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90
987화. 운명을 따르는 자와 겁(劫)을 따르는 자 (2)
딱 손바닥 2개 크기만 한 여우가 몸을 일으켰다. 왼눈에선 청광이 흘러나오고, 입에선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탄식을 내뱉었다.
“본좌의 위엄이 점점 땅으로 떨어진 건가. 난 이미 자네가 언제든 소환할 수 있는 인물이 된 것인가.”
허칠안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헛소리 적당히 합시다, 바쁘니까.’
“제가 오늘 아소라와의 전투 경과를 복기했는데 그가 그날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구미천호가 빙그레 웃었다.
“자네, 그걸 이제야 발견했는가.”
‘……이런 XX, 역시 그때 단서를 알아차렸네!’
허칠안이 무표정하게 응답했다.
“마마, 이러시면 저와의 우정을 잃으실 겁니다.”
“허!”
구미천호는 얌전히 웅크려 앉아 자성이 충만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네. 첫째, 아소라가 어떠한 목적에 의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네가 신수의 나머지 사지를 가져가게 한 것이지. 그는 이미 충분히 발전했으나 더욱 분발하는 것이야.”
허칠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뜻입니까?”
“아소라는 환생해 다시 수행했고, 500년 후에 제자리로 돌아왔네. 하지만 돌아온 건 여전히 수라왕의 막내아들 아소라지. 다시 태어난 그의 몸은 어디에 있을까? 다시 태어난 몸이 만약 4품에 이르렀다면, 이미 굉원(宏愿)을 빌었을 걸세. 그렇다면 굉원을 빌기만 하면 그는 보살 과위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야. 이로써 추측하자면, 그의 굉원은 아마 요족과 관련 있을 걸세. 아니면 불문을 위해 남강을 탈취한다거나. 하지만 남강은 이미 불문의 영토네.”
허칠안이 아래턱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내버린다?”
“둘째, 이 모든 건 불문이 우리 요족을 속이고자 판 함정이라는 것. 우리가 ‘남국성’을 공격하면 바로 광현 보살을 마주칠지도 모르네. 나는 틀림없이 도망칠 수 있을 테지만, 자네들은 장담하기 힘들지.”
허칠안은 어떤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마마께 대응책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구미천호가 교활하게 웃었다.
“만약 아소라가 보살 과위의 깨달음을 얻고 싶어 한다면, 상대의 계략을 역이용해 공격하면 되네. 만약 불문이 우리 요족을 속이려 한다 해도 장계취계(*將計就計: 상대의 계교를 미리 알아채고 역이용함) 하면 될 테고.”
허칠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마마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흰 여우는 얌전히 웅크려 앉아 빙그레 웃음을 그렸다.
“아란타를 치러 가서 부처가 대체 어떠한 상태인지 유성의 조각상이 파손됐는지 아닌지 좀 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 그날 자네를 도와 허평봉을 상대할 때, 본좌가 감정한테서 전송 법기 몇 가지를 구걸했네. 그 후 사람을 파견해 상응하는 진법을 새긴 돌판을 암암리에 서역으로 보냈지.
우리가 전송 법기를 날쇄(*捏碎: 자잘하게 부숨) 하기만 하면 돌판이 있는 위치로 보낼 수 있네. 그건 아란타와 3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광현이 감히 아란타를 떠난다면, 우리가 직접 전송해 신수의 머리를 빼앗고 그를 완벽하게 소생시키는 거지.”
허칠안은 불쾌한 얼굴을 했다.
“광현 보살이 과연 우리가 전송하게 놔둘까요?”
그는 감정과 구미천호의 사적인 수작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감정에게 이는 기본적인 조작이었고, 구미천호에게는 500년의 도모였다.
그 정도 안배도 하지 않고 무슨 나라를 되찾겠는가. 그럴 거면 그냥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자는 게 나았다.
“이건 자네가 걱정할 필요 없네. 내게 당연히 방법이 있지.”
