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87
984화. 적의 (1)
허평봉은 산처럼 미동 없이 담담한 가나수 보살을 보며 웃었다.
“보살은 전혀 궁금하지 않는 듯하군요. 설마 불문은 진작 알았습니까?”
가나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본좌는 이미 세상의 모든 현상에 공허함을 느끼네.”
허펑봉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느긋하게 차를 끓였다. 그러다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이내 허평봉이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국운 절반이 대봉에 있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제 스승님이 살진(殺陳)으로 아마 우리 두 사람을 연화(*煉化: 어떠한 방식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행위)했을 테죠. 초대가 뜻밖에도 당신에게 부상을 입힐 수 없었던 건 불문이 다수로 소수를 삼켜서입니다.”
가나수 보살은 기뻐하지도, 화내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자네 청주에서 얼마나 더 놀 작정인가?”
허평봉은 하얀 손수건으로 손바닥의 피를 닦으며 웃었다.
“낚시에 능한 자가 되려면 우선 물고기를 유혹하는 고수가 돼야 하는 법. 척광백도 참을 수 있는데 어찌 참지 못하겠습니까.”
* * *
남강.
폭우가 내리는 밤, 당대 제일의 여인이 새빨간 입술을 열었다.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마. 내가 그 여인을 죽이도록 두거라, 아니면……. 너를 죽이겠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광풍이 일며 먹물 같은 먹구름이 머리 위를 뒤덮었다.
허칠안은 한 무릎을 꿇고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빗물이 그의 몸의 핏자국을 씻어냈지만, 머리카락은 온통 얼굴에 달라붙었다.
여기저기 녹슨 철검이 목을 가로질렀다.
검광은 여인의 표정처럼 음침하고 차가웠다.
이내 허칠안은 그 잘생긴 얼굴을 들고 쓴웃음을 짜냈다.
“그럼 그냥 나를 죽여라.”
당대 제일 여인의 눈빛에 매서움이 스쳤다.
다음 순간, 허칠안의 모든 생각이 깡그리 사라졌다.
* * *
허칠안은 문득 침상에 앉아 격하게 숨을 헐떡였다.
그는 단순히 한숨 잔 것이 아니라 긴 평생을 거친 듯했다. 그제야 비로소 혼돈에서 깨어나 세상에 나온 느낌이었다.
이내 그는 왼손으로 목덜미를, 오른손으로는 미간을 만졌다.
그때, 창가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랑, 안심해! 내가 어찌 미련 없이 자네를 죽일 수 있겠어? 나는 그저 검기로 허랑의 원신을 흩트렸을 뿐이라고.”
콩알 같은 촛불 덕에 우의를 걸친 늘씬한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창가에 서 있다가, 허칠안이 깬 것을 보고 재빨리 시선을 거둔 후 빙그레 웃어 보였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그 안엔 분명한 위험을 감추고 있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
허칠안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술을 진탕 마신 후, 숙취에 고생하던 다음 날처럼 그는 서서히 의식을 잃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는 거의 전쟁을 치렀다.
어제의 낙옥형은 ‘욕’ 인격으로, 24시간 내내 끊임없이 쌍수를 요구했다.
어렵사리 자시(*子時: 밤 11시 ~ 새벽 1시)가 돼서야 마침내 소욕을 쫓았었다. 허칠안은 지난번처럼 견디진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약간 피곤은 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을까, 소욕 다음의 인격이 ‘악’일 줄은.
여태껏 허칠안이 쌍수할 때 접한 적도 없던 ‘악’ 인격이었다.
‘악’ 인격이 현신한 뒤, 처음으로 한 말은 이러했다.
‘나는 모남치가 싫어, 내가 그 여인을 죽일 거야.’
그리고 허칠안에게 부도보탑을 꺼내 모남치를 풀어주라고 요구했다.
허칠안은 당연히 동의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낙옥형을 만족시켜 그 생각을 꺾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악 인격은 바로 매정하게 태도를 바꿨다. 그녀는 아무런 미련 없이 그와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렇게 백산 변방에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난 확실히 낙옥형을 이길 수 없어. 목숨을 내걸지도, 비장의 패를 시전하지도 않았고, 낙옥형이 미리 내 몸을 비우기도 했지만, 나랑 낙옥형 사이 간극은 확실히 작지 않아……. 역시 1품에 반보 들여놓은 검수다워…….’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허칠안이 조심스레 창가의 여인을 주시했다.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낙옥형은 아름다운 눈을 깜박이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그저 허랑과 떨어지지 않고 한평생 한 쌍이고 싶을 뿐이야.”
