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troke RAW novel - Chapter 991
988화. 혼사
영흥제는 어두운 얼굴로 병부상서와 호부상서를 쳐다보았다.
“짐이 군사와 식량을 조달해 청주를 지원하라고 했는데 진전이 있는가?”
호부상서가 대열에서 나와 읍하며 말했다.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 폐하께서는 열흘만 더 늦춰주십시오.”
영흥제는 당장에 나무라고 싶었으나 호부상서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탄식만 했다. 여기서 더 이상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황제는 다시 병부상서를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서 상서가 추천한 조준유(趙俊濡)가 어제 짐에게 접본을 올렸네. 청주를 지원하는 군대를 그가 인솔하겠다고 하더군. 길을 돌아 운주를 습격하여 반란군의 본거지를 짓밟겠다네. 정말 매우 드문 장군감일세.”
병부상서는 가슴이 철렁했다. 영흥제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눈빛은 이상하리만큼 차가웠다. 순간 병부상서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병부상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이 어리석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벌을 내려주십시오!”
영흥제는 허리를 굽힌 신하를 아랑곳하지 않고, 좋지 않은 안색으로 제공을 훑어보았다.
“군량과 마초도 없고, 싸울 수 있는 자도 없다니. 조정이 600년 동안 인재를 양성해 고작 너희 같은 자들을 키운 것인가? 서역의 여러 나라가 거병하여 국경을 넘지 않고 뇌주 변방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게 다행일 뿐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때쯤 서역 대군이 경성으로 쳐들어왔을 것이다!”
결국 황제의 언성이 높아졌다.
제공들은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황제는 지금 식량과 돈을 제때 준비하지 못해 청주에 즉시 군사를 파견하지 못한 것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고에 돈이 있다면, 지원병은 진작에 청주로 달려가지 않았겠는가.
그동안 호부는 이미 세금을 징수해 백성의 고혈을 강제로 빼앗고 있었다. 이는 전쟁이 벌어지는 지금, 조정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역대 황조 전체가 그러했다.
이런 행위는 백성의 원망을 축적하고 국력을 소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만 평정될 수 있다면, 모든 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조정이 패전하면 백성의 원망이 역습할 것이고, 나라의 기운은 순식간에 깨끗하게 소모되고 말 것이었다.
“전쟁터 정세는 극히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다. 전방의 장병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데 너희들은 꾸물거리며 돈, 식량, 군대를 준비하지 않았다. 승리할 기회를 얼마나 많이 지체했는지 아는가!”
영흥제는 심하게 욕을 퍼부었고, 제공들은 여전히 침묵했다.
그때, 갑자기 청광이 솟구쳐 오르더니 사람 형체가 나타났다.
조위였다.
조위는 하얗게 풀을 먹였지만 조금도 빈틈없는 유삼을 입고, 희끗희끗한 머리는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있었다.
전체적인 형상은 마치 넋이 나간 늙은 서생 같았다.
영흥제와 조당 제공들은 깜짝 놀랐다. 조위가 황궁에 ‘난입’해 들어올 수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었다.
“폐하!”
조위가 미소를 지으며 읍하였다.
영흥제는 정신을 가다듬고 의례적인 웃음을 쥐어 짜냈다.
“원장님께서 아무 일 없이 삼보전(三寶殿)에 오르지 않으시겠지요.”
“일은 이미 폐하 탁자 앞에 있습니다.”
조위가 웃으며 말했다.
영흥제는 멍하게 고개를 숙여, 탁자에 늘어난 접본을 보았다. 그는 약간 경악하며 접본을 들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조위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제공들은 일제히 영흥제를 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영흥제는 접본을 펼쳐 읽었다. 그의 표정은 아주 생동감 있게 변했다.
먼저는 경악한 얼굴로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뒷부분을 볼 때는 의아한 내용을 본 듯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의아함은 곧 광희로 변했다.
“좋아, 좋아! 고족 정예병이 합류해 청주의 급한 불을 끌 수 있겠구나. 허 은라가 짐을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구나!”
영흥제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고족 정예병? 허 은라…….’
대당 아래 제공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만 쳐다보았다.
이내 전청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폐하, 기쁜 일이 있는 것입니까?”
영흥제는 그저 옥좌 아래 장인 태감 조현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제공들이 직접 돌려보도록 하거라.”
조현진은 공손히 접본을 받았다. 그는 내심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내용을 엿볼 엄두는 나지 않아서 곧장 전청서에게 정중히 접본을 건넸다.
전청서는 침착한 표정이었으나 접본을 건네받는 속도는 아주 빨랐다. 그는 접본을 펼쳐 정신을 집중해 읽어내려갔다.