구미천호의 어조는 확신에 차 있었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약 이번 복국에 이변이 없다면, 저는 마마께서 절 도와 도액 나한을 포로로 잡고 제 몸에 있는 마지막 봉마정을 빼내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구미천호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별도로 유명잠사(幽冥蠶絲)의 위치를 자네에게 알려주지.”
순간 허칠안은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마마께서는 유명잠사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유명잠사는 초혼번을 정제하는 주재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초혼번은 위연을 다시 살리는데 반드시 필요한 법기였다.
구미천호가 말했다.
“급하지 않네. 요족이 복국한 뒤에 다시 얘기하자고.”
* * *
동릉성.
허평봉은 청동 단로(丹爐) 앞에 앉아, 손에는 파초선을 들고 푸른 불꽃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내 그는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가부좌를 튼 가나수 보살을 보았다.
“남강에 다녀오겠습니까?”
가나수 보살이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본좌가 돌아간다면 감정의 마음에 딱 들겠군.”
허평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스승님께서는 일찌감치 구미천호와 결탁하셨지요. 남강의 요족을 이용해 불문을 견제하는 건 그가 진작에 짠 계획입니다. 내 장자의 손을 빌려 하는 것뿐이지. 우리는 청주에서 소식을 기다리자고요.”
가나수 보살은 눈을 감고 좌선하며 말했다.
“온갖 잔머리를 굴리는 게 아주 똑똑해.”
그 뒷마디는 없었다.
그러나 허평봉은 돌연 이상야릇하게 웃었다.
* * *
정산성.
두봉을 걸친 노인 살륜아고는 황폐한 산꼭대기에 서서 저 먼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노인은 목소리를 낮추고 개탄했다.
“산해관전역 이후 기운이 서남쪽에서 다 없어졌군.”
“대 주술사께서는 남요가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신교에 단둘뿐인 영혜사 오달보탑이 물었다.
살륜아고가 웃으며 말했다.
“요족만으로는 좀 부족하지만, 허칠안도 있지 않은가.”
오달보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의 실력이 어느 차원까지 도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전쟁에서 남요가 승리한다면, 그쪽은 진정으로 구주를 뒤흔들 겁니다. 마치 그해 불문 갑자탕요처럼 온 세상이 놀라겠지요.”
잠시 멈칫하던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이포가 명금석을 보내는데 이렇게 오래 걸립니까?”
살륜아고가 담담하게 말했다.
“때가 아니네.”
* * *
경성. 관성루, 팔괘대.
조위는 구름 속으로 우뚝 솟은 옥상 가장자리에 서서 아래쪽의 경성을 굽어보고 있었다.
“경성은 여전히 번화하나, 내 눈에는 어둡고 적막하며 기운이 혼탁하군.”
수염을 만지며 개탄하던 그가 고개를 돌려 감정을 쳐다보았다.
“자네 힘이 심각하게 유실됐네. 심지어 가나수의 두 법상조차 부수지 못하다니. 장기적으로 봤을 때 대봉에 아직 승산이 있겠는가?”
감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만물은 극도로 번성했다가 쇠약해지지. 모두 타고난 팔자네. 정덕에서 허평봉 그리고 허칠안까지 전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나타난 자들이네. 중원, 인족의 큰 재난이지.”
조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인족?”
대봉이 아니라니!
감정이 웃으며 말했다.
“천기는 누설할 수 없네. 내가 천기를 엿보고 천명을 아는 것 역시 겁(劫)에 응하는 사람인 것이야. 조위, 자네는 내가 왜 유가를 200년 동안 억압했는지 아는가?”
조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천기는 누설할 수 없지 않은가.”
감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이는 가능성이 있어 가르칠 만하지.”
조위는 남쪽을 향해 돌아서며 웃었다.
“허허, 불문을 견제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이 전투를 봐야겠군. 그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라네.”
감정이 웃으며 반문했다.
“그가 언제 우리를 실망시킨 적 있는가.”
이후, 그가 술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이번에 나랑 한담을 나누려 경성에 온 건가?”