그녀는 천천히 탁자 옆으로 걸어가 앉아 볼을 괴었다. 촛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세상 가장 티 없고 고운 옥 같았다.
그 어여쁜 여인이 낮게 탄식을 했다.
“하지만 자네는 늘 화신을 옆에 데리고 다녀서 내가 아주 괴로워.”
‘너 구미천호한테 빙의된 거지…….’
허칠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런 이모가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네 예전의 난잡한 명성 있잖나. 자네가 교방사에 빈번하게 드나드는 방탕아라고 생각하면 내 마음이 아주 괴로워. 그래, 다 지나간 일이지 뭐, 개의치 않아. 자네가 깊이 잠들었을 때, 내가 검으로 자네 명줄을 잘랐네. 내가 자네 대신 과거에 작별 인사한 거야. 지금의 자네는 아주 깨끗해. 음, 자네 그걸 좀 보겠어?”
아름답게 웃는 이모를 보며 허칠안은 사타구니 아래가 서늘해졌다. 그는 거의 넋이 나간 채로 낙옥형을 쳐다보았다.
잠시 소리 없이 두 사람의 시선만 오갔다.
그때, 갑자기 낙옥형이 웃기 시작했다. 몸까지 떨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하하하! 거짓말이야…….”
그녀는 웃으며 탁자 위에 엎드렸다.
‘방금 한 말은 취소야, 구미천호는 너처럼 그렇게 악랄하지 않아…….’
허칠안은 낙옥형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한숨을 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낙옥형의 ‘악’ 인격은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진정으로 아무도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맨 처음 전투는 자신의 도래를 드러내는 수법에 가까웠다.
또는 그녀의 짓궂은 장난으로 볼 수도 있었다.
‘낙옥형의 악은 내성적인 악이야. 장양처럼 나쁜 사람이라고 얼굴에 쓰지 못해 한스러워하는 그런 악은 아니지. 그리고 7가지 인격은 낙옥형 본인 성격에 따라 진화해 온 거야. 만약 낙옥형 본성이 선량하다면, 악 인격의 상태도 사실 예측 가능하지. 낙옥형이 실제로 나쁠지도 모르나 살육을 일삼는 정도는 아니야. 음, 더 관찰해야겠어.’
허칠안의 생각이 스치는 찰나, 낙옥형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어제 자네가 나를 그렇게 들볶아서 몸이 헐 것 같아. 쉬어야겠어.”
‘???’
허칠안은 살짝 입이 벌어졌다.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들볶았어? 소악은 진짜 간담이 서늘해지게 하네.’
그는 속으로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또 바로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나 낙옥형은 탁자 옆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다.
“침상이 더러워, 바꿔줘.”
“…….”
허칠안은 또 고약한 냄새가 나는 침상 깔개를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낙옥형은 곧장 침상으로 다가가 엎드리더니 우의 아랫자락을 살짝 걷었다. 옷자락은 종아리를 타고 올라가 허벅지 바로 아래서 멈췄다.
아름다운 그녀가 고개를 돌려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쌍수하겠어?”
“적당히 휴식하는 게 쌍수보다 기기를 잘 조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허칠안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물론 허칠안은 정상적인 상태의 낙옥형도 감당 불가였다. 그래도 뭐 조금이나마 장난칠 엄두는 났다.
하지만 이 눈앞의 낙옥형은 감히 장난은커녕 통제할 수도 없었다.
허칠안은 조금 더 신중하기 위해 시간을 갖고 관찰하며 ‘악’ 인격의 행위와 풍격을 이해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낙옥형은 실망한 듯 입을 삐죽이더니 가볍게 입김을 불어 촛불을 껐다. 그리곤 둘둘 말아 놓은 이불을 뚫고 들어가 안쪽으로 굴러갔다.
허칠안은 다시 누워 두 손을 머리 뒤에 베고 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지금은 인시(*寅時: 새벽 3~5시), 이각(*二刻: 30분).
욕 인격이 자시(*子時: 밤 11시 ~ 새벽 1시)에 막 떠났다.