한참 뒤, 그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류 상서께서는 이제 편히 주무실 수 있겠습니다.”
류 상서가 바로 한재가 닥친 이래, 몇 살은 훌쩍 들어 버린데다 약간 탈모 현상까지 보이는 호부 상서였다.
류 상서는 다급히 전청서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어서, 어서 본관에게 보여주시지요.”
‘너랑 같은 당도 아닌데…….’
전청서는 차분한 표정으로 뒤에 있는 형부 손 상서에게 접본을 건넸다.
손 상서는 묵묵히 내용을 읽은 후, 표정이 아주 복잡해졌다.
기쁘기도, 실망스럽기도 했다.
실망스러운 건, 그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자식이 이제 더는 넘볼 수 없는 인물이 됐다는 점이었다. 그는 부정할 수 없는 구주의 최정상급 고수였다.
곧이어 제공들도 접본을 돌려보았다. 주름진 얼굴들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것 같기도, 대단히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중 가장 흥분한 건 류 상서였다.
“이렇게 보니 청주 형세는 틀림없이 완화될 수 있겠군요. 본관도 한시름 놓고 잘 잘 수 있겠습니다! 뜻밖에도 허 은라가 고족과 동맹을 맺었다니요, 보통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생각해낼 수 없는 일이에요!”
류 상서는 얼마나 기뻤는지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그는 감탄과 찬사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제공들은 목소리를 낮추고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작은 대가로 고족을 출병시켰다니요, 대체 어떻게 해낸 걸까요?”
“고족은 우리 대봉과 원한이 너무 깊은데 이번에 운주와 동맹을 맺지 않고 우리 대봉과 동맹을 맺다니요?”
“그는 항상 괄목상대하게 하는군요. 위연처럼 3군을 통솔해 백전백승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무사로서 그는 초범 영역에서도 인물인 셈입니다.”
“그와 감정이 있으니 그래도 대봉에 어느 정도는 희망이 있습니다…….”
영흥제가 웃으며 말했다.
“동맹 서약에 관한 일은 내각에 맡겨 초고를 쓰겠다. 경들께서는 반대 의견이 있는가?”
제공들이 말했다.
“폐하, 현명하십니다!”
* * *
공무 논의를 마친 뒤, 영흥제는 연일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대봉과 고족이 동맹을 맺었다는 건 분명 인심을 진작할 만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영흥제의 마음엔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폐하, 전 재상이 뵙기를 청합니다.”
조현진이 침전에 발을 들여놓았다.
영흥제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들라하라.”
어서방에서 공무를 논의할 때 말하지 않았다는 건, 단독으로 상주할 일이 있다는 소리였다.
희끗희끗한 염소 수염이 난 전청서가 환관을 따라 어서방으로 돌아왔다.
영흥제는 별다른 표정 없이 물었다.
“전 재상, 짐과 단독으로 상의할 일이 있는가?”
전청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각지에 비적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만약 군사를 파견해 소탕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큰 화를 일으킬 겁니다. 지금 청주의 압박이 급감하였으니 때마침 병력을 나누어 토벌할 수 있습니다.”
영흥제는 침음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청서의 소리는 더 높아졌다.
“신, 폐하의 신임을 받고 있으니 반드시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입니다.”
영흥제가 약간 동요했다.
“좋다. 그럼 경의 말대로 하지.”
너무 통쾌한 답에 전청서는 되레 어리둥절했으나 기꺼이 공수했다.
“폐하, 현명하십니다.”
영흥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먼저 물러가게. 짐이 좀 피곤하구나.”
떠나는 전청서를 보며 영흥제는 한참을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가 마음에 걸린 일은 바로 허신년이 일찍이 제의했던 그 일이었다.
비밀리에 고수를 파견해 유랑민을 조직한 뒤 산으로 들어가 도적 패거리가 되는 것. 그렇게 상인과 향신 계층을 약탈해 날로 잔학한 짓을 일삼는 유랑민의 화를 잠재운다는 것.
계급을 배신하는 이 결정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면, 영흥제는 인심을 잃고 버림받을 게 뻔했다. 결국 여러 번 저울질 끝에, 그는 포기를 택했다.
하지만 조정에 누군가 암암리에 이 계책을 시행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아주 큰 성과를 얻으며 규모도 날로 커지고 있었다.
“짐의 적은 운주 반란군만 있는 게 아니구나.”
영흥제가 목소리를 낮추고 중얼거렸다.
적이 누구인지는 그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남몰래 결정을 내렸다.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됐다. 혼사를 정하는 건 이미 긴박한 일이었다.