조위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아, 양공이 내게 접본 한 통을 전했네. 고족이 대봉과 동맹을 맺고 함께 운주 반란군을 치겠다고 말일세. 내가 황제에게 전하길 바라는데 황궁에 들어가려면 자네 동의가 필요하지 않은가.”
설사 800리 급보라고 해도 유가 비법인 전송을 시전하는 것만큼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감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청주 전쟁이 급박하지. 황제와 제공들도 한창 걱정하고 있으니 그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도 좋겠지.”
* * *
어서방.
노란 비단이 깔린 탁자 뒤, 젊은 황제가 굳은 얼굴로 앉아 상주를 듣고 있었다. 상주를 읽는 자는 신임 재상, 무영전 대학사 전청서였다.
왕정문이 요양에 들어간 뒤, 조정 내부에선 각 당이 한 차례 싸운 끝에 재상의 자리가 무영전 대학사 전청서에게로 돌아갔다.
여전히 왕당이었다.
염소 수염이 희끗희끗한 전청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각지에서 비적이 향신과 명문 귀족을 약탈하는 일이 늘었습니다. 강주와 검주에서는 심지어 성 내 백성과 강도가 결탁했습니다. 안팎으로 호응해 성문을 열고 비적을 풀어 성에 들어가 약탈하고 있습니다.
각지 모두 유사한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폐하, 하루빨리 군대를 파견하여 비적을 토벌하길 청하옵니다. 그러지 않으면 대란이 닥칠 것입니다. 만약 후방을 안정시키지 못한다면 청주 형세가 위태롭습니다.”
왕당 구성원들도 잇따라 맞장구쳤다.
각당 구성원 중, 절반은 침묵하고 절반은 맞장구쳤다. 사대부 계급만 전문적으로 약탈하는 비적은 당연히 제공들의 신경을 자극할 만했다.
“폐하, 심사숙고하여 주십시오!”
높이 외치는 소리 사이로, 어사대 좌도어사 류홍이 대열에서 나왔다.
“청주 전쟁은 기세가 맹렬합니다. 조정은 전력을 다해 양공이 청주에서 반란군을 막도록 도와야 합니다. 조정에 돈과 식량이 부족한 이때, 어찌 국력을 소모하여 유랑민 도적을 소탕하러 간단 말입니까. 그건 한낱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대세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본래 위당 구성원들이 즉시 맞장구치면서 지금 당파의 제1인자인 류홍의 간언을 지지했다.
왕당 구성원들은 즉시 뛰쳐나와 반박했다.
“오합지졸? 지금 유랑민은 재해를 일으키고 식량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습게 봐서는 안 될 세력입니다. 방임한다면 운주 반란군이 경성을 치기도 전에 그 유랑민 도적이 한발 먼저 성 밑까지 쳐들어올 겁니다!”
양측은 논쟁을 벌였다.
보통 어서방의 공무 논의는 ‘소 조회’라고도 불리는데, 그건 정식 조회와 비교해 느슨하고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유로운 논의는 점차 욕설전으로까지 변했다.
영흥제는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로 방관했다.
지금껏 위연이 죽고, 왕 재상은 병에 걸렸다. 조당 내는 여전히 양당이 서로 다투는 형세였고, 각 당은 참견하고 구경할 따름이었다.
이내 황제는 군신을 훑다가 대리사경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사경 대인은 어떤 고견이 있소?”
제공들의 시선은 단숨에 피할 길 없이 대리사경에게 향했다.
대리사경은 쉰이 넘은 나이였으나 수염과 머리가 희끗희끗하지 않았다. 상당히 잘 관리한 편이었다.
“폐하, 신은 유랑민 도적에 대해 투항책을 취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도적 족장에게 관직을 주어,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청주에 가서 반란군을 방어하게 하는 겁니다.”
대리사경의 말이 끝난 후, 영흥제는 한참을 침음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이 일은 당분간 보류하겠다.”
또 잠시 멈칫하던 황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청주의 1차 방어선이 이미 반란군에게 점령됐다. 양공이 운주 반란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지. 경들 중, 이 청주를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누가 말해보겠는가? 얼마나 지킬 수 있겠는가?”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