예전이라면 아마 한숨 자고 난 뒤에 이튿날 새벽에야 인격 교환이 진행될 것이었다. 하지만 욕 인격이 가자마자 악 인격이 뛰쳐나왔다.
이는 악 인격이 7가지 인격 중에 가장 강하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한참 생각하던 끝에 허칠안은 다시 십만대산으로 생각을 돌렸다.
‘광현 보살의 화신 한 구, 보수적으로 짐작해도 2품이겠지. 도액 나한 역시 2품, 거기에 아소라까지. 아무래도 십만대산을 되찾는 건 쉽지 않겠어. 음, 구미천호가 광현 보살의 화신을 처리할 수 있을 거야. 만약 구미천호에게 그 정도 실력도 없다면 나라를 되찾는 건 생각지 말아야지.
요족에는 초범이 한 명 더 있어. 게으른 곰 같던데. 그래도 3품일 뿐이야. 악! 나 너무 힘 빠지는 거 아닌가? 이뿐만이라고 해도, 우리가 십만대산을 되찾는 건 어려워. 물론 칠절고가 크게 성장했지만, 난 아소라랑 싸워서 질 확률이 더 높아. 그러니 이번에 불문을 치는 주력은 신수다. 에휴, 그냥 수라왕이 딸을 데리고 전 부인이 낳은 아들을 치는 거지 뭐.’
묵묵히 비아냥거리던 허칠안은 다시 사고를 전환해 이번 전투에서 자신이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했다.
‘도액을 포로로 잡아봐야겠다. 내 마지막 봉마정을 풀어주게 한 뒤에 나는 왕비랑 쌍수해서 2품으로 승직하는 거지……. 구미천호의 진짜 모습을 드디어 볼 수 있겠어. 이모랑 비교했을 때 누가 더 아름다울지 모르겠네.’
허칠안은 모남치를 아예 비교 대상에 넣지도 않았다.
미모는 화신의 가장 큰 무기였다. 모남치의 매력은 이미 아무도 범접하지 못해 고독할 정도에 이르렀다. 허칠안 역시 지금까지도 그녀의 진짜 모습을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첫째는 자신이 절제하지 못할까 두려웠고, 둘째는 성가신 일이 매우 많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만약 화신이 위장하지 않고 한 바퀴 산책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허칠안이 그 어떤 도발에도 대처할 능력이 있다고 해도 굳이 스스로를 끝없는 곤경에 빠트릴 필요는 없었다.
그때, 이불을 말고 있던 낙옥형이 말없이 다가와 그의 귓불을 핥았다.
허칠안은 정색하고 고개를 돌렸다.
“국사,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자네를 유혹하는 거지.”
어둠 속, 낙옥형의 눈이 밝게 빛났다. 마치 밤의 장막 속의 별 같았다.
‘소란 피우지 마…….’
입가에 경련이 일었던 허칠안은 순간 생각이 번뜩였다.
“국사, 저 내일 십만대산으로 출발하려고 합니다. 요족을 도와 고향을 되찾을 건데 국사께서는 전투력이 얼마나 더 있습니까?”
낙옥형이 해죽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내게 부탁하면 알려주지.”
이내 그녀는 돌아서 허칠안의 아랫배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두 손으로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받치고 빙그레 웃었다.
“안 돼. 내 배 속에 자네 아이가 생겼으니 싸우면 안 돼.”
동시에 그녀는 자애로운 얼굴로 평평한 아랫배를 문질렀다.
‘그렇게 빠를 리가…….’
허칠안은 저 사람에게 굳이 설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낙옥형도 전혀 개의치 않고 애교 섞인 웃음을 지었다.
“불문의 승려가 그래도 능력은 있지. 나는 줄곧 이해되지 않는 일이 한 가지 있네만.”
허칠안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낙옥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허랑은 나와 허랑 중에 누가 더 강하다고 생각하지?”
“국사요.”
허칠안도 인정하는 바였다. 솔직히 낙옥형이 업화를 가라앉혀 도겁을 준비하고 있기에 손을 쓰는 경우는 아주 적었다.
게다가 그의 앞에서 자주 얼굴을 붉히고 눈썹을 찡그리며 입술을 깨무니 어느새 허칠안도 상대가 버젓한 인종 도사임을 간과했었다.
하지만 낙옥형은 허칠안보다 무려 반 품계나 높은 2품 검수였다.
오늘 밤 한바탕 싸운 후에야 허칠안도 비로소 진정한 실력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