허신년은 이미 다른 마음을 품고 암암리에 염친왕에게 빌붙었다. 그 결정은 분명 허칠안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만약 허칠안도 염친왕에게 돌아선다면, 영흥제의 자리는 위태로워졌다.
허칠안은 위연이 직접 발탁한 자였다. 위연은 황후와 오랜 벗이었으니 사황자의 사람을 확고하게 지지할 터였다. 무엇보다 허칠안과 회경의 관계도 아주 좋았다. 거기다 지금 허신년까지 사황자에게 붙었으니…….
지금 이 상황에 형세를 깨는 유일한 방책은 바로 동생 임안을 허칠안과 혼인시키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 혼인으로 황위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 * *
덕형원.
얼마 전, 회경은 서재를 일정 정도 개조했다.
모래판과 청주 지도를 옮겨와 책상에 병서를 가득 깔았다. 그중에는 허칠안이 쓴 그 ‘손자병법’도 포함돼있었다.
허칠안은 이 책이 손자가 쓴 것이라 말했지만 회경도 알았다. 그가 어디서 손자를 구하겠는가? 그냥 사람을 멋대로 놀린 것뿐이었다.
공주로서 이렇게 청주 전쟁에 마음이 얽매이는 건 확실히 쉽지 않았다.
사실 회경은 병법에 정통하지 않았고, 행군하고 전투하는 건 더욱이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요 며칠 문을 닫아걸고선 병서를 읽고, 모래판 훈련을 하며 아주 빠르게 성장했다.
물론 이는 그저 대국적인 관점에서의 진보였다. 실질적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진을 치는 건 많은 경험이 필요해서 탁상공론은 큰 의미가 없었다.
책상 뒤, 우아한 긴 치마를 입은 도도한 장공주가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는 2가지 일이 적혀 있었다.
첫째, 허칠안의 추진 아래 고족은 대봉과 동맹을 맺고 청주를 지원한다.
둘째, 조위가 직접 청주의 상소문을 보내왔다.
첫 번째는 회경도 이미 알고 있던 것이라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정보에 관해서는 그녀도 한참이나 음미했다.
그때였다. 순간 문 앞의 광선이 어두워졌다.
이내 궁녀가 서재 밖에서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공주마마, 염친왕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회경은 종이를 소매 속에 거두고, 궁녀와 함께 내청으로 갔다.
* * *
내청 안.
위풍당당한 풍채의 염친왕은 자색 장포에 옥대를 차고 있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찻잔까지 들고 있으니, 중후한 기품도 더해졌다.
“넷째 오라버니, 어째 제 덕형원에 올 여유가 생겼습니까?”
회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영흥제가 황위에 오른 뒤, 형제들을 모두 황궁에서 ‘내쫓았다’. 하지만 아직 출가하지 않은 누이들은 여전히 궁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친왕들은 공연히 입궁할 일이 없었다.
염친왕은 내청 안의 궁녀를 물리곤 나지막이 말했다.
“내 듣자 하니 허칠안이 아주 낮은 대가로 고족과 동맹을 맺어 청주를 지원할 고족 정예병을 불러들였다지.”
회경이 도도하게 말했다.
“좋은 일이지요.”
염친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일이지. 나한테는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지만. 하지만 또 나쁜 일은 아니다. 기껏해야 기회를 더 기다리는 것뿐이니. 내가 오늘 온 건 다른 일 때문이란다.”
“말씀하시지요.”
염친왕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조위가 입궁했다. 감정이 운록서원을 200년간 억누른 덕에 조위는 이번 생에 고작 2번 입궁했지. 한 번은 아바마마께 죄기소를 쓰라고 압박할 때였고, 그다음이 이번이었다. 회경은 감정의 뜻이 뭐라고 생각하지?”
‘지난번 입궁한 건 그럴 법해도, 이번엔 고작 접본 한 부를 보내기 위해서?’
회경은 넓은 소매를 접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담담하게 말했다.
“넷째 오라버니께서 추측한 바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염친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어려운 시기가 닥치자 아마 감정이 운록서원과 협조하여 조위를 조정에 들여보내 관리가 되게 하려는 것이겠지. 3품 전봉인 대유는 감정이 어깨를 낮출 가치가 있거든. 내 이번에 너를 찾은 건 너와 함께 청운산에 가서 조위 원장을 만나고 싶어서다.”
그는 비교적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회경은 반쯤은 운록서원 서생인 셈이었다. 서원에서 여러 해 동안 학문을 탐구한 적이 있었다. 조위가 회경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을 리는 없었다.
회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넷째 오라버니가 저를 찾지 않았다고 해도 제가 찾아갔을 거예요.”
염친왕은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좋은 동생이구나.”