의 다 죽거나 다쳤고 탁호연 휘하의 6천 정예병은 3천 명만 남았다.
현재 성 수비군 쪽은 2천 명 가까이 있었다.
양측 수를 비교해보면 송산현은 함락 불가였다.
탁호연은 마지막 고기를 삼키고 모든 장수를 차갑게 훑으며 말했다.
“장병들을 푹 재워라. 오늘 밤에는 더 이상 습격이 없을 것이다. 푹 자고 난 뒤에 동이 트면 성을 함락한다!”
그의 표정은 침착하고 태연자약했고, 이미 치밀한 계획을 세운 듯했다.
동튼 뒤에는 반드시 성을 함락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묘재방과 죽균(竹鈞)은 기마병 5백과 성문을 통과해 본거지로 돌아왔다.
“죽 장군, 신년이 성벽에서 소를 삶았는데 올라가 몇 잔 드시겠습니까?”
묘재방이 친절하게 물었다.
죽균은 말라빠진 중년 사내로 과묵했다. 송산현의 유일한 4품인 그는 북성문 수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가 있기에 허신년도 기마병에게 적진 습격을 명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갔다가 헛되이 목숨만 잃었을 것이었다.
죽균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허 대인더러 북성문으로 보내달라 하시오. 술은 됐소.”
말을 마친 뒤, 그는 부하를 데리고 말을 채찍질하며 급히 달려갔다.
“재미없군!”
묘재방은 고개를 내젓곤, 말에서 내려 계단을 따라 성벽 위로 올라갔다.
* * *
마도 위에 냄비가 여러 개 놓여 있고, 병사들은 그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앉아 고기를 먹고 있었다.
다들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충만했다. 고기를 크게 베어 먹으며 타는 듯한 열정도 함께 곱씹고 있었다.
묘재방은 그 흥분된 표정들을 보며 낮에 허신년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허신년은 현 백성들의 소, 개, 닭, 오리를 강제로 징용해 성을 지키는 장병들을 위로했다. 소량의 식량으로 보상한 것이었다.
묘재방은 처음에 이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백성들의 재물을 편법으로 약탈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허신년은 전란 시기엔 언제나 병사들 이익이 최우선이고 백성은 그다음이라고 말했다. 장병들은 매일 피를 뒤집어쓰며 분투하니 견딜 수 없을 만큼 지치고, 고기 정도는 먹어줘야 사기를 북돋울 수 있었다. 반면 백성들은 성을 지키지 못하면 아예 결말이 더 참담해질 것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보니, 확실히 허신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